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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르타뉴에서 보낸 편지(35) 렌의 진보적 시민의식
‘하늘을 나는 교실’의 필자 정인진 님이 프랑스의 서북부 브르타뉴 지방에서 머물면서 보고 느낀 것들을 기록한 ‘브르타뉴에서 보낸 편지’가 연재됩니다. www.ildaro.com
브르타뉴 지역을 여행하면서 가장 많이 머문 곳은 옛날부터 브르타뉴 역사의 중심에 있었고, 오늘날도 여전히 이 지역의 수도로서 정치경제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렌이다.
렌에 짐을 풀고 근처 도시들을 방문하고 돌아와 좀 쉬었다가 다시 여행 떠다기를 반복하다 보니, 렌은 다른 도시와 달리 여행지라기보다 집 같은 느낌이 컸다. 그래서 길거나 가까운 여행지에서 돌아오는 길, 렌이 가까워지기만 해도 집에 다 온 듯한 편안한 기분에 젖어들곤 했다. 그런 동네 같은 느낌 때문에 오히려 렌이 얼마나 멋지고 살기 좋은 곳인지 잘 모르고 살았던 것 같다. 이 사실을 가슴 깊이 느끼게 된 것은 2년이 거의 다 되어 귀국을 얼마 앞둔 때였다.
하루는 마치 관광객이 된 심정으로 좀더 꼼꼼하게 렌 시내를 둘러봐야겠다고 마음먹고 집을 나섰다.
'렌 탐구생활' 중세의 집들 사이를 걷다
평소와 다름없이 빌렌느 강가를 따라 걸어서 시내로 나갔다. 옛날, 그 위용을 짐작할 수 있는 성곽의 파괴된 흔적들을 엿보며 로마네스크 풍의 렌 대성당 앞에 이르면, 고풍스런 중세의 목조건물인 꼴롱바주 집들로 이루어진 옛 시가지가 시작된다.
▲ 샹-쟈케 거리의 꼴롱바주 집들. 조금씩 기울어져 있고 틈을 메운 모습도 볼 수 있다. © 정인진
브르타뉴의 많은 도시를 여행하면서, 자주 내 눈을 휘둥그렇게 했던 건 꼴롱바주 집들이다. 브르타뉴에는 그 사이 칠을 다시 하고 받침목을 더해가며 여전히 옛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수백년 전에 지어진 집들이 많다.
렌도 예외는 아니라서 시내 곳곳에는 오래된 중세의 집들이 정말 많다. 3,4층 규모의 꼴롱바주 집들이 서로 어깨를 의지한 채 촘촘히 서 있는 골목길들은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골목 안으로 접어들면, 예쁜 주물철 간판을 매달고 알록달록 색칠된 대들보를 드러낸 꼴롱바주 집들이 줄지어 있다.
특히, 렌에는 중세 초기에 유행한 긴 나무기둥을 이용한 꼴롱바주들이 많이 남아 있다. 이 방법은 여러 가지 이유로 빠른 속도로 사라졌는데, 기둥들이 혼자서 집을 지탱하고 있기 때문에 맨 땅에 세워진 나무들은 특별한 처치가 없이는 쉽게 썪었다. 그런 이유 때문일까? 렌에서는 오랜 세월동안 나무들이 틀어지면서 건물이 기우뚱해져 있는 긴 기둥의 꼴롱바주 집들을 볼 수 있다. 기울어진 집과 집 사이를 아르두와즈 돌편으로 채우기도 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지탱하고 서 있는지 신기해 한참을 들여다보게 된다.
오늘날도 보존되고 있는 긴 기둥의 집들은 나무의 부패를 방지하는 특별한 처치가 되어있는 것들이라고 한다. 13세기에 들어서, 특히 도시에서 긴 목재를 구하기 힘들고, 또 긴 목재를 중세 도시의 좁고 꼬불꼬불한 골목길로 들여오기 어렵게 되면서, 이 방식은 점점 사라지고 짧은 나무들을 이용하는 기술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렌의 샹-쟈께(Champ-Jacquet) 거리와 리스(Lices) 광장 둘레에는 긴 나무 기둥의 꼴롱바주집들을 볼 수 있다. 그 외에 생-조르쥬(Saint-George), 샤피트르(Chapitre) 거리와 생딴느(Sainte-Anne) 광장 둘레에는 짧은 나무 기둥들로 만든 앙꼬르벨망식 꼴롱바주 건물이 많이 있다.
‘렌에는 화재 말고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 1720년 렌의 대화재의 규모를 표시한 지도, 중앙의 붉은 부분이 불에 전소된 지역이다. © Pierre Dechifre & Gilbert Lebrun, Rennes, editions Ouest-france; 2002
그러나 18세기에 일어난 대화재가 아니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많은 꼴롱바주 집들을 볼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안타까운 마음이 크다.
렌은 1720년 12월 23일에 시작된 불로 도시의 무려 40%에 달하는, 10헥타르(ha)가 파괴되었다. 이 불은 건물 1천여 채를 태우고 8천여명의 이재민을 낳았고, 6일만에 기적처럼 내린 비로 꺼졌다고 한다.
1720년 화재 이후에도 렌에는 크고 작은 화재들이 쉼없이 일어났는데, 이런 중에 시립극장(1856), 시청(1908), 무역센터(1911), 생-조르쥬 궁전(1920), 가장 최근인 1994년에는 브르타뉴 의회가 불타는 사건이 있었다. ‘렌에는 화재 말고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화재들은 렌의 큰 사건이었다.
1720년의 대화재는 렌의 시내를 많이 변화시켰다. 그로 인해, 렌은 현대적인 건물로 재정비되었다. 1730년 쟈끄 갸브리엘(Jaques V. Gabriel)에 의해 시청이 세워지고, 같은 시기 화강암으로 만든 로비와 흰 돌로 각 층을 쌓는 방식의 브르타뉴 의회 건물이 만들어지는데, 의회는 다른 건축들의 모델로 채택되어 비슷한 건물이 여러 채 세워졌다고 한다.
드레퓌스 사건의 두 번째 재판이 열린 도시
한편, 렌은 진보적 성향의 도시로 유명하다. 노동, 인권단체들의 다양한 행사와 활동이 1년 내내 활발하게 펼쳐진다. 이러한 분위기가 그냥 생겨난 건 아니다. 그 기원은 19세기 말 제3공화정 시대, 프랑스를 정치사회적으로 큰 혼란에 빠뜨렸던 드레퓌스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렌은 드레퓌스의 두 번째 재판이 열린 곳이다.
1894년 알자스 출신의 유대인 육군장교였던 알프레드 드레퓌스(Alfred Dreyfus)는 독일에 정보를 빼돌린 첩자로 모함을 받고 무기징역에 처해진다. 그러나 그 뒤, 무죄를 입증하는 증거들이 속속 드러나고 드레퓌스의 재심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특히 지식인들 사이에서 프랑스의 반유대주의와 비이성적 국가주의를 비판하면서, 드레퓌스의 구명운동이 활발하게 펼쳐졌다.
에밀 졸라, 조르쥬 클레망소, 쟝 조레스, 드레퓌스의 맏형인 마티유 드레퓌스 등이 앞장서 그를 구하고자 노력했다. 그 중에서도 프랑스의 대 문호 에밀 졸라는 1898년 <나는 고발한다>라는 글을 발표하며 공개적으로 재심을 요구했다. 졸라의 이 행동은 국가의 부정의함을 지식인들이 적극적으로 비판해야 한다는 전통을 심어준 출발점이 되었다.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의 진보와 보수 진영의 치열한 정치 투쟁을 촉발시켰다.
▲ 1899년 드레퓌스 사건 두번째 재판이 열린 에밀 졸라 고등학교 ©정인진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드레퓌스의 두번째 재판이 렌에서 열리게 된 것이다. 재판이 열린 곳은 현재 ‘쟝비에 대로’(avenue Janvier)에 위치한 ‘에밀 졸라 고등학교’(Le lycee Emile Zola)로, 당시에도 중등교육을 담당하고 있었다. 1899년 8월~9월 사이, 한 달 간 열린 이 재판을 취재하기 위해 미국, 러시아, 스웨덴, 터어키, 아르헨티나 등 세계 각지에서 2백명이 넘는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당시 렌 주민 대부분은 드레퓌스에게 적대적이거나 냉담한 입장이었고, 오직 한 무리의 주민들만이 광적인 반유대주의에 반대하며 시위를 벌였다. 대학생들이 중심이 된 이 선두에 빅토르 바슈(Victor Basch: 헝가리 출신 철학자, 인간권리연맹 대표이면서 공동 창설자)가 있었고, 이들의 활동은 ‘인간권리연맹’(la Ligue des droits de l’homme)의 렌 지부를 탄생시켰다.
높은 시민의식의 배경이 된 역사, 사람들
‘공화주의 vs. 국가주의’, ‘인도주의 vs. 반유대주의’가 격돌한 치열한 정치 투쟁에서 렌의 큰 흐름은 보다 공정하고 인도주의적인 편으로 향한다. 그 후 역사를 거치면서 렌은 다른 어떤 곳보다 진보적인 도시로 스스로를 정체화시켜 나갔다. 오늘날 렌은 사회당 지지 세력이 많고 노동자들의 힘이 강한 도시로 유명하다.
드레퓌스에게 1899년 재판에서 유죄 판결이 내려지지만, 같은 해 대통령의 특별사면으로 풀려나 1906년에는 비로소 무죄를 선고 받고 복권된다. 드레퓌스 사건은 여론과 언론, 국가의 반이성과 불공정성의 상징으로 평가되고 있다.
나는 렌을 떠날 때는 구시가지 작은 골목길에 총총 서있던 예쁜 꼴롱바주 집들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 것에 안타까움을 느꼈지만, 한국에 귀국한 뒤에는 우리가 맞닥뜨려야 했던 어처구니 없는 국내의 정치적 사건들 속에서 렌의 진보적인 도시 분위기가 부러워졌다.
멈추지 않고 열리는 진보적인 문화, 학술 행사와 시민들의 높은 정치의식! 그 뒤에 에밀 졸라나 빅토르 바슈 같은 조상들이 있었다는 걸 잘 모르고 있었다.
졸라는 <나는 고발한다>라는 글을 쓴 얼마 뒤 의문사를 당했고, 유대인인 바슈는 1944년 2차 세계대전 뷔시 정권 하에서 프랑스 민병대에 의해 아내와 함께 살해된다. 이처럼 합리적인 이성과 인권을 향한 목숨 건 사람들의 발걸음이 지금의 렌, 그리고 프랑스 사회를 만들었으리라.
우리도 바로 그런 조상이 되어줄 수 없을까? 후손들에게 자랑스럽게 기억될 그런 조상이, 바로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오늘날 수혜를 받고 있는 렌 시민들보다 우리가 더 운이 좋은 위치에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허풍스러운 바램을 해 본다. ▣ 정인진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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