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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노는 게 더 좋다
<20대 여성 ‘일’을 논하다> 단기 프로젝트와 놀기에 전념하며  
 

20대 여성들의 노동 이야기. 경험을 토대로 ‘일’의 조건과 의미, 가치를 둘러싼 청년여성들의 노동담론을 만들어가는 이 기획은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지원을 받습니다.  일다 www.ildaro.com 

 

 

하루 하루를 모으면 그 사람의 생활이 보일 거다. 생활의 면면들을 모으면 그 사람이 보일 거다.

 

내가 두어 해 회사를 다니면서 놀랐던 것은 다들 내 하루를 ‘일’로 채우길 원했단 거다. 누군가는 그렇게 해야 성장한다고 말했다. 어떤 사람들은 칼퇴근 욕망을 어리다고 얕잡았다. 사무실에 앉아서 4시간이 지나면 엉덩이가 터질 듯이 아프고 자꾸 단 음식이 먹고 싶어졌다.  나는 일을 관두기 직전까지도, 왜 퇴근하고 팀워크를 다지러 술 한 잔 하러 가는 지 이해 못했다. 오로지 일의 효율을 위해서라도, 남은 하루는 다르게 채우는 게 낫다 생각했다.

 

나는 일을 적당히 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것은 일련의 노동시장 경험으로 얻은, 나의 작은 결론이다. 되도록이면 짧고 굵게, 근근이 하면 좋다. 일을 적당히 하면 제대로 놀 수가 있다. 정성과 온 맘 다해서, 열심히 놀 시간과 여유가 생긴다.

 

‘친구들은 어떻게 먹고 살까?’

 

나는 내가 하는 일에 애정이 있었다. 그나마도 없었으면 애초에 덧붙일 이야기도 없었을 거다. 그리고 돈을 필요로 하는 각종 목표물이 있었다. 짧게는 적금을 들고 있었고, 길게는 그 돈으로 ‘내 (월세)집 마련’의 꿈을 꾸고 있었다. 아직도 부모님은 아쉬워하시지만, 20대 팔팔이가 부모와 한 공간에서 숙식하는 건 그야말로 무리라고 생각했다. 일과에서 이동 시간이 너무 긴 것도 힘들었다. 그래서 2,3년 열심히 벌면 독립할 수 있으리라 계산기를 두들기곤 했다.

 

하지만 웬걸. 예상보다 직장 생활은 빨리 파탄이 났다.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나는 대학을 졸업하며 다시 순수한 백수로 복귀했다. 통장 잔액을 확인하고, 방에 있는 동전을 긁어 모아 다시 정리해도 보증금을 내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다시 취직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내 친구들은 어떻게 먹고 사는지 한 명씩 만나서 얘기해보기도 했다. 이력을 사용해서 비슷한 곳에 바로 지원하지 않고 그렇게 사람들을 만나고 다닌 걸 보면, 더 이상 통상 ‘직장일’이라고 부르는 종류에 욕심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여럿 만나던 중에 굉장히 극적인 타이밍으로 작업실을 만들고 싶어하는 언니를 만났다.
 

▲ 셰어하우스.  집에서 밤샘 작업을 하고 있는 모습. 장난치며 사진 찍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  © 윤우  

 

나만 쓰는 집이 아니면 어떤가. 같이 작업도 하고, 밥도 먹고, 잠도 자고, 무엇보다 돈을 분담할 수 있다. 얼떨결에 셋이서 집을 구했다. 내가 모은 돈은 보증금 1/n을 내고도 1년의 생활비를 충당할 만큼 풍족한 액수로 변해있었다.

 

룸메이트와 동네친구들이 함께 지탱해주는 생활

 

일단 공간을 얻고 꾸려가다 보니 재미있는 일이 많이 생겼다. 옆집의 또 다른 셰어하우스 식구들과 왕래가 생기고, 동네에서 비슷하게 공동으로 생활하는 친구들과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죄 빈털터리로 나와 별반 다를 것 없는 사람들인데 얼굴에 밥벌이가 주는 피로로 주름진 이는 하나도 없다.

 

이왕 돈 없이 모여 살게 된 거, 이런 저런 일도 같이 벌이고 쌀이나 옥수수 따위를 공동구매 하기도 한다. ‘내 집의 나’로 살아가는 게 독립이라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룸메이트들과 동네  친구들이 물심양면으로 풍족한 생활을 지탱해준다. 이들과 함께 하다 보면, 그래도 남들만큼은 벌어야 한다는 강박과 초조함이 잦아든다.

 

좀 빡빡하게 가끔 빈대도 붙으면서 자기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 있다. 있으면 있는 대로 좀 쓰다가 돈 떨어지면 다시 벌 때까지 방콕 하는 사람도 있다. 아예 다른 삶의 방식을 고민하는 이들도 있다. 서로에게 이렇게 사는 방향도 있다는 표본이 되어준다. 배짱 두둑하게 살아가는 모습 만으로도 상호 용기를 얻어간다.

 

그리고 지금 나는 거의 백수에 가까운 비정규직이지만, 나를 속이거나 학대하거나, 폭력을 외면해야 하는 노동은 하지 않는다. 나를 사람이 아닌 돈으로 보는 이와 일하고 싶지 않다. 더 나아가서 지루하고 흥미를 느낄 수 없는 작업의 고통을 감당해가며 돈을 벌 생각은 없다.

 

일은 경제 규모에 상관없이 어디까지나 선택의 영역이지 강제적 영역이 아니다. 즉, 어떤 비상식적인 일이나 인권 침해도 먹고 살아야 한다는 강박 아래 허용될 순 없단 거다. 이 기준들은 달마다 꼬박 찍히는 월급 보다 마음을 더 든든히 챙겨준다.

 

면생리대를 만들고 행사 공간을 꾸미며…

 

그래도 방세를 생각하면 놀기만 할 수 없다. 말 그대로 방세를 위해 최소한의 액수가 필요하다. 다행히도 위의 까다로운 기준들을 통과하면서도 푼돈을 벌 수 있는 몇 가지 일이 있다.
 

▲ 생리대를 장터 좌판에서 파는 건 힘든 일이다. 다들 관심은 있지만 남사스러워(?)하기 때문이다. 역시 매출은 주문 제작이 더 많다.   © 윤우  

 

하나는 면생리대 만들기이다. 이건 삼 년 전부터 혼자 만들어 쓰기 시작하면서 좋았던 경험들을 다른 이와 나누고 싶어서 시작했다. 미싱도 없고, 더 꼼꼼히 만들고 싶기도 해서 미련하게 손바느질로 정성 들인다. 처음엔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같이 만들곤 했다. 직접 만들기 귀찮아하는 친구에게 만들어주다가 판매까지 하게 됐다.

 

시장을 여러 번 드나들다 보니 무형광, 무표백 유기농 면이 눈에 띄어 원단을 싹 바꾸기도 했다. 이제 시중에 이름 내놓고 파는 것 보다 내 생리대가 더 좋다는 자신감이 있다. 하지만 하루 종일 만들고 주문 받아 팔아도 워낙 효율이 떨어져서 돈을 번다고 하기에는 좀 애매하다. 요새는 필요해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살짝 알려주어 소량으로 판다. (그래도 이 돈으로 까까는 사먹는다!)

 

다른 하나는 행사 공간 디자인 기획하기 및 장식물 만들기이다. 원래 이쪽 일을 하던 룸메이트 언니를 도와주다 보니 같이 하게 됐다. 마을 장터나 음악 축제가 열릴 때 그 장소를 이벤트에 맞게 새로 구성하고 꾸미는 일이다.

 

야외 행사는 날씨가 추울 땐 보통 열리지 않으므로 일년 중 따스한 계절을 중심으로 일한다. 그리고 매일 열리는 행사가 아니니, 한 달에 길어봤자 보름을 준비하고 설치하면 되는 단기 알바 같은 형태다. 한 달이 무려 30일인데 밤새서 바짝 일하는 날은 손에 꼽으니 참 훌륭한 돈벌이다. 워낙 생활 규모가 작아서 이렇게 일하고 받는 돈으로 근근이 또 한 달은 족히 보낼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다 보면 정말 재미있는 일이더라. 손 놓고 있었던 그림도 맘껏 그리고, 잘 안 풀릴 땐 룸메이트와 태업을 선언하고 반나절 맥주를 들이키기도 한다. 작업실이 곧 숙식하는 집이라, 피곤할 땐 침대로 5초만에 쓰러질 수 있다. 진정한 복지는 이런 게 아닐까? 하며 행복해한다. (보너스를 얹어주거나 때마다 놀이공원 이용권을 뿌리는 종류의 복지와 비교해서 말이다.)

 

직장에 다니지 않으면 무기력하다고?
 

▲ 내가 열심히 탐구하고 욕망하는 건, 더 좋은 삶에 대한 가능성이다.  © 윤우 
 

요 근래 삼포 세대(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세대), 연애하지 않는 젊은이, 사토리 세대(물질과 출세에 관심 없는 세대) 같은 단어들이 유행하는 모양이다. 기성 세대의 시각에서 나 같은, 노는걸 훨씬 좋아하며 박박 일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적게 벌어 여럿이 쓰면 풍족하단 식의 사고를 그런 말들에 껴 맞추고 싶어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건 어디까지나 자본을 쥔 어른들의 지레 겁먹음 같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사토리 세대는 결정적으로 물질적 욕망이 적고 연애나 결혼에의 욕구가 없는 경향을 말한다. 반대로 나는 자본의 기준에서 몇 발짝 떨어져 있을 뿐, 욕구와 욕망이 들끓는 평범한 사람이다. ▣ 윤우

 

내가 열심히 탐구하고 욕망하는 건 따로 있다. 지금보다 더 좋은 삶에 대한 가능성이다. 굳이 돈벌이로 전환하지 않더라도 잘하는 일이 누구나 있다. 내 경우에는 이런 특기들을 내가 사는 풍경에 잘 버무려 풍성하게 삶을 꾸리고 싶다. 작게는 내 삶을 그렇게, 크게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그렇게, 더 크게는 친구들과 떼거지로 그렇게 살고 싶다.

 

작물 기르는 데 도가 튼 사람은 음식 만들기를 즐기는 이와 묶이면 좋다. 집 지을 줄 아는 사람은 공간 꾸미는 걸 좋아하는 이와 묶여야 빛이 난다. 땅굴 파는 책벌레는 연결고리 마당발이 이어주면 펄펄 난다. 무엇이든 자본과 짝짓기 하는 대신, 사람들끼리 활발히 짝짓는 게 내가 생각하는 더 나은 풍경이다.

 

지금보다 더 많이 놀고 배우면서, 온갖 제약들을 비웃으며 같이 살고 싶다. 사람들과 생활하며 유용하게 쓸 능력을 더 키우면 좋겠다. 그게 단순히 돈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는 건 슬픈 이야기다. 직장에 고용되지 않은 걸 함부로 무기력이라 평하는 건, 그래서 우스운 이야기다.

 

그나마 방세를 생각하고 돈이 되는 일을 하지만  비정규직 임금과 오르는 월세가 언제까지 균형을 맞출 진 모를 일이다. 홍대 부근에서 세를 내다가 용산에 와서 풍족해지듯, 혼자 살다가 여럿이 살아 두둑해지듯, 다른 형태의 변화가 또 그 빈곤을 두둑이 만들 수 있다고 기대한다. 앞으로도 말이다. ▣ 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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