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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홀로 선거운동’을 하며 다시 품은 희망
<20대 여성 ‘일’을 논하다> 깡시골 출신 환경운동가
※ 2014년 <일다>는 20대 여성들이 직접 쓰는 노동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경험을 토대로 ‘일’의 조건과 의미, 가치를 둘러싼 청년여성들의 노동 담론을 만들어가는데 함께할 필자를 찾습니다. 이 기획은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의 지원을 받습니다. ▣ 여성주의 저널 일다
화력발전소 장학금을 ‘생명수당’이라 불렀던 아이
나는 완전 시골출신이다. 조금 더 실감나게 이야기하면, 지금의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 분들과 어릴 적 경험이 비슷하다.
어릴 때는 다른 아이들처럼 누구나 꾸던 수많은 꿈을 꾸었다. 소설가도 되고 싶었고, 천문학자도 되고 싶었다. 그러나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은 환경운동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시골에는 화력발전소가 있다. 중학생일 때 나는 화력발전소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았는데, 이것을 ‘생명수당’이라고 불렀다. 화력발전소에서 주최하는 백일장에 나가서 화력발전소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백일장의 주제는 ‘화력발전소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다. 그 해 대상 수상작은 화력발전소의 기둥을 벌레가 되어 돌아다녀보니 깨끗하다는 내용으로, 카프카의 <변신>을 패러디한 작품이었다.
대학에 다니면서 졸업하기 전부터 환경운동을 시작하였다. 우연한 기회로(조금은 의도적으로) ‘춘천생명의숲’이라는 곳에서 인턴활동을 하게 되었고, 졸업과 동시에 상근직으로 매일 출근하게 되었다.
주변에서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적은 임금에, 주말과 저녁에도 근무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즐거웠다. 하고 싶은 일들을 할 수 있었기에.
평창올림픽 개최예정지 가리왕산을 보존하기 위해
▲ 영화 <아바타>를 보는 느낌이 들 정도로 신비하고 아름다운 가리왕산을 보존하기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 김은지
2012년에는 가리왕산을 지키는 일을 시작하였다. 가리왕산은 2018 평창동계올림픽 활강경기장 예정지이다. 이 산은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있는, 숲과 식생을 보호해야 할 가치가 있는 산이다. 가리왕산에 올라가보면 영화 <아바타>에 등장하는 산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신비하고 아름답다.
그런 산을 보호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가리왕산 보전과 환경동계올림픽 실현을 위한 대책위원회’에서 실무간사로 활동하게 된 것이다. 가리왕산에도 다녀와보고 공무원, 경기장 개발 찬성자와 반대자들, 그리고 언론과도 만났다. 그런데 스물다섯 살밖에 먹지 않은 어린 여자가 그런 일을 한다고 하니, 무시를 당하기 일쑤였다.
“어린데 뭘 알겠어.”
나의 발언은 무시당했고, 요구는 묵살당했고, 나의 활동은 얕잡아졌다. 비단 내가 어려서만은 아니었다. 환경단체나 환경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힘, 더 정확히 말해 ‘권력’이라는 것이 없었다.
게다가 환경을 지키려는 것만으로도 ‘종북’ 또는 ‘좌빨’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는 현실도 안타까웠다. 생태를 보호하는 것이 그런 뜻이라면 나는 기꺼이 ‘종북’, ‘좌빨’이 되어도 좋다고 했다.
심지어 ‘네가 시골 사는 사람의 기분을 아느냐’, ‘살아보지 못한 사람은 개발에 얼마나 목말라 있는지 모른다’는 말도 들었는데, 그때 나는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
“저는 시골 출신입니다. 완전 깡시골!”
6.4지방선거에 녹색당 비례대표로 출마하다
그런데 내가 일하는 단체에서 다른 사업들과 가리왕산 보존 활동을 병행하면서, 약간의 괴리감을 느끼게 되었다. 가리왕산 일을 할 때는 타협 없이 ‘쎄게’ 운동을 진행하는 편인데, 단체에서 다른 일을 할 때는 수위를 조절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어느 단체나 마찬가지 상황이겠지만, 회원님들의 정치적 성향을 생각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강경하게 주장하고 행동해나가도 해결하기 어려운 일을 미온하게 해나가니, 결과는 당연했다. 언제나 패배였다. 과연 어느 방식이 옳은지, 마음의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2014년이 되었다. 지방선거가 있는 해. 나는 녹색당 당원으로서, 이번 6.4 지방선거에서 녹색당이 선전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 녹색당 강원도 비례대표로 출마해보라는 제안이 들어왔다. 몇 번 거절을 했지만, 결국 그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처음에는 투표용지(비례대표)에 녹색당의 이름이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만족했었다. 그러나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다. 내가 후보로 나간 이상,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야 했다.
당선이 되리라는 확신이나 기대는 없었지만, 당선이 된다면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권력을 가지고 싶었다. 이유는 하나다. 정부와 지자체가 국민을 두려워하게 만들고 싶었다. 함부로 일어나는 개발에 대해 알고 싶어서 정보를 요구하는 일이 어렵지 않도록, 공무원들의 수작으로 피눈물 흘리는 사람들이 없도록.
‘후보의 딸이 아니라, 제가 후보입니다’
▲ 6.4 지방선거에 출마해 ‘나홀로 선거 운동’을 하면서, 나는 오히려 자신감을 얻었다. © 김은지
소수정당인 녹색당은 돈이 없어서 선거운동을 하는데 치명적인 한계가 있었다. 선거운동원을 꾸리기도 어려웠고, 그 흔한 공보물 한 장 보내지 못했다. 결과는, 물론 낙선이었다. (이번 선거에서 녹색당의 광역비례의원 득표는0.99% 정도였다.) 그러나 오히려 나는 ‘나홀로 선거 운동’을 하면서 희망을 얻었다. 자신감을 얻었다. ‘할 수 있구나. 내가 변화시켜야겠다’ 라고 하는.
다른 후보들은 개인 차량을 타고 이동했지만, 자가용이 없는 나는 시내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선거법상 플랜카드도 걸 수 없기 때문에 발로 뛸 수 밖에 없었다. 홍보용 판넬도 기획사에 맡기지 않고 직접 재료를 사서 만들었다. 선거사무소도 차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혼자 선거운동을 해서 외롭지 않았냐고 묻지만, 나는 선거운동 스케줄도 자유롭게 짤 수 있었고 갈등도 겪지 않아서 좋은 점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사실, 출마하기 전에는 돈이 있는 사람이 선거를 하는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돈 없는 내가 선거를, 그것도 후보로 나갔다는 것이 즐거웠다. 선거에서 쓴 비용은 총 25만원 정도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젊은 여자가 혼자 녹색당 피켓을 들고 다니며 선거운동을 하니 사람들은 신기해했다. 내가 선거운동원인 줄 아는 사람들이 많았다.
상대편 후보 진영에서 “누구누구 후보의 딸 누구입니다! 저희 아빠 잘 부탁드립니다~”하면서 주는 명함을 받으며, “저는 제가 후보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하며 명함을 건넸다.
선거운동을 하며 “녹색당? 이런 정당이 많아야 하는데”, “정당 투표는 무조건 녹색당으로 할게요!” 라고 응원해주는 분들을 통해 힘을 얻었다. 개발이나 성장이 아니라 환경을 전면 내세운 정당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표를 주었다는 점에서, 변화의 발판이 마련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 같은 젊은 사람들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더 많이 출마했으면 하는 바람도 갖게 되었다.
실업급여를 받으며, 재충전의 시간을 갖는 중
어린 나이에 사회 생활도 제대로 해보지 못한 상태에서 시민단체 일을 시작했다고 욕도 먹었다. ‘일반 회사에서는 이렇게 하지 못한다. 너는 사회 생활을 해보지 않아서…’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기가 죽기 마련이었다. 첫 직장이 시민단체인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말이다. 시민단체는 회사와는 당연히 다르고, 그만큼 발언의 자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하지만 그만큼 칭찬도 들었다. 신념이 있고, 시민단체에 들어온 이유가 확실했고, 그 활동을 간절히 원했다는 점에서. 또 좋아하는 일이기 때문에 직무에 대한 능률도 좋은 편이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더니, 칭찬을 받으면서 더 일을 잘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시민단체 일은 다른 직장들과 달리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회사에서는 ‘반문’이라는 것을 거의 못하지만, 시민단체는 가능하다. 휴가도, 휴식도 쉽게 요구할 수 있는 편이다. 하고 싶은 일을 기획해서 진행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만큼 감정적으로 자유롭지 못한 면도 있었다.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활동가로서의 삶’과 ‘나로서의 삶’을 분리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지역의 환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집회 일정과 오래 전부터 계획했던 여행이 겹쳤을 때, 나는 여행 내내 걱정과 죄책감을 동반하고 다녀야 했다.
시민단체에서 일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문제가 된 것은 임금이었다. 인권을 중시하는 시민단체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에게 최저임금 수준밖에는 챙겨주지 못하고, 근무시간 외에 일하는 것이 당연시된다. 사실 이 문제는 시민의식이 변해야만 해결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시민단체는 회원들의 관심과 참여, 후원을 통해 운영되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는 좋은 말로 이야기하면 프리랜서 환경활동가쯤? 쉽게 말해 백수다. 7월 말에 단체에서 퇴직했으니 아직 파릇파릇한 백수다. 내게도 과연 나라에서 주는 돈을 받는 날이 올까 싶었는데, 실업급여라는 것이 나와서 현재 나랏돈을 받으며 생활하고 있다.
지금은 새로운 직장을 구하는 중이다. 아마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이 바닥을 떠나지 못하고 또 다른 환경운동단체에 찾아 들어갈 것이 뻔하다. 그래도 지금은 한 번도 쉬는 기간 없이 달려온 나에게, 재충전할 수 있는 기회와 공부를 통해 나를 더 발전시키는 시간을 가질 생각이다. ▣ 김은지
<여성주의 저널 일다> http://www.ildaro.com <영문 사이트> http://ildaro.blogspo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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