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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연습>15. 자연에 다가가면서 죽음의 부담 줄이기
<철학하는 일상>의 저자 이경신님의 칼럼. 필자는 의료화된 사회에서 '좋은 죽음'이 가능한지 탐색 중이며, 잘 늙고 잘 죽는 것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www.ildaro.com
죽음, 자연의 품에 안기다
자연을 가까이 하면서 사는 사람은 자연을 멀리한 채 살아가는 사람보다 죽음을 덜 두려워할 것도 같다.
대지로부터 직접 먹을 거리를 구하고 흙으로 쉴 집을 짓고 사는 사람에게 땅은 소중한 삶의 터전이다. 살아가는 동안 흙에서 마음의 위로를 구하고 육신의 고통을 치유 받으리라. 그리고 땅이 자신을 위해 준비된 최후의 안식처임을 굳게 믿을 것이다.
바다를 생존의 공간으로 삼은 섬사람은 어떨까? 바다가 가져다 준 나무로 집을 짓고 바다가 안겨준 것들을 먹으며 바다를 일터로 삶을 꾸려온 사람이라면, 바다가 마지막 순간 자신이 되돌아갈 곳임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듯, 자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있는 사람들, 죽으면 대지로, 바다로 돌아간다고, 자연의 품에 안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이들은 삶과 죽음의 신비에 좀더 가까이 다가서 있을 것 같다.
라다크 사람들의 윤회에 관한 믿음
▲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오래된 미래> 중앙북스 2007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오래된 미래>를 읽다 보면, 라다크 사람들이야말로 자연을 존중하며 자연의 흐름에 자신을 내맡기며 사는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흔히 한동안 떠나 있다가 오랜만에 라다크 친구들을 만나면 그들은 “지난번 보았을 때보다 많이 늙었네요”라고 말할 것이다. 그 말을 겨울에서 봄으로의 변화를 말하듯 아무렇지 않게 할 것이다. 그 사람들에게는 내가 더 늙어 보인다는 말을 듣기 싫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것이다. 라다크 사람들은 나이를 겁내며 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삶의 각 단계는 그 나름의 이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오래된 미래> 중앙북스, 2007)
라다크 사람들에게 있어 삶은 봄, 여름, 가을을 거쳐 겨울에 이르듯 여러 단계를 거쳐 죽음에 이르는 것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계절이 모두 자연적이고 필연적인 변화이듯이 탄생, 성장, 늙음, 죽음도 모두 자연스러울 뿐만 아니라 필연적이다. 인생을 자연의 변화처럼 이해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은 죽음을 자연스러운 변화의 단계로 받아들이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한 걸음 더 나간다. 겨울이 지나면 다시 봄이 오듯이 삶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 다음 생이 기다린다고 확신한다. 삶에 죽음이 이어지고 죽음은 다시 삶으로 이어지기를 계속한다. 현재의 삶이 죽음으로 인해 이곳에서 마감된다고 하더라도 삶 자체가 끝나는 것은 아니라는 믿음, 즉 윤회관을 갖고 있다. 그래서 어려서 죽건, 나이 들어 죽건, 그 죽음이 언제 어디서 다가오건, 윤회를 믿기 때문에 라다크 사람은 그 어떤 죽음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을 것이다.
자연의 순환을 관통한 삶과 죽음에 관한 이해가 윤회라는 종교적인 믿음으로 발전한 것이 인상적이다. 윤회관에 따르자면, 삶과 죽음은 끝없이 반복되고 순환하며 계속된다. 이때 자연의 순환이 매번 똑같이 벌어지는 것이 아닌 만큼, 매번 다시 시작하는 삶도 조금씩 달라지면서 반복되리라는 또 다른 믿음이 덧붙여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죽음을 먹고 산다”
우리는 삶과 죽음의 또 다른 연속성을 생태계의 먹이사슬을 통해서도 발견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다른 생명의 죽음을 섭취합니다. 죽음을 먹고 사는 거지요. 죽음에서 생명이 태어나는 거예요. 겉으로 드러난 모습은 다 다르지만, 모든 생명과 죽음은 여신의 모습이에요. 저한테는 이게 가장 확실한 진리구요. 두려워하면 안돼요. 죽음을 모두 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생명도 없는 거지요.” (스토옥Starhawk과의 인터뷰, <깨어나는 여신> 정신세계사,2000)
그것이 식물이건 동물이건, 단 하루도 다른 목숨을 거두지 않고서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것이 우리 인간이다. 물론 인간만 그런 것은 아니다. 모든 생명체는 다른 생명체의 죽음 덕분에 삶을 연장할 수 있다. 그래서 생명이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것이다.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생명을 빼앗은 나, 나의 죽음이 또 다른 생명을 살리는 때가 온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 다른 생명체에게 진 빚을 내가 죽어 또 다른 생명체에게 갚을 수 있으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사후에 영혼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할지라도, 죽은 육신은 분명 다른 생명을 먹여 살린다.
그래서 생명체들이 서로 먹고 먹히는 과정은 생명이 죽음으로, 죽음이 생명으로 이어지는 과정임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내가 죽어 없어지더라도 나의 죽음이 다른 생명을 살릴 수 있으니까 나의 생명이 죽음을 통해 다른 생명으로 거듭나는 듯하다. 그래서 생명이 죽음을 매개로 또 다른 생명으로 순환하는 인상을 받는다.
비록 먹이사슬이라는 생명의 자연순환 속에서 ‘나’라는 자기 정체성을 유지할 수는 없지만, 죽은 뒤 이 세상에서 완전히 소멸되지 않고 내 생명이 다른 어떤 생명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상상, 이 상상을 해보는 것만으로도 유한한 존재인 내게는 작지 않은 위로가 된다.
어쩌면 사람이 동물로도, 식물로도 태어날 수 있다는 윤회관이 이런 식의 생명순환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나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자연의 변화, 생명의 순환과 같은 자연적 현상을 통해서 윤회라는 종교적 믿음이 생겨나고 발전했을 것이라고 추측해 보는 것이 흥미롭다. 생명체라면 죽음을 피할 수 없는데, 죽음을 통해 삶이 반복적으로 계속된다는 믿음은 충분히 매혹적이다.
설사 죽음 이후 다른 삶이 계속해서 주어지지 않은들 어떠리. 종교적인 믿음이 없는 나 같은 사람은 윤회 사상을 선뜻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으니까, 자연의 품으로 뛰어드는 쪽을 택하려 한다. 자연은 자연 가까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삶과 죽음의 신비를 열어 보이리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어서일까?
자연 속에서 다른 생명체와 더불어 태어나 자라고 늙어 죽어, 결국 자연으로 되돌아가 다른 목숨을 살린다는 사실, 이 사실을 머리가 아니라 가슴 속 깊숙이 새겨 보려고 오늘도 애쓰는 중이다. 죽음의 무게가 좀더 가벼워질 날이 오리라 믿으면서. (이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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