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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르타뉴에서 보낸 편지] ‘다른 세상’으로의 초대  

 

 

‘하늘을 나는 교실’의 필자 정인진 님이 프랑스의 서북부 브르타뉴 지방에서 머물면서 보고 느낀 것들을 기록한 ‘브르타뉴에서 보낸 편지’가 연재됩니다. www.ildaro.com  

 

브르타뉴 농촌마을을 여행하다 보면, 방풍림으로 둘러싸인 목초지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곡식과 채소가 자라는 밭이나 소와 양들을 방목하는 풀밭 둘레에는 어김없이 키 큰 나무들로 울타리가 쳐져 있다. 그래서 프랑스의 다른 지역과 달리 나무들이 어우러져 있는 브르타뉴의 목초지들은, 멀리서 보면 거대한 숲처럼 보인다.

 

나무 울타리 사이로는 작은 오솔길들이 이어진다. 키 큰 나무들로 두텁게 그늘이 드리워진 오솔길들은 오늘날에는 걷기 좋은 둘레길로 계발되어, 많은 사람들이 브르타뉴를 느끼기 위해 그 길 위를 걷는다. 나도 이런 나무 울타리들이 총총 이어져 있는 농촌의 둘레길을 참 많이 걸었다. 비가 온 뒤에는 고인 빗물로 흙탕길을 걸어야 했지만, 짙게 드리운 그늘 덕을 더 많이 보았다.

 

브로셀리앙드의 심장 ‘뺑뽕’을 찾아서

 

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인 목초지들을 따라 좀더 깊숙히 브르타뉴 내륙으로 들어가면 ‘브로셀리앙드’(Broceliande) 숲이 있다. 브로셀리앙드는 브르타뉴에서 가장 중앙에 위치한 숲으로, 일에빌렌느와 모르비앙 지역에 걸쳐 있다. 브로셀리앙드 숲을 빼놓고 브르타뉴를 얘기할 수 없을 만큼, 이 숲은 브르타뉴 문화의 기원을 전하는 많은 전설과 설화로 가득찬 곳이다.

 

나는 이 숲에 꼭 가보고 싶었다. 나무 몸통 가득 두껍게 이끼가 자라는 독특한 숲도 보고 싶었고, 전설이 깃든 계곡과 연못들도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진흙탕으로 걷기 힘들다는 겨울이 지나기가 무섭게 브로셀리앙드 숲으로 달려간 것은, 지난 해 봄 꼭 이맘때였다. 

 

▲  ‘뺑뽕’읍 입구에 있는 호수, 건너편 건축물은 시청으로 쓰이고 있는 옛수도원 건물이다.  ©정인진 
  

렌에서 대중교통으로 브로셀리앙드 숲을 가기 위해서는 ‘뺑뽕’(pimpont)이라는 읍을 거쳐야 한다. 숲 가장 깊숙히 위치해 있는 뺑뽕은 ‘브로셀리앙드의 심장’이라고 불린다. 하늘이 보이지 않도록 키큰 나무들로 가득 찬 숲 사이 도로를 시외버스로 한참 달려 도착한 뺑뽕은 기온마저 다른 곳보다 서늘한 듯했다.

 

마을 어귀에 넓게 호수를 끼고 있는 뺑뽕은 관광객들로 활기 넘치는 모습이었다. 현재는 시청으로 쓰이고 있는 13세기에 세워진 옛수도원의 성당 안에는 귀한 문화재들이 많아, 꼭 숲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도 뺑뽕을 방문하는 이들이 많다. 다른 관광지와 다르게 뺑뽕의 기념품 가게들은 숲속 개구장이 요정들의 기괴하고 신비한 모습을 담은 장식품과 전설 속 인물들을 형상화한 상품으로 가득차 있다. 그렇지만 나는 건성으로 동네를 후루룩 둘러보고는 숲 가장자리 산책로로 발길을 돌렸다.

 

4월이라지만 몇일 전 내린 비로 산책로는 흙탕길이었다. 요리조리 덜 질퍽이는 데를 디뎌가며 숲가를 걸었다. 그나마 산책로는 걷기가 좋은 편이었다. 길 너머 숲속은 곳곳에 물 웅덩이들이 만들어져 있었고, 책에서 본 대로 나무들은 엄청나게 두터운 초록 이끼로 뒤덥혀 있었다. 그 모습은 신비스럽기도 했지만, 더 많이는 음산하고 으스스한 느낌이었다. 지금까지 한번도 본 적 없는 이끼로 뒤덮힌 삼림은 낯설었고, 이런 낯섦은 두려움으로 온몸을 휘감아오기 시작했다.

 

낯섦이 두려움으로 밀려왔던 건 이곳이 두 번째였다. 첫번째는 재작년 여름 ‘아르모르 플라주’라는 곳에서 저녁 산책을 할 때 보았던 호수 가장자리, 이끼로 덮힌 나무들로 빽빽했던 숲을 거닐 때였다. 이후, 다시 브르셀리앙드 숲에서 그런 느낌을 받은 것이다. 두 곳 다 이끼가 가득 끼어 있는 숲이라는 공통점이 있는데, 왜 이런 숲은 내게 공포를 주는 걸까?

 

그러나 한시라고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에, 그 이유를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걸음을 재촉하기에 바빴다. 사실, 그곳은 숲길이라지만 근처에 농가들이 여러 채 있고, 길을 안내하는 표지들이 촘촘하게 붙어 있는 안전한 산책로였다. 서둘러 숲을 빠져나와 야트막한 담장의 농가들이 면해 있는 도로에 들어서자, 금방 편안한 마음으로 되돌아왔다. 내게 브르타뉴 숲들은 항상 무섭다.

 

‘비비안의 집’, ‘요정들의 거울’…전설 속 여성들 

 

▲  브로셀리앙드 숲의 나무들은 이렇게 두터운 이끼로 덮혀 있다.    © 정인진 
 

그래서 브로셀리앙드 깊숙이 위치해 있는 전설이 깃든 유명한 장소들은 안내인이 인솔하는 단체관광 프로그램에 끼어서 가기로 했다. 그러다가 지난 여름에는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 진정으로 브로셀리앙드 숲속 깊은 곳으로 들어가 보았다. 내 판단은 역시 옳았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걷는 숲길은 무섭지 않았고, 무엇보다 여름 숲은 시원해서 걷기 좋았다. 또 대중교통이 전혀 없는 숲을 횡단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관광버스를 타고 다니면서야 알았다.

 

숲 깊숙이 들어서자, 브르통어로 ‘다른 세상’이란 뜻이 담겨 있는 ‘브로셀리앙드’란 말이 실감이 났다. 깊은 숲속에 세워져 있는, 흰 옷을 입은 여자 귀신이 나타난다는 ‘트레세쏭 성’(Chateau de Trecesson)이나 숲 한복판에 넓게 드리운 호수들처럼, 한번도 경험한 적 없는 풍경들은 내가 진정으로 ‘다른 세상’에 와 있다는 걸 실감하게 했다.

 

브로셀리앙드 숲에 존재하는 바위, 샘, 계곡, 나무들은 신비로운 전설과 신화들로 가득 차 있다. 프랑스의 다른 관광지와 달리, 꼭 봐야 할 것이 참나무이고 샘물이고 계곡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하나같이 전설을 가지고 있다. 이것들 가운데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사랑과 배신과 복수의 내용이 담긴 전설들은 특히 유명하다.

 

사랑하는 여인, 요정 비비안(Viviane)에 의해 보이지 않는 감옥에 영원히 갇히게 되었다는 불멸의 존재인 ‘메를랭’(Merlin)의 전설은 바로 이 숲에 전해 오는 이야기이다. 그가 지금도 갇혀 있다는 ‘메를랭의 무덤’(Le Tombeau de Merlin)이라고 불리는 장소도, ‘비비안의 집’이라고 불리는 언덕도, 모두 브로셀리앙드 숲에 있다.

 

숲 서쪽에 위치한 계곡은 ‘모르간’ (Morgan)과 관련된 전설로 유명하다. 모르간은 아더왕의 이복 여동생으로, 브로셀리앙드 숲에서 살았다. ‘돌아올 수 없는 계곡’(Le Val sans Retour)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 계곡은 모르간의 저주로 신의가 없는 행동을 한 기사나 부인을 배신한 남성들이 이 안으로 들어서면 영원히 돌아나올 수 없게 된다고 한다.  

 

▲  브로셀리앙드의 편암은 매우 짙은 자주빛을 띠고 있다. 건물의 벽돌로 쓰인 자주빛 편암.  © 정인진 
 

‘돌아올 수 없는 계곡’ 바로 근처에는 ‘요정들의 거울’(Miroir aux fees)이라는 연못이 있다. 이 연못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기로 맹세한 일곱 요정이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그녀들은 밤마다 물표면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며 즐거워했다. 그러나 가장 어린 요정이 잘생긴 기사와 사랑에 빠지면서 그 약속을 깨뜨린다. 화가 난 언니들은 어린 요정을 잔인하게 죽이고, 그 피가 흩어져 숲 전체에 튄다. 이런 이유로 브로셀리앙드 지역의 흙이 독특한 자주빛을 띠게 되었다고 한다.

 

‘요정들의 거울’ 전설은 이 호수뿐 아니라 브르셀리앙드 지역의 자주빛 토양에 대한 전설까지 담고 있다. 이 지역이 ‘자주빛 고장’(pays pourpre)이라고 불릴 정도로 브로셀리앙드의 자주빛 토양은 유명하다. 그로 인해 이곳에서 생산되는 편암은 매우 짙은 자주빛을 띤다. 렌의 전통 가옥들처럼 뺑뽕의 집들도 붉은 편암으로 지어졌는데, 그 빛깔이 더 짙다.

 

오늘도 변화하고 있는 숲, 그리고 전설들

 

한편, ‘돌아올 수 없는 계곡’ 발치에는 1991년 ‘프랑소와 다뱅’(Francois Davin)이라는 작가가 만든 ‘황금나무’(L’Arbre d’Or)가 있다. 이 나무는 금박칠을 한 사슴뿔 모양의 밤나무 설치예술품이다. 주위로 5그루의 불탄 떡갈나무들이 세워져 있고, 둘레 바닥에는 넓게 아르두와즈 편암들이 박혀 있다.

 

‘황금나무’는 1990년에 있었던 브로셀리앙드 숲의 화재를 기억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인간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파괴된 숲과 숲의 부활의 의미를 담고 있다. 5그루의 불탄 떡갈나무는 ‘자연의 사라짐’을 뜻하고 금박의 나무는 불멸을 상징한다고 한다. 나무에 금박을 입히기 위해 황금 90g이 사용되었으며,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숲이 얼마나 화재에 취약한가를 보여주려고 애썼다. 사슴뿔 모양의 나무가지는 브로셀리앙드 숲의 주인인 불멸의 존재, 마법사 ‘메를랭’을 상징한다. 메를랭은 종종 다른 모습으로 변신을 했는데, 가장 자주 사슴으로 변신을 시도했다고 한다.

 

그 당시 일어난 대형 화재로 ‘돌아올 수 없는 계곡’의 능선 500핵타르(ha)가 파괴되었다. 숲을 복원하기 위해, 전문가들과 지역 관계자들이 중심이 되어 ‘돌아올 수 없는 계곡 지킴이 모임’이 만들어졌고, 프랑스 전역에서 기부금이 쇄도했다고 한다.

 

우리를 안내했던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이 ‘황금나무’에 대한 전설도 여럿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다. 현재 뺑뽕에서는 옛날부터 전해내려오는 전설에만 만족하지 않고, 매년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전설 경연대회’를 연다고 한다. 전해지는 이야기가 없는 장소에 새로운 전설이  덧붙여지고, 잔인하고 비참한 결말은 좀더 행복한 이야기로 변형되기도 한단다. 

 

▲   프랑소와 다뱅(Francois Davin)의 ‘황금나무’(L’Arbre d’Or), 1991년작   © 정인진 
 

어쩜 세월이 훨씬 더 흐른다면, 지금의 전설들은 다르게 변형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또 브로셀리앙드의 명소로 ‘황금나무’도 빠지지 않게 될 것이며, 이곳도 멋진 전설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런 만큼 브로셀리앙드의 전설들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을 사는 바로 이 숲속 사람들의 현재 이야기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니, 전설들이 매우 역동적으로 다가왔다.

 

여전히 깊고 넓어 보이는 브로셀리앙드 숲은 오랜 옛날에는 20만 헥타르에 달하는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 크기는 브르타뉴 전체의 1/10에 이르는 규모였다. 그러나 긴 역사를 관통하며, 숲의 나무들은 연료나 철길의 받침목, 종이의 원료로 베어지고, 땅도 농토로 개간되어 오늘날에는 겨우 7500헥타르만 남았다고 한다.

 

브로셀리앙드 숲뿐만 아니라, 브르타뉴의 다른 숲들도 꾸준히 그 면적이 줄고 있다. 부디 이 숲들이 잘 지켜지고 보존되길 바랄 뿐이다. ▣ 정인진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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