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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과 함께 숨쉬고 있는 역사의 유물
<브르타뉴에서 보낸 편지> 렌의 사라진 성곽들과 유적지 복원
‘교육일기’와 ‘하늘을 나는 교실’의 필자 정인진 님이 프랑스의 서북부 브르타뉴 지방에서 머물며 보고 느낀 것을 기록한 ‘브르타뉴에서 보낸 편지’ 연재 www.ildaro.com
패망한 나라의 흔적을 읽는 건 슬프다
브르타뉴의 도시들은 성곽 형태를 띤 곳들이 많다. 특히 정치적, 군사적 역할이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도시는 어김없이 높고 튼튼한 성벽으로 둘러쳐져 있는데, ‘렌’처럼 역사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도시에 성벽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러나 옛날, 렌에도 성곽이 존재했다. 그 흔적을 시내 중심가의 한 성채(chatelet)에서 찾을 수 있었다.
▲ 렌의 ‘모르들래즈 문들’(Les portes Mordelaises)이라고 불리는 성채 © 정인진
렌 시내에는 ‘모르들래즈 문들’(Les portes Mordelaises)이라고 불리는 유적이 있다. 도개교(le pont-levis) 양쪽에 두 개의 망루가 있고 중앙 문 위에는 생활 공간을 갖춘 전형적인 성채 형태를 띤다. 이 문들을 통과하면 바로 대성당으로 이어진다. 브르타뉴 공작들과 주교들이 렌으로 공식적인 입성을 할 때 사용되었던 문으로, 대성당에서는 그들의 입성을 축하하는 환영 행사가 벌어졌다. 1491년 12월, 프랑스의 왕 샤를르 8세와 안느 드 브르타뉴 공작이 결혼하고 렌을 방문했을 때, 그들을 처음 맞은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이 성채는 15세기에 고대 로마 시대에 세워진 옛 성벽의 기초 위에 올려졌다. 렌에는 서기 1~3세기에 건설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성벽이 존재했다. 도시를 둘러쌌던 그 성벽은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의 노선과 외형을 살펴볼 때, 약 14개 정도의 탑과 4 개의 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저 문이 하나 존재하는 성채를 ‘모르들래즈 문들’이라고 복수 형태로 지칭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다가 15세기에 ‘모르들래즈 문들’은 새로운 도약을 맞게 된다. 1421~1448년 장4세(Jean IV) 공작이 렌에 새로운 방어벽을 건설한 것이다. 새로운 축성을 통해, 성벽은 생-게오르쥬(Saint-Georges) 수도원과 생-제르맹(Saint-Germain) 성당까지 넓혀졌다. 8m 높이의 성벽에 12개의 탑이 새로 생기고, 성벽에는 구멍 뚫린 문들도 여러 개 세워졌다. 그리고 옛 성벽에 존재했던 문들도 새롭게 건설되는데, 이때 ‘모르들래즈 문들’이 현재의 성채 형태로 고쳐진 것이라 한다.
▲ 옛날 렌을 둘러싸고 있었던 성곽들을 표시한 지도. A, B, C 순서대로 건설되었다.
성벽 축성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1449~1476년에는 세번째 공사가 전개된다. 이 세번째 성벽이 건설되면서 도시 방어벽이 렌 끝까지 이어지면서, 도시는 방어벽으로 넓게 둘러싸이게 된다.
그러나 17세기 초, 렌의 성벽들은 무너진다. 프랑스의 왕 앙리4세(Henri IV)는 1602년 렌의 성벽에 세워진 탑들과 문들을 모두 파괴시킬 것을 명령한다. 다행히 당시 ‘모르들래즈 문들’은 대위(capitaine)의 주거용으로 사용된 덕분에 그 존재를 유지할 수 있었다. 게다가 루이13세(Louis XIII)는 1636년부터 외호와 보루, 성벽들을 팔 수 있게 허락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렌의 성벽과 그곳에 존재했던 모든 탑과 문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저 오늘날에는 모르들래즈 문들 사이에 존재하는 외호와 두 망루, 그리고 고대 로마 시대에 건설된 약간의 성벽 등 몇몇 유적들만 존재할 뿐이다.
나는 성곽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한켠에 덩그러니 서 있는 모르들래즈 문들을 볼 때마다 패망한 나라의 비운을 확인하는 느낌이 들어 마음이 좋지 않다. 겹겹이 도시를 둘러싼 견고한 성곽들이 프랑스 왕국에 불안을 주었던 걸까? 혹시 저항군이라도 조직된다면 요새화하기 너무 좋은 이 도시의 성곽을 그냥 존재하도록 놔둘 수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유물발굴 정원’, 시민들에게 공개된 복원 과정
이런 안타까움을 가지고, 시내를 오갈 때마다 모르들래즈 문들 곁을 지나쳤는데, 지난 2012년 9월부터 렌시는 대대적인 발굴 작업과 보수 공사를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에 존재했던 모든 유적들을 복원하는 것은 아니고, 방치되어 있던 모르들래즈 문들과 그 둘레를 복원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것은 앞으로 3년 동안, 2015년까지 진행될 것이다.
이미 이 작업을 통해, 성문과 망루 사이에 존재하는 해자(성 주위를 깊게 둘러싼 못)를 복원한 상태다. 깊이가 5m나 되는 해자는 19세기 때까지만 해도 그 형태를 보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19세기부터 20세기 사이 이루어진 도시화 과정 속에서 흙더미로 매립되었다고 한다.
▲ ‘모르들래즈 문들’의 유적 발굴 과정을 시민들에게 공개함으로써, 이곳으로 현장 학습 나오는 학생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 © 정인진
또 발굴 과정 속에서, 15세기와 16세기에 해당되는 도자기들이 발굴되기도 했다. 이 토기들이 출토됨으로써, 성채가 적어도 15세기에는 건설되었을 거라는 확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망루 사이의 성벽 부분은 아주 오래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9~14세기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후에는 남쪽 성벽을 탐색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곳은 현재 방수용 도료로 뒤덮혀 있는데, 그것을 거둬내는 작업이 이어질 것이다. 2015년 발굴이 끝날 때는 두 개의 망루와 문들 안쪽까지 복원함으로써 이 유적지 재정비가 마무리될 것이라고 한다.
무엇보다 이번 발굴 작업의 큰 특징은 시민들에게 공개된 상태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발굴을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모르들래즈 문들 주변이 <유물발굴 정원>으로 재정비되었다. 모르들래즈 문들을 비롯해 성벽의 건설과 파괴 역사, 발굴 계획들을 자세하게 기록한 안내판들을 설치해 놓았다. 또 고고학자들의 발굴 모습을 시민들이 직접 관찰할 수 있도록 열린 공간에서 복원이 진행되고 있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예전보다 더 자주 현장 학습을 나온 학생들을 볼 수 있다.
유물발굴 정원으로 조성함으로써, 학생들뿐 아니라 곁을 지나가는 시민들의 발걸음도 자주 잡아끈다. 별 생각 없이 그 곁을 지나쳤던 나 역시, ‘요즘은 얼마나 발굴되었을까’ 궁금한 마음에 성채 주변을 기웃거리는 경우가 늘었다. 이렇게 공개된 유적 발굴은 시민들로 하여금 그들의 역사에 좀더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 것 같다.
현대인과 함께 숨쉬고 있는 역사의 유물
한편, 모르들래즈 문들과 함께 렌에서는 생딴느(Sainte-Anne) 광장에 있었던 ‘자코뱅 수녀원’(couvent des Jacobins) 역시 유적 발굴과 재건축이 진행 중이다. 이 계획이 끝나면 수녀원 건물은 브르타뉴 지방의회로 사용될 예정이다.
▲ 자코뱅 수녀원 유적 발굴과 재건축 현장. 이 건물은 브르타뉴 지방의회로 쓰이게 된다. ©정인진
자코뱅 수녀원의 유적 발굴 과정에서는 고대 로마 시대 유적까지 출토되어 이목을 집중시킨 바 있는데, 이곳의 유적 발굴은 시민들에게 공개하면서 진행되지는 않지만 그 사이 발견된 유적들을 보여주기 위해 전시회가 열리기도 했다. 또 발굴 현장을 둘러싼 보호막에는 이 건물의 역사적 가치와 발굴 계획, 그리고 출토된 유적들까지 인쇄되어 있어 지나는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해놓았다.
브르타뉴를 여행하면서 나는 과거 성이나 수도원이었던 곳들을 그저 유적지로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잘 고쳐서 공공기관으로 활용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 비트레(Vitre)의 성은 시청으로 사용되고 있고, 라니옹(Lannion)의 유명한 ‘쌀 데 위르쉴린’(Salle des Ursulines)이라는 곳은 시민을 위한 다양한 문화예술 활동이 펼쳐지는 공간인데 이곳은 17세기에는 위르쉴린(Ursuline) 수녀원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다.
이런 장소 중 어떤 데는 옛날 그대로의 외형을 갖추고 있기도 하지만, 또 어떤 곳은 과거 웅장한 석조 건물에 현대적인 디자인을 곁들여 고친 곳도 있다. 깽뻬르(Quimper)에 있는 ‘미디어 도서관’(Mediatheque) 역시 과거에 위르쉴린 수녀원이었던 건물을 고쳐 사용하고 있는데, 앞면에 넓게 유리를 덧대 테라스를 꾸며 놓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현대적인 디자인을 가미해 세련되게 고친 건물들이 아름답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하지만, 시민들의 휴식과 문화 공간으로 가치 있게 쓰이고 있는 것에 무엇보다 많은 감동을 받는다. 관광객들이나 드나드는 구경거리로 머물 수도 있었을 곳에 여전히 사람들의 삶이 이어지고 있다. 과거로 끝났을 역사 유적들이 현재로 이어져, 계속 역사를 만들고 있는 모습은 감동스럽기까지 하다.
▲ 깽페르의 ‘미디어 도서관’, 과거 위르쉴린 수녀원이었던 곳을 개조해 사용한다. © 정인진
우리 삶의 공간도 이랬으면 좋겠다. 한국 사회는 과거의 것들은 후지고 낡은 것으로 여겨, 기회만 있으면 흔적도 없이 싹 쓸어버리고 빌딩이나 초현대식 건물로 새로 짓는 걸 마치 세련된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과연 그럴까?’ 하는 질문을 이런 건물들 앞에서 묻게 된다.
현재 렌에서 복원 공사가 한창인, 브르타뉴 지방의회로 쓰일 자코뱅 수녀원도 나중에 얼마나 멋진 모습으로 탈바꿈될지 기대가 크다. 그렇게 그들의 역사가, 삶이 이어져 나갈 것이다. ▣ 정인진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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