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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아르바이트 노동조합을 만나다 
<20대 여성 ‘일’을 논하다> 알바노조 대학분회 김은하
 

 

20대 여성들이 직접 쓰는 노동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경험을 토대로 ‘일’의 조건과 의미, 가치를 둘러싼 청년여성들의 노동 담론을 만들어가는 이 기획은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의 지원을 받습니다. <일다> www.ildaro.com 

 

비정규직 노동자였던 엄마를 보며

 

2월 26일, 대학 새내기 새로 배움터의 자기소개 시간. “저는 아르바이트 노동조합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은하 라고 합니다.”

 

20살, 나의 첫 사회생활은 '아르바이트 노동조합‘(알바노조)과 함께했다. 노조 활동을 한다고 하면 색안경을 끼고 보는 사람이 많다. 우리 사회에서 노조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은 것도 한몫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겐 이런 활동을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

 

내가 노조 활동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것은 엄마의 영향이 컸다. 엄마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일을 시작했다. 대부분의 경력단절 여성이 그렇듯 우리 엄마도 비정규직 꼬리표를 달고 여러 회사를 전전해야 했다. 급식 도우미 1년, 토마토 선별장 2개월, 요구르트 제조회사 2년 6개월, 연구소의 기간제 근로자 6개월 등 불안한 조건을 견디며 일하셨다.

 

문제는, 요구르트 공장에 생산직으로 입사한 지 2년이 지난 후부터 시작되었다. 똑같은 일을 하고도 남성보다, 정규직보다 적은 임금을 받았다. 잦은 야근과 주말 근무에도 정규직이 되고자 하는 희망 때문에 그저 참기만 했다. 그러다 마침내 참다못한 엄마는 회사에 근무 시간에 따른 임금 내역을 정리한 문서를 요구했다. 그러나 회사는 ‘그런 것 없다’ 발뺌했다.

 

예고 없는 연장 근무를 시키면서도 야간 수당, 주휴 수당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았다. 심지어, 심할 때는 24시간 연속으로 근무 시간을 늘리기도 했다. 엄마는 2년을 비정규직으로 근무한 후 정규직이 되었지만, 대우는 똑같았다. 결국, 회사에서 아무 것도 받지 못한 채 그만두었다. 노동자의 권리를 제대로 요구할 수 있는 장치도 없었을 뿐더러, 회사의 강압적인 태도는 노동자를 침묵하게 만들었다.

 

내가 엄마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나 자신을 스스로 챙기기도 바쁜 시기였다. 이 잠재울 수 없는 분노와 한없이 빠져드는 무력감 앞에서 지쳤을 때, 알바노조가 출범했다는 내용의 인터넷 기사를 보았다. 그때 당시 2013년 8월, 나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알바가 무슨 노조야?’ 이렇게 생각했지만, 알바도 노동자이기 때문에 노조를 통해 권리를 찾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큰 무기력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알바노조 활동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우리 엄마는 불안한 비정규직 노동자였으며, 나도 곧 비정규직 노동자로서 일을 하게 될 것을 생각하니 더욱더 그쪽에 관심이 갔다. 거짓말처럼 나는 서울로 상경해 알바노조 활동을 하고 있다.

 

조금이라도 나은 노동환경을 만들고 싶다

 

사람들은 알바를 ‘소일거리’, ‘시간 남아서 하는 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갈수록 사회는 양극화 되어가고, 이제 알바는 더 이상 예전의 소일거리가 아니라 생업이 되어버린 경우가 많다. 당장에 대학생들은 떨어질 줄 모르는 등록금, 생활비, 월세 이런 것들을 해결하려다 보면 할 수 없이 아르바이트를 전전해야 한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충남에서 상경해 서울에서 살다보니 기숙사 비용부터 시작해 나가는 돈이 한두 푼이 아니다. 

 

▲  ‘최저임금을 1만원으로’, ‘노동시간 단축’ 등의 거리 홍보를 하였다.  © 알바노조 성공회대분회 
 
내가 주로 노조에서 하는 일은 알바노조의 기조인 ‘알바도 노동자다’, ‘최저임금을 1만원으로’, ‘모두에게 기본소득을’, ‘노동시간 단축’ 등의 내용을 담은 리플렛을 돌리거나 서명 운동을 하는 일이다.

 

가끔 지칠 때가 있다. 4월, 나는 홍대 ‘걷고 싶은 거리’ 부근에서 최저임금을 1만원으로 올리자는 캠페인을 하고 있었다. 젊음의 거리 홍대에는 팔짱을 낀 채 지나가는 연인들, 예쁜 옷을 입고 지나가는 20대들이 보였다. 그들에게 다가가 “최저임금을 2배로 올리자는 서명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하며 최저임금 1만원 지지 서명을 요청했다. 바로 서명해주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치 나를 비웃듯 지나갔다. 심지어, 화를 내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바뀌지도 않을 일, 헛수고를 왜 하냐’고 했다. 그러나 나는 조금이라도 나아질 노동 환경을 만들어갈 생각을 하면 이 활동을 멈출 수가 없다. 학내 캠페인도 마찬가지였다. 가끔 지나가는 사람한테 “선동하냐? 영업하냐?” 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이런 말을 들어도 나는 지금 이순간이 재미있고 행복하다. 조금씩 세상을 바꿀 것이란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최저임금도 못받고 일하는 알바 노동자의 현실

 

5월 1일 메이데이를 앞두고 한 달 동안 ‘알바데이 실천단’ 활동을 했다. 발로 뛰면서 많은 알바 노동자를 만났다. 그리고 4월 30일, 각 대학 알바데이 실천단이 모여서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 결과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작년보다 조금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근로계약서를 작성하는 사업장이 50%에서 60%로 늘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대학가에서 일하는 알바 노동자 중에는 최저임금 5,210원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3,500원을 받고 일하는 경우도 있었다. 사업자를 감시하고 안정된 노동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고용노동부는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안정된 일자리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평생 불안정한 노동 시장을 헤매며 살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내가 하는 일이 앞이 보이지 않는 일이라고, 너무나 머나먼 일이라고 낙담하지 않고 자부심과 보람을 느낀다면, 그것만으로도 위안을 삼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내가 하는 일을 ‘인연’으로 생각하면 조금은 애정이 생기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내가 알바노조와 만난 것은 인연이며, 나와 같은 길을 함께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기에 어두운 길도 헤쳐 나갈 수 있을 것만 같다. ▣ 김은하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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