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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는 될 터이다 로동자가 될 터이다”
<북과 남을 가로지르다>⑤ 어린 시절의 꿈
10여년 전, 한국으로 와서 살고 있는 북한이주여성 효주 씨가 북한의 서민문화와 남한에서 겪은 경험을 전하는 <북과 남을 가로지르다> 칼럼이 연재됩니다.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일다 www.ildaro.com
딸이라는 이유로, 키울 수 없었던 희망
북한에서 태어나 30여년을 살면서 나는 과연 꿈이 있었던가? 생각해본다. 꿈이 있었다면 어떤 꿈이었지?
나도, 꿈이 있었다. 노래를 부르고 싶었고, 바이올린을 배워서 많은 사람들 앞에 나가 바이올린 독주도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여자라는 이유 때문에, 내가 하고 싶어했던 모든 일은 어머니의 고집스런 반대로 무산되었다.
오빠는 아들이니까 무조건 배워서 큰 사람이 되어야 한다며 공부를 시켰고, 집안 일과 동생 돌보는 일은 딸인 나에게 떠맡겼다. 숙제를 하고 난 다음에 일하겠다고 하면, 어머니는 ‘계집애가 무슨 공부냐’ 하면서 숙제도 하지 못하게 하였다. 인민학교 때부터 내 잔등에는 동생이 업혀져 있었고, 우물에서 물을 길어 큰 가마와 물독에 가득가득 채웠고, 저녁식사와 다음날 아침식사 준비를 해놓아야 했다. 동생들이 많다 보니 내 잔등은 항상 아이 오줌으로 축축히 젖어있었다.
학교에서는 달랐다. 음악선생님은 내가 음악에 소질이 있다며 음악부에서 노래도 할 수 있게 해주시고, 대해금도 가르쳐주시고, 바이올린도 배울 수 있는 기회도 주었다. 하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내가 원하는 일에 대해 매번 집에서 허락을 받지 못했다. 아마도 나는 인민학교 시절부터 꿈과 희망을 포기했던 것 같다.
유치원 다니던 시절 동네 반회의 하는 날 공연을 했던 기억이 난다. 유희를 하면서 아이들이 각자 이 다음에 어른이 되면 무엇이 되겠노라고 노래하는 대목이 나왔다. 선생님이 되겠다는 아이도 있고 음악가, 과학자, 군인 등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나는 멜빵바지를 셔츠 위에 입고 “나는 나는 될 터이다, 로동자가 될 터이다” 하였고, 아이들이 “옳다 옳다, 네가 네가 로동자가 될 터이다” 하고 맞장구 치며 재롱을 부리면서 노래를 불렀다. 결국 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로동자가 되었다.
북한에서는 아무리 재능이 있어도 출신 성분이 좋지 않으면 좋은 직장, 좋은 대학, 좋은 학벌을 가진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다. 그러한 사람과 결혼도 할 수 없다. 서민의 자식들은 내 앞에 주어진 대로, 나라에서 지정해주는 인생을 살아간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아이들은 어려서 그런 사정을 모르기에, 부모가 안 된다고 반대를 하면 서운하고 분해서 두고두고 원망을 하게 된다.
다기능 운전사가 되고 싶었던 아이
북한에서도 누구나 선망하는 직업은 있다. 어릴 적에 나는 여군이 되고 싶었고, 또 다기능 운전사가 되고 싶기도 했다. 왜냐하면 여군들이 군복입고 절도 있게 걷는 모습이 너무 예뻐 보였고, 꿈속에서도 여군이 되어있는 나의 모습을 자주 보았기 때문이다.
▲ 내가 기억하는 북한의 거리 모습 © 손그림- 효주
한편으로 운전사가 되고 싶었던 이유는, 우리 집안을 ‘운전사 가족’이라고 했을 정도로 운전하는 사람이 네 명이나 있었던 탓이다. 작은 아버지와 고모부 둘, 오빠 이렇게.
차를 별로 볼 수 없었던 북한의 지방에서 어쩌다 한번 동네에 차가 나타나면 난리가 났다. 동네사람들이 다 나와 구경하고, 아이들은 크고 작고를 가리지 않고 차 적재함에 올라타보기도 하고 차 주인의 친척 아이들을 부러워하였다. 그래서 그날만은 큰소리를 칠 수 있었고, 친구들을 차에 태울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는 특별한 날이었다. 학교에 등교할 때 동네 꼬마들을 차 적재함에 가득 태우고는 학교 운동장에 내려주면, 차를 타고 온 아이들까지도 다른 학생들 앞에서 우쭐대었다.
하지만 북한에서 운전사라는 직업은 그리 선망의 대상이 아니다. 차가 많은 한국처럼 교통사고가 그리 자주 일어나지는 않지만, 그래도 북한에서 운전사는 “한쪽 발은 안전부(경찰서)에 한쪽 발은 집에 걸쳐두고 일하는 직업”이라고들 말한다. 그만큼 위험이 따르는 직업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차량 운행이 많지 않기에 하루 작업량을 마치면 개인 용무로 농촌이나 공장에서 짐을 실어주는 조건으로 먹을 것을 받아오기도 해서,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는 직업이기도 했다.
북한의 경제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연료 사정도 당연히 나빠졌고, 그로 인해 모든 화물자동차들을 목탄차나 알탄차로 교체하게 되었다. 휘발유는 오르막을 오를 때만 차의 압력을 높여 오를 수 있도록 공급해주었다. 그나마도 부족하면 개별적으로 물물 교환을 해서 바꾸기도 했다.
화물차의 적재함에는 절반은 옥수수 속이나 알탄 참나무 조각들이 담겨있는 마대가 쌓여있고 실제 짐을 실을 수 있는 공간은 절반밖에 안 되었다. 목탄차로 개조하면서 운전사외 조수가 추가로 배치되었는데, 차가 출발하기 전 먼저 난로에 불을 살려야 하고 풍구질을 해서 압을 올려야만 출발할 수 있었다.
길을 가다 보면 중간중간 차들이 멈춰 서서 조수들과 운전사들이 번갈아 가며 한 명은 적재함에 올라가 난로에 알탄이나 옥수수 속을 넣고, 조수는 열심히 풍구질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중간중간 원료를 넣기도 해야 하지만 재도 제 때에 빼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운전사들만의 규칙이 있는지, 약간의 오르막을 달릴 때는 알탄이나 참나무 조각을 때고 평지를 달릴 때는 옥수수 속을 때며 달렸다. 그 모습들이 가관이 아니다. 석탄을 캐러 굴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 모양이다. 얼굴이 새카매서 눈과 이빨만 반짝거리고 하얗다. 그로 인해 석탄가스에 중독이 되는 경우도 있는데, 우리 오빠는 그러한 사건으로 질식해서 쓰러진 적도 있고 폐가 안 좋아져 결국 운전대를 놓고 말았다.
북한에서 사람들이 가장 선망하는 직업은?
북한에서는 운전면허를 한국처럼 만 19세 이상이 되면 딸 수 있고, 곳곳에 운전면허시험장이 있어 운전을 배울 수 있다. 그러나 운전면허를 따려면 전문학교처럼 6개월간 공부하고 이론뿐만 아니라 실습으로 차를 직접 분해해서 조립하고 수리도 할 수 있어야 시험에 합격할 수 있다.
또 한국처럼 바로 운전대를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직장에 배치를 받아도 기존의 운전기사를 도와 1년동안 조수 역할을 하면서 수리와 동행 운전을 반복하며 혼자 운전할 수 있을 때까지 단독으로 운전대를 잡을 수 없다.
운전사의 월급은 자기 지방에서만 왔다 갔다 하면 얼마 되지 않고 장거리 운행을 해야만 출장비가 포함된 월급으로 조금 더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운전사라는 직업은 위험이 따르는 노동이기에 선망의 대상은 되지 못할 수밖에 없다.
북한사람들이 가장 선망하는 직업은 군관(군인장교), 초기 복무생(기술직 직업군인), 안전원(경찰), 보위부, 그리고 외화벌이 직장에서 일하는 사람들, 식당에서 일하는 요리사, 그리고 최근에는 배급소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미용사 정도가 꼽힌다.
예전에는 식당에서 일하는 여성들과 배급소에서 쌀을 달아주는 사람들에 대해 ‘식모’라고 하며 좋은 직업으로 여기지 않았지만, 식량 공급이 제대로 안 되는 현실에서는 가장 부러운 직업이 되었다. 그래서 ‘빽’(뒷줄 인맥)으로라도 공장, 기업소 식당이나 배급소에 들어가려고 없는 살림에 뇌물 작전을 펴는 이들도 있었다.
아직도 직업에 귀천이 있는 대한민국
북한에서는 여자가 해야 할 일과 남자가 해야 할 일 구분 없이 직종을 가리지 않고 취직을 시킨다. 여자들이 기계면 기계, 운전이면 운전, 삽질, 곡괭이질 등 가리지 않고 다한다. 공사장이나 돌격대 같은 데서 남녀가 목고와 들 것을 짝을 지어 같이 메고 달리는 모습도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월급을 남녀가 동등하게 받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다. 똑같이 일해도 남자의 월급이 더 많다.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더 많은 일을 하고, 더 힘든 일을 해도, 남자들의 월급만큼 탈 수가 없다. 이유는 모른다. 단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아무리 일을 많이 해 봤자 남자의 절반도 받을 수 없다는 것뿐, 이유를 들어본 적은 없다.
한국에서는 요즘 취직난 때문에 괴로워하는 이들이 많다. 그런데 한국에 일자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내가 보기엔, 일자리를 찾는다면 얼마든지 많다고 본다. 일자리가 없다는 것은, 취직할 곳이 없다는 게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일자리가 없다는 얘기이다. 월급을 따지다 보니 큰 기업에만 들어가려고 하고, 웬만한 일자리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가 보다.
한국에는 직업에 귀천이 있다고 본다. 선망하는 직업이 있고 상대적으로 그렇지 않은 직업이 있다 하더라도, 북한에서는 직업의 귀천이 따로 있지 않다. ‘직업에 귀천이 있다’는 말은 옛날 봉건 시대 때 양반들이 만들어낸 말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일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일을 가리지 않는다. 사회 경험을 쌓으려면 이 일 저 일 가리지 않고 해봐야 어떤 회사에 취직을 할 지라도 경험을 바탕으로 인내심도 키우고, 상호 간의 친화력도 쌓을 수 있고, 어떤 직업을 갖든지 간에 열심히 자신의 일을 해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여행을 꿈꾸어보지 못했다
남한 사람들은 직장 다니다 은퇴하면 연금을 받으면서 외국 여행을 하며 사는 노후를 꿈꾼다고 들었다. 북한에서는 외국에 간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기 때문에, 들어보지도 못한 세계일주며 배낭여행이며 일반인들이 외국에 가는 것을 어디 나들이 가는 것 마냥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한다는 것이 놀라웠다.
북한에서는 북한 내에서도 마음대로 이동할 수 없다. 도와 도 사이를 넘어가려고 해도 여행증명서가 있어야 하고, 평양은 파란 줄, 개성은 빨간 줄 두 줄이 그어진 통행증명서가 있어야 들어갈 수 있도록 되어있다. 성분이 좋은 집 자녀가 유학을 간다든지 외화회사 간부들이 외국에 다녀올 지는 모르지만, 아마 북한주민의 1% 정도가 그런 호화스러운 삶을 살 거라고 생각한다.
살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정해 살 수도 없다. 이사를 하려면, 살고자 하는 곳의 동사무소와 분주소(파출소), 안전부(경찰서)에 가서 다니고자 하는 직장이나 거주승인 확인서를 받아야 하고, 그것을 들고 지금 살고 있는 동사무소와 속해있는 조직의 승인을 받고 퇴거증명서를 떼야 갈 수 있다. 외아들이라서 부모를 모셔야 한다면, 그에 맞는 확인서까지 추가해도 당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몇 년이 걸릴지 모르기 때문에, 웬만한 인내를 심고 피나는 노력이 없이는 얻어질 수 없는 모험이다.
한국사람들은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휴가를 내서 여행을 가기도 한다. 북한도 휴가가 없는 것은 아니다. 14일간의 휴가가 있는데, 무단결근을 3일 이상하면 휴가는 무효다. 만약 휴가가 없거나 다 썼을 경우에는 ‘대휴’라는 것을 받을 수도 있는데 기간은 3일 정도다.
이동을 하려면 여행증명서가 있어야 하는데, 목적지에 가서도 3일 안에 누구 집에 어디서 누가 왔고 여행증명서 기간이 며칠까지인지 적는 란에 분주소(파출소) 도장을 찍어야 한다. 기간 안에 못 나가게 되면 기일을 연장할 수 있는데 오래 있으면 안 된다. 아프거나 환자를 돌보거나 해야 할 때는 조금 예외지만, 결국은 기일 안에 모든 여행이 끝나야 한다.
북한의 명승지인 금강산, 묘향산, 백두산, 칠보산과 해수욕장 같은 데도 평생 한 번 구경해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다수이다. 그런 곳에 가는 사람들은 정해져 있다고 생각했고, 혹시나 간다고 하면 당원이나 혁명과업 수행(로동 행정 시간을 잘 지키고 결근 없이 출근해 일을 열심히 잘 한 사람)이나 조직생활에서 모범적인 사람들을 군이나 시에서 1백명씩 뽑아가는 것 정도이다.
나이 들어 연금을 받는 것에 대해서는, 친정아버지가 만 60세에 정년퇴직을 했는데 연금은 얼마였는지는 모르겠다. 많지는 않고 당시 120원 정도 탔던 것 같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한국에 와서 가장 좋다고 느낀 것이, 원하는 곳을 갈 수 있고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울 수 있다는 점이었다. 나는 지금도 한국의 십대들이 부럽다. 북한사람들의 삶에 비하면 한국사람들의 삶은 참으로 자유스럽고 개방적인데, 그들 나름대로의 욕구 불만은 어느 사회든 누구든지 다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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