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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 연합군에 파괴된 브르타뉴 도시들
[브르타뉴에서 보낸 편지] 무차별 폭격에 희생된 사람들
‘하늘을 나는 교실’의 필자 정인진 님이 프랑스의 서북부 브르타뉴 지방에서 머물면서 보고 느낀 것들을 기록한 ‘브르타뉴에서 보낸 편지’가 연재됩니다. [일다] www.ildaro.com
브뤼쯔 성당이 중세 고딕풍이 아닌 20C 건축인 이유
렌에서 시내버스로 갈 수 있는 브뤼쯔(Bruz)에 간 건 꼭 이 도시를 방문하고 싶어서는 아니었다. 브뤼쯔 옆, ‘보엘’이라는 작은 마을에 있는 물레방아와 넓게 흐르는 빌렌느강을 구경하고 싶어서 잠깐 거치게 된 곳이었다. 그럼에도 처음 방문하는 곳이니 그냥 지나쳐갈 수는 없었다. 버스에서 내려 관광안내소에 들러 도시의 구경거리가 표시된 지도와 역사가 소개된 자료를 받아왔다.
▲ 2차 세계대전 중 폭격으로 허물어진 브뤼쯔 성당의 현대식으로 재건된 모습. © 정인진
이곳에 오기 전부터 브뤼쯔 시내에 있는 성당은 ‘20세기 현대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특색 있는 건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터라, 나는 브뤼쯔 성당을 꼭 보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면서도 ‘브르타뉴 대부분의 마을에 있는 고딕풍의 중세성당이 아니라, 왜 20세기 성당이지?’ 하는 의문에는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내가 도착한 때는 성당 안에 들어갈 수 없었다. 정해진 시간에 방문이 허락되는 성당이라는 걸 도착해서야 알았다. 그저 성당 밖에서 건물을 둘러보는 것에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건물답게 성당은 건축가의 예술성이 돋보이는 인상적인 건물이었다.
그런데 자료에 기록되어 있는 이 도시의 역사를 읽다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인 1944년 이 도시에 연합군(영국, 프랑스, 중국, 소련, 미국 등이 독일, 일본, 이탈리아 등에 대항함)의 폭격이 있었고, 그 폭격으로 브뤼쯔의 많은 주민들이 죽고 많은 건물들이 파괴되었다는 것이다. 브뤼쯔 성당도 그때 폭파되어 새로 지은 것이었다.
나는 브르타뉴를 여행하면서 전쟁의 가해국이 아니라 피해국인 프랑스에, 연합군의 폭격이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던 차였다. 생말로가 연합군의 폭격으로 파괴되었다는 사실에도 많이 놀랐는데, 그런 곳이 한두 곳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브뤼쯔는 내륙 깊숙이 위치한 작은 마을에 지나지 않는데, 이곳까지 폭격을 당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자세히 알아보니, 브뤼쯔에서 3km 떨어진 곳에 독일군 탄약고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위치가 잘못 표시되어, 탄약고를 폭파하러 온 영국 항공기는 브뤼쯔 읍내에 폭탄을 떨어뜨리고 만다. 1944년 5월 7일 밤의 일이다. 이날 두 개의 폭탄이 20분 간격으로 떨어졌는데, 그 폭격으로 183명이 죽었다. 당시 주민의 38%에 해당하는 숫자다. 300명이 다쳤으며, 600명이 이재민이 되었다. 게다가 폭격으로 인한 화재로 2차 피해자들이 속출했다. 한 가문이 몰살된 경우도 있었다.
브뤼쯔에 있었던 이 폭격은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상륙 작전(미-영 연합군이 독일군이 주둔한 노르망디에 기습 상륙한 작전으로, 2차대전에서 연합군 승리의 발판을 마련함)에 앞선 조치로, 꼭 한 달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영국 공군에 의한 이 폭격은 루와르강과 센느강의 철교들과 렌, 낭트, 뚜르의 비행장, 브뤼쯔와 쌀브리(Salbris)의 탄약고, 그리고 생-발레리(Saint-Valery)의 레이더까지 파괴하는 임무 중 하나였다.
독일 잠수함 기지가 있던 브레스트(Brest)의 비극
브르타뉴에서 연합군의 폭격으로 비극을 맞는 곳이 브뤼쯔만은 아니다. 브뤼쯔보다 더 큰 규모로 엄청난 인명과 재산 피해를 겪은 곳이 여러 곳 있는데, 그 중 한 곳이 바로 브레스트(Brest)이다.
브레스트는 1940년 6월 19일 독일군이 점령한 이래, 독일 해군 잠수함 기지가 자리잡았다. 그런 탓에 2차 대전 동안 수많은 폭격과 공습을 당했다. 이 과정에서 965명이 사망하고 740명이 심하게 다쳤는데, 그 가운데 371명이 1944년 연합군의 폭격으로 사망한 사람들이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브레스트는 낭트 다음으로 브르타뉴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였다. 루이 16세때부터 선박 생산과 해군의 도시로 활기가 넘치는 곳이었다. 그러나 당시 폭격으로 도시의 거의 전부라 할 수 있는 95%가 파괴되고 만다. 1944년 8월 7일~9월 8일까지 45일간 진행된 폭격으로 브레스트에는 3만개의 폭탄이 투하되고 1만개의 포탄이 투척되었다고 한다. 1만6천 5백 채의 건물 중 2백채만 남았고, 브레스트 중심가에는 단 네 채만 남았다.
▲ 현재 브레스트 시내. 모두 현대적인 건물들 뿐이다. © 정인진
브레스트를 방문했을 때, 도시에 고풍스러운 옛 건물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에 놀랐었다. 폭격을 당한 도시인 생말로만 해도 거의 완벽하게 옛모습을 복원했는데, 미적인 데라고는 하나 없는 사각형의 시멘트 건물들로 가득 찬 도시는 관광객에게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브레스트는 ‘우리는 절대로 관광으로 돈을 벌지 않을 테야!’ 라고 굳게 선언한 도시 같은 인상이었다.
그때는 ‘왜 저렇게밖에 도시를 복원하지 못했을까?’ 안타까웠다. 그런데 엄청난 규모로 도시가 파괴된 탓에 주민들에게 한시라도 빨리 생활 터전을 마련해 주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설명을 듣고 나니, 브레스트의 상황이 바로 이해가 되었다.
다행히 브레스트 성은 폭격에 파괴되지 않고 건재하다. 그리고 다리 건너편에 보이는, 다리로 연결되기 전에는 외곽에 지나지 않았던 ‘뷔에이유 빌’(Vieille ville: 옛날 도시) 구역의 건물들을 통해서 폭격 전의 브레스트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한달 간 4천톤의 폭탄이 투하된 로리앙(Lorient)
2차대전 당시, 대서양을 면하고 있는 브르타뉴는 독일 해군의 주요 기지들이 자리잡게 된다. 브레스트가 이에 해당되는 도시였고, 역사적으로 항구가 매우 발달한 로리앙(Lorient) 역시 피해갈 수 없었다. 2차대전 때 독일군은 로리앙을 점령한 뒤, 그곳에 엄청난 규모의 잠수함 기지를 건설한다.
이 기지를 폭발시키기 위한 연합군의 폭격이 두 차례 진행되었는데, 첫 공격은 1942년 1월 14일에 벌어졌다. 3시간 가량의 공격에 로리앙의 4분의 1이 불탔다. 이어 1943년 1월 15일에 두 번째 공격이 있었다. 이 폭격은 더 무시무시하고 긴 기간 동안 벌어졌다. 그때 쏟아진 폭격과 포탄으로 집들은 화마에 휩싸였으며, 하늘은 불꽃과 폭발 소리로 뒤덮였다. 이따금씩 비행기는 따닥따닥 소리를 내는 기관총을 쏘아댔다. 1943년 1월부터 2월 중순까지 한 달간 계속된 폭격으로 4천톤의 폭탄이 로리앙에 투하되었으며, 도시의 85%가 파괴되었다고 한다.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 뒤, 8월 브르타뉴는 독일군으로부터 해방되었지만 로리앙 둘레에선 전투가 계속되었다. ‘로리앙 부대’(Poche de Lorient)라고 불렸던 유명한 독일 부대는 계속 저항하다가 이듬해 5월 10일에야 항복했다.
▲ 포격으로 파괴되기 전 로리앙의 비쏭(Bisson) 광장 풍경. ©출처: 잡지 <retagne; Ouest france>2011년 1월호.
브레스트와 마찬가지로 로리앙 지역도 폭격 후 볼품없는 현대 건물들로 재건되었다. 그런 까닭에 오늘날 관광지로 알려진 명소는 거의 없다. 그런데 로리앙에서 이런 상황을 ‘로리앙 켈트문화 페스티벌’(Festival interceltique de Lorient)을 개최함으로써 슬기롭게 극복한 것은 특이할 만하다. 로리앙은 1971년부터 이 축제를 열어오고 있는데, 유럽에서 페스티벌로 중요한 도시 중 하나로 떠오르게 되었다. 매년 여름 열리는 이 축제를 보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관광객들이 로리앙으로 몰려든다. (관련 기사-“축제를 통해 새롭게 계승되는 민속과 유대”)
그러나 불행하게도 로리앙은 독일의 잠수함 기지가 있었던 역사적 배경 때문에, 오늘날 프랑스 ‘원자력 추진 잠수함’(sous-marin a propusion nucleaire) 기지가 세워져 있다.
‘좋은 전쟁’이란 없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현재 브뤼쯔에서는 폭격 70주년을 맞는 기념행사가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올해는 이 참변을 잊지 말자는 취지로, 5월 8일~6월 6일까지 약 한 달간 진행된다고 한다. 이 행사에서는 생존자들의 증언과 당시 기록이 담겨 있는 다큐멘터리 상영, 각종 전시회들이 펼쳐지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중에 브르타뉴의 여러 도시들이 겪은 연합군의 무차별 폭격은, 무고한 시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잔인한 사건이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좋은 전쟁’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폭격이 지나간 브르타뉴의 도시들을 보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은 적군이나 아군, 누구에게나 비극이며 엄청난 고통을 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되겠다. ▣ 정인진 www.ildaro.com
* 브레스트 폭격에 관한 기록 영상(유튜브): http://bit.ly/1hqxBz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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