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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신의 죽음연습(19) 외톨이로 늙는 두려움
<철학하는 일상>의 저자 이경신님의 칼럼. 필자는 의료화된 사회에서 '좋은 죽음'이 가능한지 탐색 중이며, 잘 늙고 잘 죽는 것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일본 감독 신도 가네토(Shindo kaneto, 1912-2012)의 영화 <오후의 유언장>(午後の 遺言狀, 1995)은 83세 목수의 자살로 시작한다. 목수는 자신의 관을 짜고 난 후 “여기서 끝낸다”는 짧은 메시지와 함께 관의 마지막 못을 박을 때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커다란 돌을 남긴 채 자신의 목숨에 종지부를 찍는다.
노인 자살로 시작한 이 영화의 끝부분에 또 다른 자살이 등장하는데, 노부부의 동반자살이다. 치매 걸린 아내와 그 아내를 돌보는 남편, 형편이 어려운 이들은 비용이 비싼 사설 양로원에 들어갈 수 없다. 그래서 부부가 함께 입소할 수 없는 공공 양로원에 들어가야 하는 처지가 된다. 결국 노부부는 양로원이 아니라 함께 죽음을 택한다. 노부부가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된 이유도 따지고 보면 질병과 가난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이 일본 영화가 보여주는 노인 자살의 단면이 우리에게 전혀 낯설지 않다. 우리나라 노인이 자살을 택하는 가장 큰 이유도 건강상의 고통과 경제적인 어려움이라는 연구결과를 읽은 적이 있다.
밥벌이해야 하는 노인들, 갈 길이 먼 노인복지
우리나라에서는 하루 평균 12명의 노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고 한다. 즉, 노인자살이 전체 자살의 28.1%에 이를 정도로 자살률이 높고, OECD국가에서 노인자살률 최고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다. 가난과 노인자살이 상관관계가 있다는 연구결과를 염두에 둘 때, 우리나라 노인들의 경제형편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현재 우리나라 노인 상당수가 빈곤하다는 것이다. 65세 이상의 노인 빈곤율을 살펴보니, 2011년 통계에 의하면 48.6%이다. 노인 빈곤율이란 전체 가구 가처분소득(세금을 제외한, 소비할 수 있는 소득)의 중위소득의 절반에 미치지 못하는 노인의 비율을 뜻한다. 중위소득이란 우리나라 가구를 소득 순에 따라 나열했을 때 한가운데 위치한 가구의 소득이다. 중위소득의 50%가 되지 않으면 ‘빈곤’한 것으로 본다. 우리나라 월 중위소득이 2011년 기준으로 200만원이 조금 넘는다. 따라서 월 소득이 100만원보다 적은 가구라면 ‘빈곤하다’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노인 빈곤율은 노인 자살률 못지 않다. OECD 국가 가운데 1위이자 OECD 국가 평균 노인 빈곤율(2010년 OECD 평균 노인 빈곤율은 12.4%)의 3배가 넘을 뿐만 아니라, 노인빈곤율의 상승 속도도 최고라고 한다. 여기서 여성노인의 경제 상황이 남성노인의 경제 상황보다 더 열악하다는 것도 놓쳐서는 안 된다. 2012년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60세 이상의 중고령 여성이 세대주인 가구의 빈곤율은 59.2%, 70세 이상인 여성 세대주 가구의 경우 빈곤율은 74.9%이다. (70세 이상인 남성 세대주 가구의 빈곤율 52.6%에 비할 때 여성 세대주 가구가 현저히 가난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물가는 오르고 중위소득은 해를 거듭할수록 줄어드는 데 반해 노인 빈곤율은 더 높아지고 있으니까, 노인들이 처한 경제 상황은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고 분석할 수 있다. 이렇듯 많은 노인들이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노인복지가 형편없기 때문에 생계를 꾸리기 위해서 밥벌이에 나선 노인들이 적지 않다. 이 노인들은 폐지수집과 같은 비임금 자영업이나 청소용역, 택배 배달과 같은 저임금 임시직 일자리로 내몰린다. 이것이 바로 65세 이상의 노인 고용률이 39.6%로, OECD 국가들 가운데 최고이면서도 노인복지는 최하위에 속하는 나라의 실상이다.
노인복지 수준이 낮아서 노인들이 생계형 노동을 하지 않고서는 먹고 살 수가 없다면, 가난한 노인들이 건강을 잃을 경우 살 길이 막막할 수밖에 없다. 노인의 의료비 지출을 보자. 노인 의료비는 날로 증가하고 있고, 전체 진료비의 36%에 해당된다고 한다. 나이가 들수록 건강상의 어려움이나 질병의 고통을 더 겪는 것은 당연하다. 노인들은 그 어떤 세대보다 질병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고 신체적으로 취약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노인들이 가난으로 인해 생계노동을 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은 가혹하기만 하다.
이같은 현실 앞에 정부는 노인복지를 종합적으로 지원하는 체계를 세우겠다고 하면서도 예산 타령만 계속하고 있으니, 노인복지는 갈 길이 멀어 보인다. 가난하고 병든 노인들의 비극이 금방 해소될 것 같지 않아 안타깝다.
늘어나는 가난한 노인들, 병마에 시달리는 노인들 가운데 자살 유혹을 받는 사람이 어찌 없을 수 있을까? 몸이 너무 아파서, 먹고 살기 힘들어서 죽는 편이 낫다고, 목숨을 끊어 다른 사람의 짐이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살, 고독사하기 쉬운 독거노인
다른 사람의 짐이 된다는 자기부정뿐만 아니라 소속감 상실로 인한 고립감이 자살의 중요한 원인이라는 심리학자 토머스 조이너의 지적이 떠오른다. 병들어 의료비는 많이 필요한데도 당장 끼니를 해결할 돈도 없는 노인들, 게다가 홀로 살 수밖에 없다면 어떨까? 혼자 살면서 소속감도 없고 새로운 인간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는 노인이라면 스스로 목숨을 끊기 쉽다. 자살이 아니라면 홀로 쓸쓸히 죽음을 맞게 될 것이다.
2013년 통계청의 고령자 통계에 의하면 올해 65세 이상이 전체 인구의 12.2%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 사회가 노인으로 간주하는 65세 이상의 사람이 6백만을 넘어선 것이다. 노인 인구는 날로 늘고 있는 추세라서 2025년에는 노인인구 1천만 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예측된다. 노인인구의 증가만큼이나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이 독거노인의 증가다. 독거노인은 전체 노인인구의 약 20%라고 추정된다.
노인복지는 제대로 되어 있지 못한 데도 기대수명은 높아지니까, 오래 살면 살수록 빈곤에 시달릴 것이 뻔하다. 노인 빈곤율은 고령자일수록 올라간다. 게다가 이 땅에서 혼자 살아가는 노인은 누군가와 함께 사는 노인보다 훨씬 더 가난하다. 65세 이상의 독거노인 빈곤율이 76.6%에 이른다고 하니, 독거노인은 대체로 가난하다.
독거노인이 자살이나 고독사에 노출될 확률이 높은 것은 당연해 보인다. 맺고 있는 인간관계가 없으니, 홀로 생활하다 홀로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고립되어 사는 가난한 독거노인이 병이 들면 자살의 유혹이 어찌 크지 않을까? 더 살고 싶지도 않겠지만 더 살 길도 막막할 수밖에 없다. 실제, 병들고 가난한 독거노인의 자살률이 높다.
홀로 죽는 것이 슬픈 일은 아니다. 다만…
노인 자살이나 고독사라는 죽음은 노년의 문제로 접근하는 것이 옳다. 죽음 이외는 달리 벗어날 길이 없어 보이는 노년의 비극적인 현실을 들여다봐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자살 자체나 홀로 맞는 죽음을 부정적인 것으로 매도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철학자들 가운데는 자살이나 고독사를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오래 전 그리스 철학자들은 애국심에서 우러난 자살, 명예나 소신을 지키기 위한 자살, 늙음을 피하기 위한 자살을 지지했다. 로마 철학자 세네카는 삶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네가 온 그곳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자살이 자기 운명을 지배하고자 하는 개인의 의지적이고 자유로운 선택일 수 있다고 이해한 것이다.
또 프랑스 철학자 몽테뉴는 “우리 집을 나가서 집안사람들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침대 위보다는 말 위에서 죽고 싶다”고, 또 “살아서는 친지들과 함께 웃으며 지내다가 죽을 때는 알지 못하는 사람들 속에 가서 죽어가자”며 고독사를 예찬하기도 했다.
이 철학자들처럼 자살이나 고독사를 찬양하기는 어렵다고 해도, 개인의 자살할 자유를 인정할 수 있으며 누구나 홀로 죽는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몽테뉴 말대로, 말 위에서건 낯선 마을에서건 숲 속에서건 홀로 죽는 것이 사람들 사이에서 죽는 것보다 더 나을지도 모른다. 다만 홀로 죽건,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죽건,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죽건, 죽음은 그 자체로 고독한 경험이다.
죽음이 고독한 경험이라고 해서, 죽기 전 노년을 외톨이로 보내고 싶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고독사한 사람을 장례식 없이 화장한다고 한들 뭐가 그리 비극적일까? 그보다 비극적인 것은 사람이 죽은 다음 그 죽음을 애도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고, 생전에 함께 시간을 나눌 만한 인간관계도 없이 고립되어 살았다는 것이리라. 외톨이로 나이를 먹는 것은 슬프고 두려운 일이다. 아는 사람들과 어울려 즐겁게 나이 들고 싶은 것을 특별한 소망이라 말할 수 있을까?
절대적 빈곤이 아니라면, 치명적인 병을 앓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아무리 가난하고 몸이 힘들어도 주위에 마음을 나누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면, 자살까지 기도할까? 물론 불행한 고독사로 등 떠밀리지도 않을 것이다. 홀로 나이 드는 것이 두려운 거지 홀로 죽는 것이 슬픈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노인의 절대적 빈곤과 극단적 고립이 몰고 간 자살과 고독사는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기에 앞서 우리 사회가 부끄러워해야 할, 사회가 해결해야 할 과제라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 이경신 *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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