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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연습] 늙음에도 나름의 의미가 있다 
 
<철학하는 일상>의 저자 이경신님의 칼럼. 필자는 의료화된 사회에서 '좋은 죽음'이 가능한지 탐색 중이며, 잘 늙고 잘 죽는 것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www.ildaro.com 
 
노년은 인생의 절정인가, 추락인가?
 
노년의 시작을 몇 살로 잡건, 유년, 청년, 중년을 지나가야 노년이 시작된다. 물론 이 같은 인생의 각 단계는 사실상 명확히 나눠지지 않는다. 편의상의 구분일 뿐이다. 노년은 나이가 제법 들 때까지 살아남아야 도달할 수 있는 인생의 단계이다. 청춘을 살아낸 사람들이 죽기에 앞서 마지막으로 이 단계를 거치게 되는 것이다.
 
사실, 노년에 이르지 못하고 사망하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노년에 죽는 것, 게다가 아주 늙어서 죽는 것, 즉 ‘장수’가 복으로 여겨진다.
 
에피쿠로스의 말처럼 노년이 인생의 절정일 수도 있다. 젊어서부터 노년을 준비하고 지속적으로 성장을 도모해 온 사람이라면 나이가 들어 오히려 젊은이보다 더 지혜롭고 성숙할 수 있다. 그래서 최고로 아름다운 시절을 노년에 맞이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알츠하이머와 같은 두뇌퇴행질환에 걸린다면 어떨까? 소수의 노인에게 해당된다 하더라도, 죽기 전 10 여 년 동안 뇌기능을 점차적으로 잃어간다는 것을 상상해 보라. 당연히 정신적 성숙은 불가능하다. 두뇌가 퇴행한 노년은 흔히 말하듯 의존적이고 불행한 시기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생의 비극이자 ‘추락’이라고 말해도 과하지 않다.
 
평균수명 80세, 영원히 젊고 싶어하는 노인들
 
그런데 나이든 사람들은 이처럼 ‘추락’해야, 다시 말해서 쇠약해져 신체적 제약이 생기고 자립적으로 살 수 없어서 다른 사람에게 의존해야 할 때 노년이 비로소 시작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인지 죽기 전 몇 년간만을 노년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이 사회가 규정한 노년의 시작인 65세, 그 나이를 넘어선 사람들이 “난 아직 젊어. 늙지 않았어.”라며 자신이 노인임을 부정하는 것을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아직 젊기 때문에 열심히 일을 계속해야 하고 새로운 사업도 얼마든지 시도할 수 있고 새로운 언어, 문화 배우기에도 도전하고 수영과 마라톤을 시작하기도 한다. 나이 들어 시인이 되고 소설가가 되고 화가가 된 사람들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사실 늙었다고 해서 꿈꾸고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나이가 들어도 삶의 열정, 사람에 대한 관심, 세상에 대한 호기심, 배움의 욕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록 신체적으로는 젊은이보다 못할 수 있지만 욕망과 감정만은 노년에도 여전하다는 것에 노인들은 다들 공감한다.
 
지난 달 보건복지부에서 펴낸 “한눈에 보는 국민보건의료지표”라는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 여성의 평균 기대수명이 84.5세, 남성의 경우는 77.7세다. 세계 상위권에 들어갈 정도로 평균 기대수명이 높은 편이다. 이렇게 늘어난 평균 수명은 마치 각자가 충분히 도달할 수 있고 도달해야만 하는 지표처럼 간주된다. 평균 수명만큼 살아내지 못한다면 일찍 죽은 것이다.
 
아무리 평균 수명이 늘어났다고 해도(그 수치를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오늘날의 노년 관문인 65세를 넘지 못하고 일찌감치 생을 접은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 따위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단명의 불운은 내 것이 아니니까. 우리는 평균 기대수명만큼, 즉 80세를 전후해서 살 수 있다고 그냥 믿고 싶다.
 
현대인에게는 ‘현대의학’이라는 청춘의 샘이자 불로초가 있지 않은가. 나의 죽음을 계속해서 뒤로 미룰 수 있도록, 영원한 젊음을 향유할 수 있도록 현대의학이 충실한 조력자 노릇을 할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 주변의 요즘 사람들은 65세를 넘어 상당히 긴 시간, 10년에서 20년을 더 살 수 있고, 또 그 기간 동안 최대한 젊음을 향유하면서 사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늙었다’는 것을 기억하라

▲  대니얼 클라인(Daniel Klein) <철학자처럼 느긋하게 나이 드는 법>(책 읽는 수요일, 2013) 
 
평균 수명을 염두에 둔다면 그 어느 때보다 기나긴 노년을 보내야 하는 우리, 어떻게 나이 들어야 할지 문득 궁금해진다. 노년에도 영원한 청춘을 갈구해야 할까? 도대체 잘 늙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이 질문에 대한 조언을 70대 노인들에게 들어보기로 했다. 이미 고인이 된 독일 작가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1877-1962)와 오늘날 생존해 있는 미국 작가 대니얼 클라인(Daniel Klein, 1939-)을 조언자로 택했다.
 
70대의 헤르만 헤세가 ‘노년과 죽음’에 대해 쓴 글, 대니얼 클라인인 70대에 들어서면서 쓴 책 <철학자처럼 느긋하게 나이 드는 법>(책 읽는 수요일, 2013)을 펼쳐 들었다. 이 현명한 노인들이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노년에 대한 생각은 참으로 닮았다. 노년은 노년만의 인생의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니얼 클라인은 나이가 들었다고 절망해서도 안 되겠지만 영원한 청춘을 꿈꾸며 숨가쁘게 달리는 것도 반대한다. 이렇게 달려가다 보면 “살아온 길을 되돌아보면서 차분하게 인생 황혼기를 성찰할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노인으로서 충만한 삶을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잃고 ‘영원한 청춘’ 단계에서 초고령 단계로 직접 뛰어들게 된다”고 경고한다. 진정으로 노년을 향유하지 못한 채 곧장 추락하는 비극을 맞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두 번 오지 않는 노년이라는 인생의 단계를 기왕이면 진실되고 만족스럽게 살아갈 수 있길 바란다.
 
헤르만 헤세도 인생의 각 단계는 그 나름의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으니 노년을 노년답게 체험하라고 충고한다. 젊음은 젊음대로, 늙음은 늙음대로 의미가 있고, 나이에 따라 과제가 달리 주어진다고 본다. 그에 의하면,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일에 매진하는 것은 노인의 과제일 수 없다. 그것은 젊은이의 과제다. 노인에게 주어진 과업은 고통과 죽음을 견디고, 또 죽음을 배우고 죽어가는 것이라는 것이다.
 
죽음이 노인들만이 생각할 주제라는 것에 동의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노년이 죽음이 접근해 오는, 죽음을 맞이하는 인생의 단계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동안 단 한 번도 진지하게 죽음, 죽어가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는 노년이야말로 그 과제를 진지하게 끌어안을 시기라는 주장에 거부감은 없다.
 
노년기의 충만한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 진정으로 만족스럽게 늙어가기 위해서는 노년의 과제를 이해하고, 노년 자체에서 의미를 찾고, 노년의 가치를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 조언자들은 입을 모아 이야기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늙었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데서 출발해야 하리라.
 
‘늙었다는 사실 자체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대니얼 클라인의 지적에 공감이 간다. 나 자신의 나이든 모습을 정직하게 들여다보지 못하고 어떻게 진실하게 늙을 수가 있겠는가. “노인이 젊어 보이려고만 하면 노년은 한낱 하찮은 것이 되고 만다”는 헤르만 헤세의 말이 마음을 울린다.
 
소박한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찾아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짧은 산책길 정도로 느껴졌던 것이 멀고 힘겨운 길이 될 수도 있고, 어느 날 갑자기 아예 길을 걷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그 동안 그렇게 좋아했던 음식들도 포기해야만 한다. 육체적으로 느낄 수 있는 기쁨과 쾌락은 더욱 드물게 나타나고, 그런 것들을 위해 이제는 더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질병과 결함, 흐릿해지는 사고력, 굳어가는 육신, 많은 고통, 더구나 그런 모든 것들을 길고, 지루한 밤에 겪어야 한다는 것-모두가 숨길 수 없는 씁쓸한 현실이다.” -헤르만 헤세 “노년에 대하여”(1952)
 
비록 노년이 인생 최상의 단계, 절정이라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도 노년은 인생의 다른 단계만큼이나 제 색깔을 가지고 있는 시기라는 점에는 공감할 수 있을 것 같다. 헤르만 헤세가 이야기하듯 노년에는 육신도 정신도 지쳐 피로해진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과 힘에 의구심을 갖는 것을 배워야 한다.” 희생해야 할 것도 포기해야 할 것도 해를 거듭하면서 늘어난다. 그러다 보니 젊을 때보다 인내심이 강해지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노쇠한 육신, 흐릿한 정신에 어울리는 삶은 무엇일까? 대니얼 클라인은 우리에게 노년에는 단순하고 소박한 즐거움을 찾으라고 조언한다. 일과 소유에 있어 과도한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으려 애써야 한다는 것이다. 친구랑 담소를 나누거나 음악을 듣거나 인생에 대해 사색하면서 만족감을 얻으라는 것이다.
 
“오늘 나는 커다란 추억의 그림책 속에서 우리 자신의 삶을 조심스럽게 되돌아보면서 그 숨가쁜 경주에서 벗어나 관조하며 생활할 수 있게 된 것이 무척 좋고 아름답다.”고 헤르만 헤세는 고백한다. 과거에 대한 기억, 추억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들춰보거나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여유롭게 경청하는 것도 노년의 즐거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행동하기보다는 관조하고, 인내심 있게 삶을 대하고 관대하게 사람을 포용하는 것이 노년에 기쁨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것이다.
 
헤르만 헤세가 생각하듯 청년기와 노년기의 과제가 날을 세우듯 대립된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소박한 삶, 느린 삶, 인내심 있고 포용력 있는 삶, 인생과 죽음을 사색하는 삶, 행동하다가도 관조하는 삶, 친구들과 시간을 나누는 삶, 예술을 즐기는 삶은 젊은 시절에도 추구할 수 있고 추구해야 할 과제로 보인다.
 
젊은 시절에는 도달하지 못한다고 해도, 젊어서부터 이런 삶을 꾸리기 위해 애써 온 사람이라면, 노년에 이르러 그 삶이 잘 맞는 의복처럼 편안하고 느긋해질 수는 있을 것이다. 그래서 에피쿠로스가 말하듯, 노년이 인생의 절정일 수도 있을 것이다.
 
“운이 좋은 사람은 젊은이가 아니라 일생을 잘 살아온 늙은이다. 혈기가 왕성한 젊은이는 신념에 따라 마음이 흔들리고 운수에 끌려 방황하지만, 늙은이는 항구에 정박한 배처럼 느긋하게 행복을 즐긴다.”
 
‘항구에 정박한 배처럼 느긋한’ 삶이야말로 노년이 아니고서야 어찌 가능하겠는가. 대부분의 청년들은 욕망에 더욱 흔들리고 과거보다는 미래를, 관조보다는 행동에 더 무게를 싣고 살아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젊은 시절에 그치지 않고 나이가 들어서도 젊은이처럼 무모하고, 과도한 욕망에 이끌리고, 관조하고 관찰하기보다는 행동을 앞세우고,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에 집중하지 않고 앞만 바라보고 전진하려고 한다면 쇠약한 육신에 분명 지나치다.
 
내내 달려만 왔다면, 이미 몸과 마음이 피로로 지쳐있을 테니 늙어가면서는 그 속도를 늦춰볼 법하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젊은 시절의 어리석음을 반성하면서 진정으로 좋은 삶이 무엇인지, 좋은 죽음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고민할 시간을 노년에조차 갖지 못한다면 영영 기회는 없다. 노년을 인생의 절정으로 만들지는 못하더라도 노년에 와서 추락할 수는 없다. 그래서 70대의 조언자들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충고는 여전히 유효하다.  ▣ 이경신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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