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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다 하는 그런 일도 제대로 못해?”
<20대 여성 ‘일’을 논하다> 중소기업 사무관리 담당자 
 

20대 여성들이 직접 쓰는 노동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경험을 토대로 ‘일’의 조건과 의미, 가치를 둘러싼 청년여성들의 노동 담론을 만들어가는 이 기획은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의 지원을 받습니다. <일다> www.ildaro.com

 

총무, 경리, 살림꾼…내 이름은 여러 개

 

우리 회사는 직원 수가 열 명 남짓한 소규모 중소기업으로 외국에서 상품을 수입해 판매하는 일을 한다. 수입에서부터 판매까지 한 곳에서 이뤄지다 보니 직원 수에 비해 일이 많은 편이다.

 

나는 돈과 관련된 재무 전반을 보며, 각종 사무를 처리하고, 급여 및 인사 관리를 하고, 상품의 판매량과 재고량을 정리하고, 사무실 청결 및 유지 보수를 맡고, 직원들이 각자의 업무에 매진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손님들 차 접대를 하며 대표의 비서 역할 등을 했다.

 

회사는 나를 ‘사무관리 담당자’라고 부른다. 거래처에서는 나를 경리, 총무, 회계, 경영지원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원래는 다 다른 직종이지만 회사가 작다 보니 한 명이 여러 일을 같이 하는 거다. 그리고 이 업무들을 요약하자면, 사무실 살림을 맡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내 비공식 명칭은 ‘사무실 살림꾼’이다. 가정집 살림 하나만 해도 제대로 하기가 쉽지 않은데 하물며 여럿이 근무하는 사무실이야. 거기다 가사노동이 손은 많이 가는데도 인정은 별로 못 받듯이, 내 일 역시 그랬다.

 

규모가 큰 기업에서는 업무 세분화가 이뤄져 자기 역할이 분명하지만 우리는 그에 비하면 두루뭉실한 편이다. 모든 직원들이 비슷한 분야의 일을 묶어서 같이 한다. 대표는 직원들에게 말한다. “모두 멀티플레이어가 되어라!”

 

나 역시 멀티플레이어로 힘차게 뛰었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도 제자리걸음을 면하지 못하는 느낌이 들었다. 가장 큰 이유는 회사 내에서의 처우와 인식 때문이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 아무 것도 아닌 일?

 

우리는 상품 판매 수익이 가장 큰 수입원이다 보니 나를 제외한 모든 직원이 상품을 수입하거나 혹은 판매하는 일을 하고 있다. 나는 그 직원들을 지원하고 회사 전체가 돌아가기 위해 필요한 일을 하다 보니 상품 자체와는 가장 연관이 적었다. 상품이 돈을 벌어들이니까 상품을 담당하는 직원들도 중요해질 수밖에 없었다. 회사의 모든 일은 그들을 중심으로 굴러갔다.

 

처음엔 중심이 아니어도 괜찮다고 생각했고 또 나는 업무가 다르니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회사 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나만 모르고 있다거나, 일 때문에 필요한 정보임에도 상품 관련된 것들은 자기네들끼리만 공유하는 상황들이 반복되자 소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일 때문에 물어봐도 자세히 안 알려주는 경우도 많았다. 그건 단순히 같이 일하던 상사나 동료 개개인의 문제였을까?

 

내가 사무실이라는 화분에 열심히 물을 주고 있어도 그 흙에서 열매를 맺는 일에 비하면 내 일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내 일은 잘 하면 아무 말이 안 나오고, 못하면 당장 시끄러워졌다. 다른 직원들의 실수는 서로 업무를 주고받는 당사자들만 아는 경우가 많아 조용히 넘어가는 경우가 많은데, 내 실수는 사무실 전체를 상대하다 보니 조용히 넘어가지도 못했다.

 

특히 대표는 내 일 처리가 마음에 안 들면 다짜고짜 불호령을 내렸다. 주 레퍼토리는 이랬다. “누구나 다 하는 그런 일도 못해?”

 

나는 “쉬운”, “애들이 하는”, “덧셈 뺄셈만 하면 되는” 일을 한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대표가 내게만 화를 낸 것은 아니다. 다른 직원들에게도 화를 냈다. 하지만 빈도수가 확연히 달랐고, 다른 직원들의 경우 애들처럼 다루지도 않았다. 그들의 업무 자체를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폄하하지도 않았고.

 

처음엔 이런 반응이 내가 회사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런 줄 알았고, 그 다음엔 내 나이가 아직 어려서 그런 줄 알았고, 그 후엔 대표 성격이 그러니까 그러려니 하고 버텼다. 하지만 내 실수가 줄고 업무 처리가 향상되고 점점 더 많은 일을 하는데도 대표는 여전히 그런 식으로 나를 대했다.

 

‘어린 여직원’에게 맡겨지는 업무 

 

▲  내가 사무실이라는 화분에 열심히 물을 주고 있어도 그 흙에서 열매를 맺는 일에 비하면 내 일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말은 직업에 따라 차별이 심하니까 반작용으로 나온 말일 것이다. 우리 사회는 하는 일에 따라 그 사람에 대한 대우와 인식이 다르다.

 

처음 입사했을 때부터 사무관리직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은 엄마는 못마땅해하셨다. “그게 옛날 경리 여사원들이 하던 일이잖아. 그런 일은 오래 못해. 발전이 없으니까.”

 

50대 중반의 엄마가 볼 때 내 일은 사무실의 모든 잡일을 떠맡은 어린 여사원의 이미지였다. 지금처럼 사무 자동화가 되기 전에는 경리 여사원이 많았다고 한다. 그들의 원래 업무는 재무 회계였지만, 실제로는 남자 직원들(주로 그들이 상사였기에)의 ‘보조’로 사무실을 지키는 역할이 더 두드러졌던 것 같다.

 

문제는 당시에도 그런 일은 어린 여자들이 하는 일이었고, 지금도 관행상 이런 일은 남자 혹은 나이든 여자가 하기에는 힘든 일이다. 손님에게 차 대접하는 일만 해도, 일단 남자에게 이런 류의 서비스를 받는 것이 익숙하지 않으니까 관례적으로 그들에게 시키지 않고, 대접받는 사람들이 보통 자신보다 나이 어린 사람에게 그런 대우를 받는 것이 편하기 때문에 나이든 여자도 더 이상 이런 일을 하기 힘들다.

 

아주 큰 규모의 회사거나 세무, 회계 계통 기업이 아닌 이상 회사의 경리사원은 ‘어린 여직원’이라는 사실은 지금도 여전하다. 아, 경리라는 직함은 더 이상 잘 쓰지 않는다는 점은 빼고.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다는 불안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기에 하나라도 틀리면 안되고, 누구나 하는 일이기에 항상 회사 막내들에게 주어지는 일이고, 누구나 대체하기 쉬운 일이라면 나는 회사에 왜 존재하는 건지.

 

내 일이 별 것 아닌 것처럼 여겨지고 있다는 사실은 곧 언제든지 잘릴 수 있다는 불안으로 이어졌다. 나를 대체할 인력은 넘칠 것 같았고 회사는 쉽게 나를 다른 사람으로 교체해버릴 것 같았다.

 

나보다 늦게 들어온 직원들이 먼저 직함을 달고 연봉이 오를 때에도 나는 변함이 없었다. 여기보다 더 나은 대우와 인정을 해주는 회사로 이직하고 싶었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다. 다른 회사라 하더라도 어차피 비슷한 일을 하면 비슷한 대우를 받을 것 같았다. 아예 다른 직종으로 이직을 하면 모를까. 특별한 능력이나 자격 없이는 다른 직종으로 가기도 어려웠다. 밥벌이가 궁한지라 회사를 그만둘 수는 없고….

 

그러다 회사 규모가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다. 각 부서마다 직원들은 늘어나는 업무에 힘들어했고 결국 인력을 충원시키기로 결정했다. 신입사원이 여러 명 늘어났다.

 

나 또한 업무가 많이 늘었다. 하지만 내 일을 같이 나눠 할 사무관리직은 신규 채용이 되지 않았다. 대신 다른 부서의 신입사원들이 내 일을 나눠 하게 되었다. 정식으로 윗선에서 그런 지시가 내려졌다. 내가 하던 일 중에 가장 손이 많이 가고 번거로웠던 사무실 잡일들은 이제 막내의 몫이 되었다.

 

하지만 막내로 일하던 직원이 일을 익숙하게 할 만해지면 새로운 신입이 들어와 막내 자리가 바뀌었다. 그럼 다시 처음부터 새 막내에게 일을 가르쳐야 했다. 혹시나 막내가 그만두기라도 하면 그 위에 있던 직원이 다시 막내가 되어 일을 했다.

 

막내에서 막내로 항상 말단 직원이 하는 일. 숙련된 인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일. 분명히 이것도 일이자 ‘노동’이었지만 이게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될 수 없었다. 나 또한 다른 이들처럼 성장 가능성이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지지와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일터를 꿈꾸며

 

회사가 커진 덕으로 지금은 연봉도, 직급도 처음에 비하면 많이 올랐다. 시간이 많이 흘러 사무실 잡일에서 손을 뗀 지도 꽤 됐다. 그 일들은 여전히 막내들의 몫이다. 지금 조건만 놓고 보면 처음보다 훨씬 좋아졌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단순히 현재의 몇 가지 조건이 좋다고 해서 그 동안 겹겹이 쌓인 문제들까지 다 해결되는 건 아니다. 여전히 고민은 남는다. 나는 여기서 하는 이 일이 즐거운가?

 

직장 생활하는 친구들과 이런 고민들을 풀어보면 답변은 뻔하다. “어떻게 회사를 좋아서 다녀? 아무리 좋아하던 일이라도 밥벌이가 되는 순간 힘들어 지는 거야. 그냥 돈 벌려고 다니는 거지.”

 

나 또한 회사를 좋아서 다니지는 않았다. 숱한 어려움에도 계속 다녔던 건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여전히 다른 일을 꿈꾼다. 단순히 돈만 버는 것 말고도 다양한 가치들을 실현시킬 수 있는 일, 지지와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일을.

 

이런 곳이 있으면 좋겠다. 모든 일을 존중하고 일한 수고를 알아주는 곳. 모든 이가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일할 수 있는 곳. 직원들이 일을 통해 자신이 회사의 부속품이 아닌 유기체라고 느낄 수 있는 곳. 그곳에서 나는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그곳을 찾아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나는 계속 탐색 중이다. 

▣ 누구씨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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