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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르타뉴에서 보낸 편지 28. 바다에 기대어 살아온 사람들
‘하늘을 나는 교실’의 필자 정인진 님이 프랑스의 서북부 브르타뉴 지방에서 머물면서 보고 느낀 것들을 기록한 ‘브르타뉴에서 보낸 편지’가 연재됩니다. www.ildaro.com
홍합 굴 조개...해산물이 풍족한 반도, 브르타뉴
▲ 새우, 생-자크 조개, 홍합 등의 해산물들과 함께 해초가 들어간 걀레뜨 요리. (Morlaix)
삼면이 바다로 둘러 싸인 반도에 위치해 있는 브르타뉴는 전통적으로 어업이 매우 발달되어 있었다. 옛날부터 브르타뉴 어민들은 인근 해에서는 배를 타고 고기를 잡았고, 조수간만의 차가 큰 덕분에 갯벌에서는 각종 해산물을 손쉽게 채취할 수 있었다.
그런 이유로 브르타뉴에서는 프랑스 다른 어느 곳보다 해산물 요리가 흔하다. 식당에서 ‘플라 뒤 주르’(plat du jour)라고 불리는 ‘오늘의 요리’ 메뉴에 생선 요리가 빠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게다가 브르타뉴의 특선 요리 가운데 넓게 부친 메밀전병에 여러 재료를 싸서 먹는 걀레뜨(또는 ‘블레 누와르’ ble noir)라는 요리가 있는데, 바닷가에선 속 재료로 해산물과 해초를 쓰기도 한다. 피니스테르 지방을 여행하다가 먹은 각종 해산물과 해초를 이용해 만든 걀레뜨는 지금까지 내가 맛본 걀레뜨 중 으뜸이었다.
브르타뉴의 북쪽, 특히 ‘에메랄드 해안’이라고 불리는 곳은 홍합과 굴 양식으로 유명하다. 이 가운데서도 몽생미셀 만에 위치한 깡깔(Cancale)이라는 도시는 양식 굴과 홍합 생산으로 손꼽힌다. 굴을 양식할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된 것은 1930년경부터이고, 후에 이 지역의 1000 헥타르(ha)의 바다표면 중 약 400헥타르(ha)에 달하는 면적에 975개의 인가 받은 굴 양식장이 성업 중이다.
썰물로 해안 멀리까지 바닷물이 빠져나가면, 바둑판 모양으로 틀을 갖춘 양식장 바닥에 깔아놓은 석회 기와 위에 굴이 붙어 자라기 시작한다. 이렇게 9개월이 지나면 굴을 생산할 수 있다. 굴은 매우 신선하고 깨끗한 물에서 자라는데, 이 지역의 양식 조건은 높은 품질을 유지하는 데 손색이 없다.
▲ 두아르느네의 ‘정어리 길’에서 발견한 개인주택 담장에 그려진 정어리 떼 © 정인진
깡깔과 함께, 북쪽 해안의 생-브리유(Saint-Brueuc)만은 자연산 생-자크(Saint-Jacques) 조개가 잡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이곳의 생-자크 조개는 유럽에서도 명성이 높으며, 11월에서 4월까지 조개잡이가 허락된 기간 중에도 일주일에 4일 이하, 하루 6시간이 넘지 않게 조업하도록 엄격하게 통제, 관리하면서 생-자크 조개의 서식지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브르타뉴의 남쪽 모르비앙 해안의 에텔(Etel)과 퀴베롱(Quiberon)만 역시 굴 양식으로 유명하다. 특히 모르비앙 해안에서는 굴과 함께 홍합, 대합 양식도 성업 중이다. 그런 만큼 해산물의 풍미를 즐길 수 있는 요리가 매우 발달되어 있다. 온화한 날씨와 넓은 해수욕장 덕분에 여름마다 피서객들이 몰려오고, 이들은 더불어 이 지역 인근 해에서 잡히는 해산물의 풍미까지 더불어 즐기는 행운을 누리고 있다.
고기잡이와 통조림 산업의 발달
브르타뉴의 남쪽 바다에서는 고기잡이도 발달되어 있다. 에텔과 그루와(Groix)섬에서는 벌써 1세기 전부터 참치를 잡아왔다. 또 로리앙(Lorient) 근해에서는 메를뤼(merlu)라 불리는 대구 종류의 생선이, 퀴베롱과 ‘벨 일 앙 메르’(Belle ile en Mer)섬 근처에서는 농어가, 우아(Houat)섬 근해에서는 바다가재가 많이 잡힌다.
▲ 모르비앙 바다를 가득 채웠다는 배, 시나고를 형상화한 주물 철 간판. (Vannes) © 정인진
옛날 모르비앙 근해에는 시나고(Sinagot)라고 불리는 어선들로 가득 차 있었다. 시나고는 굴 잡이 배로, 두 개의 돛대에 사각의 붉은 돛을 달고 있었다. 시나고는 모터가 달린 어선들이 등장하고 2차 세계대전을 거쳐, 굴 양식이 시작되면서 사라지게 된다. 마지막 시나고는 1961년까지 존재했고, 현재는 ‘시나고의 친구들’(Les amis du Sinagot)이라는 시민단체에 의해 역사적 기념물로 분류되어 보존되고 있는 몇 척들(Les trois Freres)이 남아있을 뿐이다.
피니스테르 지방, 브르타뉴의 서쪽 바다는 정어리 생산과 정어리 통조림 산업을 떼어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곳이다. 1825년 낭트를 시작으로, 5년 뒤에는 모르비앙에 이어, 1850년에는 피니스테르 지역에도 정어리 통조림 공장이 건설되었다. 특히 20세기 초에는 오디에른느(Audierne)와 크르와지(Croisic) 사이에 10여개의 통조림 공장들이 세워진다.
브르타뉴에서는 모터가 달린 작은 배들로 어선들이 교체되면서 많은 어민들이 해안이 아닌 도시에 남게 되는 사태가 발생한다. 한편으로는, 증가한 물고기 수확으로 인해 저장의 필요성이 요구되었고, 이에 발맞춰 건설된 정어리 통조림 공장은 도시에 남은 어민들에게 고기잡이보다 덜 힘들면서도 정기적인 수확을 보장하는 직업을 확보해주기도 했다.
통조림 산업의 발달은 양철용기 제조를 위한 용접공들도 함께 양산했다. 이 일은 주로 남자들이 맡았다. 하루에 일인당 600~700여 개의 통을 생산할 수 있었고, 생산된 양을 개당 계산해 보수를 준 이 일은 1903년에는 160개의 깡통제조 공장에 2천400명의 용접공들이 일했다고 한다.
좋은 조건에도 불구하고 이 일은 안정된 일이 아니었다. 정어리 통조림 제조는 겨울에만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봄이 되면 통조림 생산량이 줄어들었다. 또 1909년부터 깡통 제조업이 기계화되면서 용접공들의 상황은 더욱 나빠지게 된다.
“난 브르타뉴 출신인걸!” 바닷바람 속 그녀들
브르타뉴에서 어업과 관련한 일이 남성들만의 일은 아니었다. 특히, 통조림 공장에서 생선을 사들이고 작업을 감시하는 일은 모두 여성들의 몫이었다. 어부의 아내이면서 주부였던 이 여성들은 공장 노동자로서의 역할을 동시에 담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 옛날 정어리 통조림 깡통을 장식으로 붙여놓은 집 앞. (Douarnenez)
공장에서 그녀들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부둣가에서 우악스럽고 거침없어 품질 좋은 물고기들을 흥정해 사들이는 이들이 바로 이 여성들이었다. 그녀들에 의해 통조림 제품의 품질과 공정 과정이 관리되었다. 또 그녀들의 능력 덕분에 적어도 이 분야에서는 성별 불평등 의식이 점점 약해졌고, 능력 위주로 평가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져 나갔다.
특히, 통조림 공장에서 정어리를 일일이 손으로 통에 담는 일은 여성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젊고 어린 소녀들이 이 일을 맡았다. 20세기 초, 1만명의 브르타뉴 여성들이 통조림 공장에서 일했다. 당시에 정어리는 엄청나게 잡혔고, 통조림 공장의 일은 밤늦게까지 이어지곤 했다.
이와 함께, 어망을 수선하는 일 또한 여성들이 맡았다. 각 어선들은 생선에 따라 각기 크기가 다른 어망들을 20여종 싣고 다녔다. 대마나 면으로 만든 이 어망들은 정기적으로 참나무 껍질을 끓인 물에 탄닌을 이용하여 무두질을 해줘야 했다. 이 작업은 부패를 막았으며, 물 속에서 눈에 덜 띄는 푸른색의 구리 염색을 여기에 보충해 주는 쪽으로 나아갔다.
어망 수선은 매우 중요했다. 배 근처에 정어리가 풍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종종 어망이 빈 채로 올려지곤 했다. 팽팽하게 수직으로 당겨진 넓게 찢어진 어망 벽을 통해 첫 물고기가 빠져나가면, 그 뒤를 이어 마지막 물고기까지 모두 빠져나갔다. 어망의 철저한 관리, 감독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이런 식의 어망 파손은 흔한 일이었다고 한다.
어망뿐 아니라 겨울철 정어리 잡이에 쓰인 소형 배들이 뭍으로 돌아왔을 때, 수선하는 일 역시 필수적이었다. 망가진 그물들은 집 앞이나 항구 근처 사구 위에서 정교하게 수선되었다. 어부의 아내들은 정어리 통조림 공장에서 일하는 것과 별도로 어망 수선에 참여했다. 또한 배의 파손 여부를 살피고 고치는 일, 홍합잡이에 쓰이는 회양목이나 동물 뼈로 만든 작은 방망이를 깎고 손질하는 일도 여성들의 몫이었다.
게다가 도시로 생선을 팔러 나간 사람들도 여성들이었다. 어부의 아내들이나 생선도매 상인들인 그녀들은 매주 도시에서 열리는 장으로 생선을 들고 나가 부르주아, 상인, 공무원들에게 팔았다. 내륙의 농부들 역시 이 장에 와서 정어리, 고등어, 대구 등의 생선들을 사갔다.
▲ 브르타뉴에서 어선들이 가득 정박해 있는 항구를 발견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Concarneau)
나는 브르타뉴를 여행하면서 만난 브르타뉴 여성들의 씩씩한 태도에 놀라는 일이 참 많았다. 그녀들은 하나같이 “나는 브르타뉴 출신인걸!” 이라고 말하며 씩씩함을 과시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의아스러웠는데 브르타뉴 여성들의 역사를 조금씩 알아가면서 그 이유에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브르타뉴 여성들은 내륙에서는 농업과 아마포 생산으로, 또 바닷가에서 어부로 요구되었던 이 많은 일들 속에서 독립심은 물론, 경제적인 자립도 키워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레이스 머리 장식을 펄럭이며, 바닷바람 속에 서 있던 그녀들의 이미지 속에서 오늘을 사는 씩씩한 브르타뉴 여성들의 원형을 본다. ▣ 정인진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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