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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나목(裸木)이 살아 있다

<모퉁이에서 책읽기> 박완서의 데뷔작 “나목”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고 읽고 쓰는 사람, 안미선이 삶에 영감을 준 책에 관해 풀어내는 “모퉁이에서 책읽기”. 이 칼럼은 한국여성민우회 블로그 ‘민우트러블’에도 공동 게재됩니다. www.ildaro.com 

 

<나목>을 읽는 시간

 

▲ 박수근 作 “나무와 여인”(1956년).  박완서 작가의 데뷔작 <나목>(1970)은 박수근 화백을 모델로 삼았다. 
 

스무 살 때 처음 읽은 소설이 <나목>이었다. 당시 작가정신 출판사에서 나온 <나목>의 분홍 표지에는 박수근 화백의 “나무와 여인” 그림이 있었다. <나목>은 1950년대 전쟁을 겪고 있는 황량한 서울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도 내겐 다채로운 색깔로 채색된 진기한 이야기로 느껴졌다. 겪어보지 못한 시대의 이야기를 카랑카랑하게 들려주는 작가의 목소리는 또래의 말마디인 양 살가웠다. 그 후 민음사 판본으로 다시 그 책을 읽었을 때 나이든 화가와 젊은 청년 사이에서 갈등을 하는 여주인공의 사랑이 눈에 더 들어왔다.

 

이즈음 <나목>을 다시 읽었다. 박완서 작가의 문체가 떠오를 때가 있다. 이해할 수 없는 그 신랄함과 집요함에 싫증이 나서 덮어두었다가 가끔 단칼에 도마질하듯 선명하고 활달한 목소리가 그리워질 때가 있다. 작가가 죽었을 때, 일면식도 없건만 그 문장을 더 볼 수 없다는 것, 시간에 따라 변주되는 글을 만날 수 없다는 아쉬움을 크게 느꼈더랬다.

 

<나목>을 꺼내어 읽는다. 이전에 눈길을 준 문장보다 새로운 문장에 눈길이 간다. 행간에 숨겨진 사념과 머뭇거림, 울음까지 더듬어본다. 전후에 집을, 오빠를, 학업을, 꿈을, 친밀한 관계를 잃고, 오로지 생존을 위해 미군의 비위를 맞춰 PX(미군부대)에서 치욕에 떨며 일하는 것 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던 시절의 이야기다.

 

국가란 것도 없고, 돈을 따라 미군에게 몸을 파는 길이 어쩌면 유일한 대안처럼 바짝 다가오는 시간, 흔들리는 군상 사이에서 스물두어 살의 경아가 어떻게 그 시간을 버티며 살아가는지가 줄거리의 전부다. 난 그렇게 느꼈다. 작가가 꾸며놓은 허구의 헐거운 살을 낱낱이 헤치고 작가가 이 글을 쓰지 않고는 못 배겼던 것, 동기, 가슴의 원념이 무엇일까 추적하며 책을 읽었다. 작가는 자전적 작품에서 이런 글을 쓰기도 했다.

 

[그래, 우리 집안은 빨갱이다. 우리 둘째 작은아버지도 빨갱이로 몰려 사형까지 당했다. 국민들을 인민군 치하에다 팽개쳐 두고 즈네들만 도망갔다 와 가지고 인민군 밥해 준 것도 죄라고 사형시키는 이딴 나라에서 나도 살고 싶지 않아. 죽여라, 죽여. 작은아버지는 인민군에게 소주를 과 먹였으니 죽어 싸지. 재강 얻어먹고 취해서 죽은 딸년의 술냄새가 땅 속에서 아직 가시지도 않았을라. 우리는 이렇게 지지리도 못난 족속이다. 이래 죽이고 저래 죽이고 여기서 빼가고 저기서 빼가고. 양쪽에서 쓸 만한 인재는 체질하고 키질해서 죽이지 않으면 데려가고 지금 서울에 쭉정이밖에 더 남았냐? 그래도 뭐가 부족해 또 체질이냐? 그까짓 쭉정이들 한꺼번에 불싸질러 버리고 말지. 대강 이런 소리를 입에 거품을 물고 퍼부어 댔다. 사설은 무한히 복받치는데 시간과 목청은 모자라 눈앞이 아뜩하면서 현기증이 왔다. 살고 싶지 않다는 말은 조금도 거짓이 아니었고, 내가 한 말 중 가장 가슴을 저미는 듯 하여 눈물이 핑 돌았다.]

                              -박완서 <그 산이 정말 거기에 있었을까>(웅진지식하우스)에서

 

맨몸뚱이의 나목(裸木) 한 그루는 어떻게 땅에서 뿌리를 거둬들이지 않고 기필코 움을 틔우려 작정하는가. 분명한 윤리의식으로 밝음을 지향하는 박완서 작가의 글이 그리울 땐 내 속의 무언가가 기갈에 시달릴 때다. ‘착한 사람은 행복해지고 나쁜 사람은 벌 받는다’는 옛날 이야기꾼의 명징함이 그리워질 때 나는 박완서 작가의 책을 다시 꺼내 읽는다. 또박또박 지적하며 장단 맞춰 질타하는 그 긴 사설에 입을 벌린 채 공연을 듣는 심정이 된다. 심청가나 민담, 할매의 옛날이야기를 듣듯이 말이다.

 

그이의 작품은 구술전통을 잇는 작품이 아닐까. 그렇게 줄줄이 사설을 늘어놓으며 사람들의 욕망을 까뒤집고 꼬집고 풍자하고, 권면까지 빠뜨리지 않는 그의 소설이, 이야기라는 것을 끼고 산 전시대 할머니들의 산물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때로 벗어나고 싶고 때로 그 치마폭에 주저앉아 무조건 끄덕이며 듣고 싶은 것이 박완서 작가의 글이다.

 

다음 세대 여성들에게 물려줄 ‘표현의 씨앗’ 

 

▲  박완서 작가의 <나목>(세계사) 
 

<나목>은 한 여성의 홀로서기에 대한 성장담이다. 경아는 관계를 갈망하고 외로움에 치를 떨면서, 강력하게 이끌리는 부모와 심리적으로 이별한다. 그리고 자신의 공포를 직면하고 두 다리로 어두운 땅 위에 서게 된다.

 

이 작품에서 화가 옥희도 씨는 아버지의 그리운 품으로 마냥 묘사되지만 어머니에 대한 묘사는 좋은 엄마인 화가의 처와, 나쁜 엄마인 다이아나와 연관되어 숭배와 악담을 오가는 것이 눈길을 끌었다. 경아는 성당 앞에서 마리아를 읊조리다가 미군에게 몸을 파는 다이아나는 ‘좋은 엄마’일 수 없다고 욕을 퍼부어대기도 한다. 어머니에 대한 묘사는 애증에 차 있고, 기존의 성녀와 악녀의 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 같다. 어머니에게서 빼앗아 자신에게 ‘몰두’시키고 싶은 심리적 아버지와, 순결하기도 하며 악하기도 한 심리적 어머니에게서 벗어나 독립하는 것은 이 책의 서사를 끌어가는 또 하나의 주요한 축이다.

 

스무 살에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주인공의 사랑 이야기에 눈길이 팔렸지,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을 선택하기까지 그녀가 얼마나 두려워하고 용기를 내어야 했는지는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분분히 내리는 눈은 어쩌다가 유리에 와 부딪치곤 했지만 유리에 댄 내 볼에는 와 닿지 않았다. 얇으나마 유리창이 사이에 있으니 그것은 당연한 일인데도 나는 한동안을 유리에 볼을 댄 채 눈송이가 볼에 와 닿기를, 그리고 눈이 올 때의 그 함박꽃 같은 기쁨이 다시 내게 오기를 초조하게 바랐다.

 

‘미스 리, 손님 왔어요.’

 

진씨가 나를 불렀다. 나는 다시 테이블로 가서 사진을 받고 눈빛, 모발의 빛, 의상의 빛, 그런 것들을 묻고 찾으러 올 날짜를 기입하며, 이런 일이 재미없어 미치겠으니 날 좀 살려 달라는 절규를 어금니 사이에서 가까스로 짓눌렀다.] <나목> 79p

 

[그러나 나는 미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나는 내 속에 감추어진 삶의 기쁨에의 끈질긴 집념을 알고 있다. 그것은 아직도 지치지 않고 깊이 도사려 있으면서 내가 죽지 못해 사는 시늉을 해야 하는 형벌 속에 있다는 것에 아랑곳없이 가끔 나와는 별개의 개체처럼 행동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사랑을 시작하게 된 것일 게다.] <나목> 139p

 

[다시 한 번 나 때문이었을까? 나는 내가 던진 질문의 화살에서 여유 있게 비켜났다. 나 때문이기도 했지만 전쟁 때문이기도 했고 어쩌면 그럴 팔자일지도 모른다. 나는 내 허물을 딴 핑계들과 더불어 나누어 갖기를, 나아가서는 내가 지은 허물만큼 그 동안 나도 충분히 괴로워했다고 믿고 싶었다. 우상 앞에서 한껏 우매하고 위축됐던 나는 진상 앞에서 좀 더 여유 있고 교활했다. 나는 오빠들의 죽음에 나 말고 좀 더 딴 핑계를 대기로 했다. 그리고 나에겐 좀 더 관대하기로. 관대하다는 것은 얼마나 큰 미덕일까. 나는 진상을 지닌 고가(古家)를 비로소 연민과 애정으로 바라봤다. 오랜만에 고가를 고가로서만 바라봤다. 고가로부터 놓여나 자유로워진 나는 밝은 아침 햇살에서 섣불리 봄을 느끼기까지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대문을 두드리지는 않았다. 나는 돌아섰다.] <나목> 244-245p

 

작가의 말마따나 ‘아주 핏빛의 기억을 잊으려고 할 때’ 어떤 일을 겪게 되는지 이 작품은 정직하게 그려낸다. 언어로 그려낼 수 있는 만큼의 정직함으로. 화가 옥희도 씨나 화가의 부인이 추상적으로 그려졌다거나, 사랑의 대화가 당시의 틀에 맞춰 피상적으로 재현되었다든지 하는 것은 작품을 관통하는 핏빛 어린 고뇌에 비하면 무게가 덜하다. 핏빛에서 벗어나는 생기 있는 독백이, 이 책의 주인공이다.

 

눈보라 속을 걸어 나온, 그 따뜻한 목소리

 

<나목>을 거듭 읽는다. 살고 싶어 하고, 맛난 것을 먹고 싶어 하고, 맘껏 사랑하고 싶어 하는 솔직한 목소리가 듣고 싶기 때문이다. 당시로서는 쉽사리 언급할 수 없었을 여성의 욕망을, 자신의 목소리를, 목소리가 아니면 몸짓으로라도 자신을 표현하고 싶다는 갈망을, 다음 세대 여성들에게 물려줄 표현의 씨앗을 이 작품이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이, 어설픈 시구가 아니라 ‘춥다’와 ‘외롭다’는 단어만이 자신의 것이라는 걸 직시할 줄 알고, 추워서 마냥 타인을 안고 싶고 젊은 남자의 체취에 가슴 설렌다고 말할 줄 알고, 허겁지겁 팝콘과 콜라를 주워 삼키기보다 미국의 두려운 부를 신랄하게 꼬집고 싶어 하며, 신기루 같은 화려함보다 자신의 추위 속에서 폐허를 인정하고 시작하는 것이 소중하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살고 싶다’와 ‘죽고 싶다’의 똑같은 절실한 바람 앞에서 살고 싶다를 선택하고 마는 도저한 생명력,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연한 밝음 속에 입성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이 드리우는 ‘그것들의 빛, 그것들의 속삭임, 그것들의 아우성을 가끔가끔 필요로 할 줄(281p) 아는’ 정직함, 그런 힘들이 꿈틀거리고 있어서 아직도 <나목>이 살아 있다. 육십여년 전의 이야기를 이토록 가깝게 느끼게 하고, 눈보라 속을 걸어 나온 목소리를 이렇게 따뜻하게 느끼게 한다.

 

‘이딴 나라에서 나도 살고 싶지 않아, 우린 불싸지르고 말 쭉정이다’ 라고 절망적으로 외친 자리에서 묵묵히 뿌리를 내리고 겨울을 견뎌 잎을 틔운 사람들도 있었던 것이다. 국가의 이름이 없는 자리에서 살아내고 어깨 겯은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 그들의 안쓰러운 증언이자 온몸을 바친 격려인 이야기를 다 알 수가 없다.

 

살아온 세월은 사라지고 이야기만 남아 있다 해도, 우리에게 남아 있는 이야기의 조각들은 얼마나 소중한가. 그래서 갈 길을 잃어 헤매는 자리에서 나는 염치없이, 헐벗어 더욱 따뜻한 오래된 <나목>에 엎드려 이렇게 쉰다. ▣ 안미선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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