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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출신의 ‘한반도 대표선수’로 사는 것
[조국과 이국 사이] 오리엔티어링 북한 국가대표 리경사 

 

 

필자 조경희씨는 한국에서 10년째 생활하는 재일조선인 3세이고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HK교수로 재직중입니다. 2000년대 이후 많은 재일동포들이 유학, 결혼, 취직을 통해 한국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돌아온’ 재일동포들의 삶의 역사와 일상을 소개합니다. ▣ 일다 www.ildaro.com  

 

서울대 교환학생, 북한 대표선수라는 특이한 이력 

 

▲  리경사씨는 오리엔티어링 북한 국가대표선수이자, 노르웨이 오슬로대학 소속으로 서울대 교환유학을 와 있는 재일조선인이다.  © 조경희 
 

2014년 5월, NGO 지구촌동포연대(KIN)의 포럼 자리에서 리경사씨를 처음 만났다. 그날 포럼의 주제는 조선적(朝鮮籍. 일본에 귀화하지 않고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지도 않은 재일동포들의 행정상의 적) 재일조선인들의 한국 입국 문제였다.

 

박근혜 정부와 같은 보수정권 하에서, 과거에는 가능했던 한국 입국이 어려워진 조선적자들의 현실을 공유하고 대안을 찾고자 하는 취지로 포럼은 진행되었다.

 

그런데 나중에 듣고 보니, 그 자리에 한국 입국이 불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는 조선적 재일동포가 와있었다는 것이다. 더욱 놀라웠던 것은 그가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 소속의 서울대 교환유학생이자, 오리엔티어링(orienteering: 혼자 지도와 나침반만 가지고 숲의 여러 지점을 통과해 목적지까지 찾아가는 경기) 북한 국가대표선수라는 이색 경력의 소유자라는 점이었다. 약속을 잡아 따로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어떤 경위로 한국으로 들어오게 되었는지. 그게 어떻게 가능했는지.

 

“그날 저는 발언을 안 했는데, 왜냐하면 조선적자가 그 자리에서 발언을 하면 포럼의 취지에 혼선이 생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포럼에 참가하면서, (다음에) 발언할 기회가 있으면 숨김없이 말하자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국적이나 여권 문제가 민감하게 들릴지도 모르나 그냥 오픈해서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최악의 경우, 더 이상 한국 입국이 어려워질 수도 있지만 그것도 포함해서 제 활동이니 괜찮습니다.”

 

조선학교 대신 일본학교를 택한 아이

 

경사씨는 재일동포 3세로, 탄광마을로 유명한 후쿠오카현 지쿠호 지역에서 태어났다. 여동생이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부터 부모님은 동생들을 조선학교에 보냈지만,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경사 씨는 친구들과 헤어지기 싫어 일본학교를 계속 다니기로 했다. 부모님도 어린 아이의 ‘선택’을 존중해줬다.

 

부모님이 총련에서 활동하셨고 동생들이 조선학교에 다녔던 관계로, 동포 커뮤니티와는 항상 가까이 지냈다. 게다가 할아버지, 할머니는 재일조선인들의 대표 직업인 호르몬야끼 식당을 운영하셨다. 어린 시절에 이미 자신이 일본인과 다르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깨달을 수 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다만 일본학교를 다닌 그는 학교에서도, 동포들 모임에서도 소외감을 느끼곤 했다. 그래도 그런 것들이 대수롭지 않았던 것은 부모님에 대한 무한한 신뢰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시기엔 할머니가 호르몬야끼를 한다고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기도 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초, 중을 통해서 조용하고 자주 우는 여자 같은 성격이었어요. 다만 울면서 돌아가도 부모님들이 잘 받아주고 확실히 케어를 해주셨어요. 중학교 이후는 따돌림 같은 것도 없어졌죠. 중고 시절 학교 성적이 거의 일등이었어요. 중학교 학교회장도 맡았고. 그런 것들 때문에 따돌림을 당하지 않게 되었을지 모르겠네요. 아버지가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하셨고 저 자신도 일단 열심히 했어요. 그래서 장래에는 학교 선생님, 혹은 학자가 되고 싶었어요.”

 

결국 나중에 경사씨는 이 두 가지 꿈을 거의 이루게 된다. 2009년부터 요코하마 공립 초등학교에서 2년 간 교사 생활도 경험했고, 또 국적 문제를 둘러싼 자신의 경험을 논문으로 풀어내기도 했다. 현재 오슬로 대학에서는 원래 희망했던 정치학을 전공하고 있다. 노르웨이어와 영어, 한국어 습득에도 여념이 없다.

 

공부만이 아니다. 조용한 아이가 품었던 끈기와 탐구심은 대학 입학 후 스포츠를 통해 그 진가를 발휘하게 된다.

 

임시여권 발급, ‘한국 대표선수’로 세계대회 나가다 

 

▲  2001년 헝가리에서 열린 주니어 세계선수권대회에, 여권이 아닌 ‘여행증명서’를 취득하고 ‘한국’ 대표선수로 출전하였다. 
 

경사씨는 대학 입학과 동시에 오리엔티어링 동아리에 들어가게 되었다. 오리엔티어링은 한국 경기 인구 5백명, 일본 2천명 정도의 마이너 스포츠이지만 일본에서 대학 동아리 활동으로 일반적인 종목이기도 한다. 명확한 계기가 있어 시작한 건 아니었으나, 하다 보니 재미있고 소질도 있었다.

 

“간단히 말하면 숲 속을 뛰는 경기에요. 코스가 정해져 있고 체크 포인트를 통과하면서 기록을 겨루는 스포츠입니다. 어떻게 숲 속을 빨리 뛰느냐는 스피드와 동시에 우거진 숲에서 어떻게 방향을 잘 잡느냐 하는 방향 감각이 필요합니다. 체력과 두뇌가 동시에 필요한 스포츠에요.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숲 속을 달리고 앞으로 전진하면서 목적지에 도달한다는 성취감이 있어요. 그러나 긴장을 놓치면 바로 방향을 잃어버리거든요. 꼭 인생처럼요. 목적을 달성한다는 성취감이 큰 동기로 작용하는 듯해요.”

 

대학교 2학년이던 2001년 경사씨는 처음으로 헝가리에서 열린 주니어 세계선수권대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때 그의 외국인등록 국적란은 ‘한국’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아버지의 표기를 따른 것이다. 태어났을 때부터 국적이 한국이라 생각하고 살아왔으니 한국 대표선수가 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때까지 해외에 나가 본 적도 없었던 그는 여권도 없었다. 국적에 대한 개념이 처음으로 생기기 시작했다.

 

“여권을 만들어야 해서 요코하마 영사관에 신청을 하러 갔더니 우선 (대한민국) ‘국민’ 등록을 하라고 했어요. 그래서 부모님과 상의를 했더니 국민 등록은 하지 말라고 하시는 거에요. 왜냐하면 적어도 우리는 현재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고 있는 건 아니라고. 저도 동의해서 국민 등록을 안 했어요. 그 후 영사관에서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일단 첫 번째이니까, 인도적 차원에서 임시 여권을 내주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국민 등록을 하지 않고 임시 여권, 즉 ‘여행증명서’를 취득하고 헝가리로 갔어요.”

 

그런데 국민 등록을 하지 않고 어떻게 한국 국가대표선수가 될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그는 자신을 무엇으로 증명했는가.

 

“오리엔테일링 스포츠에 관해서는 세계대회 나갈 때 필요한 서류는 여권이에요. 제가 갖고 있던 임시 여권은 정식 명칭은 ‘여행증명서’(travel certificate)이지만 ID로서는 아무 문제 없었어요.”

 

여행증명서는 여권에 갈음하는 도항증명서로서, 대한민국 정부가 여권을 분실한 자나 무국적자들에게 부여하는 기술적 제도이다. 재일동포들 중 여권 없는 ‘조선적’자들은 이 여행증명서를 통해 일시적으로 한국으로 입국하는 경우가 많았다. 경사씨의 경우, 국민 등록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식 여권이 아닌 여행증명서가 발급된 것이다.

 

그 후에도 거의 매년 세계선수권대회에 출전하게 되었고 그 때마다 영사관과 다투면서 간신히 여행증명서를 발급받았다. 일단, 스포츠 대회라는 것이 좋게 작용했다고 스스로 판단한다. 대회 주최자 측에서 보내준 초대장과 서류도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2004년에는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국민 등록을 하지 않으면 더 이상 국제 경기에서 뛸 수가 없었다.

 

“저는 원래 외국인등록란이 ‘한국’이었잖아요. 그러니까 조선적 분들과는 달라요. 영사관 입장에서는 ‘한국적’인데 왜 국민 등록을 안 하겠다고 말썽을 부리냐는 식이죠. 일본 외국인등록에는 ‘한국’이라고 나와있는데 실지로 국민 등록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안됐을 거에요.”

 

북한에 한번도 가보지 못한 ‘북한선수’로 활약중 

 

▲  리경사씨가 소지한 한국의 ‘여행증명서’(좌)와 북한의 ‘려권’(우) 
 

2004년 영사관에서 들은 마지막 통보를 계기로 경사씨는 한국 대표선수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표선수로 전환할 것을 결심하게 된다. 그를 위해서는 북한 려권을 취득해야 했고, 또 이를 위해서는 일본 외국인등록의 국적을 ‘조선’으로 변경해야 했다.

 

“더 이상 국제경기에서 뛸 수가 없게 되니까 고민 끝에 일본 시청에서 국적 전환 신청을 하게 되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운이 좋았어요. ‘한국’에서 ‘조선’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일본법무성에서 내린 3가지 조건이 있었는데 저 같은 경우 다 해당되었어요.”

 

“1. 대한민국 정식 여권을 소지하지 않는 자 2. 한국의 국민 등록을 하지 않는 자 3. 본인과 아버지의 재류자격이 ‘협정영주’(1965년 한일협정체결로 한국적자들에게만 주어진 영주 자격)가 아닌 자인데, 여기에 다 해당되는 사람이 많지 않아요. 특히 한국적을 가진 사람 중 1965년 협정영주권을 신청하지 않았던 사람은 거의 없죠. 우리 가족의 경우, 할아버지가 1948년에 만들어진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라, 한반도의 사람이다 라는 신념이 컸다고 들었어요.”

 

결국 2005년 4월에 외국인등록 국적란을 ‘한국’에서 ‘조선’으로 변경하였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외국인등록을 ‘한국’에서 ‘조선’으로 변경하고자 하는 재일동포들의 움직임들이 각지에서 있었다. 경사씨는 그 내용을 자신의 석사 논문의 주제로 삼았다(제목: “재일조선인의 ‘국적’선택 요인의 비교 연구: 1970년 후쿠오카현 다가와시의 ‘국적 전환운동’의 사례를 중심으로”). 이렇게 실천과 논문 주제를 링크시키면서 자기 앞의 상황을 헤쳐나갔다.

 

그의 결정에 대해 부모님도 찬성하셨고 아버지와 동생도 경사씨를 따라 국적란을 ‘조선’으로 전환하였다. 대부분의 재일동포들이 ‘조선’에서 ‘한국’으로 전환하는 속에서, 경사씨와 그의 가족들은 거꾸로 국적이 아닌 한반도 지역을 나타내는 ‘조선’적을 회복한 것이다.

 

이렇게 북한 대표선수가 되기 위한 제도적 조건을 갖춰나갔다. 북한 대표선수로 등록하는데 총련 체육련맹이 중간에서 도와줬다. 

 

▲  2005년 외국인등록 국적란을 ‘한국’에서 ‘조선’으로 변경하고, 매년  ‘조선 대표’로 세계선수권대회에 참가하였다. 
 

“특별한 조건은 없었어요. 실력이 좋아야 한다는 것 외에 뭐가 있겠어요? 다행에도 저는 대학 시기부터 어느 정도 좋은 성적을 남겼기 때문에 바로 인정을 받았어요. 국제대회에 출전하는 절차로는 대회 주최자에게 신청 서류를 보내고 여권 번호를 썼고 실지로 현지에서도 북한 여권이 증명서 역할을 했어요.”

 

학업에 집중한 기간을 제외하고 2005년 이후 매년 ‘조선 대표’로 세계선수권대회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매해 외국에서 대회가 열리는 관계로 북한에는 한번도 가보지 못했다. 여권만을 소지하고 있는 국가대표 선수인 셈이다. 게다가 북한 선수들은 실질적으로 외국에 나가기가 어렵기 때문에 현재 그는 유일한 오리엔테일링 북한 국가대표선수로 활약하고 있다.

 

노르웨이서 교환유학으로, 한국에 통로를 잇다

 

경사씨의 경력 중에 또 특기할 만한 것은 그가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에서 유학 중이라는 것이다. 석사 졸업 후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마무리하고 그는 2011년 노르웨이로 떠났다.

 

“이유는 두 가지 있었어요. 오슬로 대학은 세계적으로 정치학 쪽이 강한 대학이었고, 또 노르웨이는 오리엔테일링이 활발한 나라였어요. 그 동안 일을 하면서 훈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나름대로 노력을 했지만 역시 만족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공부를 하고 싶었던 것도 있지만 역시 훈련을 꾸준히 하기 위해서 북유럽으로 유학을 갔어요. 노르웨이는 ‘조선’과 국교도 있고요. 한가지 더 덧붙이면 노르웨이만 아니라 핀란드나 스웨덴 같은 북유럽에 가고 싶었는데 노르웨이는 학비가 무료였죠. 그래서 결과적으로 오슬로 대학으로 가게 되었어요.”

 

노르웨이는 인구가 적고 자연 환경이 좋아 스포츠가 활발한 지역이었다. 그곳에서 오리엔티어링은 남녀노소 다 즐기는 스포츠라고 한다. 그의 연간 스케줄은 세계선수권대회 중심으로 짜여져 있다. 그 틈을 타서 서울대로 교환 유학을 온 것이었다. 

 

▲  리경사씨는 노르웨이 교환유학생 신분으로 한국에 와, 서울대 언어교육원에서 한국어를 배웠다. 
 

그런데, 북한 여권을 소지한 그가 어떻게 한국영사관에서 또다시 ‘여행증명서’를 발급받은 것인가?

 

“서울대에 유학하겠다고 노르웨이에 있는 한국영사관에서 서류를 제출했어요. 절차는 일본에서와 거의 비슷했고요. 여권 복사를 내라고 했는데 북한 여권을 내면 신청이 거부된다고 생각해서 노르웨이의 체류증명서 서류를 냈어요. 외국인등록증 같은 카드인데 국적란이 뒷면에 있었어요. 그래서 앞면만 제출했죠(웃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못 가겠다 생각해서요. 보통 일본에서라면 당연히 뒷면까지 제출하라고 하겠지만 노르웨이라서 좀 루즈했던 것 같아요.”

 

주노르웨이 한국영사관이 “루즈”해서 그랬는지, 이미 다 알고 허가를 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짐작이 되는 사건도 몇 번 있었다. 예컨대 2012년 오슬로 대학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 강연회가 열렸는데, 경사씨는 사전에 참가 신청을 했는데도 당일 입장이 금지되었다. 학교 측에 항의했더니 착오가 있었다며 총장까지 나와서 경사씨에게 직접 사과했다고 한다. 이번 교환 유학에 관해서도 이미 자신의 신상 정보를 국정원이나 영사관에서 다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 더 자연스러운 일인 듯싶다.

 

“서울대 교환유학을 위해서는 추천서가 두 가지 필요했어요. 하나는 오슬로 대학 박노자 선생님이 써주셨고 또 하나는 오슬로에 있는 한국학교 교장선생님이 써주셨어요. 그 교장선생님이 영사와 아는 사이라 잘 말해주겠다고 했어요. 그 선생님은 물론 제가 북한 여권 소지자라는 것을 알고 있고요. 짐작하기엔 아마 제가 조선학교를 다니지 않았고 북한에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재일동포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요. 아시겠지만 여행증명서 발급받을 때 신상 정보를 자세하게 쓰잖아요. 그걸 보고 다 판단한 것이니까요.”

 

‘한반도 대표선수라면 남이든 북이든 상관없어’

 

“스포츠 선수의 경우 대세(정대세 선수)의 경우도 그렇고 저도 그렇지만, 한국에서 생활하는데 지켜야 하는 것은 북한을 찬미하는 발언을 절대 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다시 말하면 그것만 잘 지킨다면 문제 없다고 생각합니다. 간첩이든, 빨갱이든,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딱지를 붙여도 저는 대응할 수 있어요. 아무리 국정원이라고 해도 군사정권하에 있는 건 아니니까요.”

 

그가 한국으로 오기를 원했던 것은 다름아닌 한국어 습득 때문이다. 한반도 남북에 걸친 자신의 경험을 학문적으로도, 실천적으로도 살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한국어 공부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 현재 한반도에서 가장 빠르다고 자부하는 그에게 ‘만약 마지막으로 한국 정부가 쉽게 여행증명서를 내준다면 다시 한국 대표로 돌아오고 싶은가?’ 라는 짓궂은 질문을 던졌다. 

 

▲ 한반도 대표로 뛰는 것이라면, 남이든 북이든 상관없다고 말하는 리경사씨. 
 

“솔직히 저에게는 한반도라면 남이든 북이든 상관없어요. 일본 대표는 절대로 있을 수 없지만 한반도 대표라면 괜찮아요. 다만 현재로서는 조선 대표로 뛰고 싶어요. 한국은 경제도 그렇고 인재 면에서도 조선보다는 여유가 있으니까요.”

 

리경사씨는 자신의 역할을 “기초를 닦는 일”이라고 말했다.

 

“33살이 되어보니 저의 역할과 미래에 대해 생각하기도 합니다. 스포츠선수 커리어로서는, 북한이든 재일동포든 젊은 선수들이 배출될 때까지는 계속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한가지 더 덧붙이자면 저는 지금 크로스컨트리 스키도 병행하고 있는데요, 어떻게든 평창올림픽에 나가고 싶어요. 그리고 저의 약간은 특이한 경험들이 많은 재일동포들에게 확산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뭐든지 새로운 가능성이 생기니까요.” ▣ 조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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