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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연습] 14. 촛불과 레퀴엠
<철학하는 일상>의 저자 이경신님의 새 연재 ‘죽음연습’. 필자는 의료화된 사회에서 '좋은 죽음'이 가능한지 탐색 중이며, 잘 늙고 잘 죽는 것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작은 마을의 성당에서
며칠 전 친구와 프랑스의 한 작은 마을을 다녀왔다. 아무런 준비 없이 즉흥적으로 찾은 곳이라서 내겐 마을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 여행 안내소를 찾아 무작정 걷다가 오래된 성당 앞에 이르렀다. 그곳에도 어김없이 마을 한 가운데 성당이 자리 잡고 있었다.
프랑스 땅을 여행하다 보면 도시나 마을의 중심에는 꼭 성당이 있다. 때로는 위풍당당한 모습에 압도되어, 때로는 건축술의 화려한 기교에 매료되어, 기독교인도 아니고 종교에 대단한 관심도 없지만, 나는 성당 문턱을 넘곤 한다. 그런데 강 하구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위치한 이 작은 성당은 앞서 내가 봐왔던 성당들과는 달리, 겉모습이 그리 대단할 것도, 특별할 것도 없었다. 수 백 년의 긴 세월을 잘 견뎌낸 석조 건축물이라는 점에 감동했을 따름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다 마주친 나이든 남자는 마침 성당지기였다. 열쇠꾸러미를 들고 있던 그는 성당 안도 구경할 수 있다고 했다. 성당 안도 밖만큼이나 세련되지 못하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내부 벽면에는 그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성당에 관한 상세하고도 친절한 안내벽보가 곳곳에 붙어 있었다. 관광객을 맞이할 준비는 다 된 셈인데 안타깝게도, 마을을 찾은 몇 안 되는 관광객들 가운데 우리 이외의 그 누구도 성당 안까지 발길을 주지는 않았다. 아마도 우리가 이 날 이곳 성당이 맞이한 유일한 관광객이 아니었을까 싶다.
문 앞에서부터 여러 성인들의 조각상이 눈에 띄었다. 작은 성당 안이 어수선할 정도로 성물들로 가득했다. 나는 이것저것을 한참동안 둘러보다 잠시 의자에 앉아 숨을 돌렸다. 그러자 성당지기가 조금 전 불을 밝혀 둔 성모상 앞의 양초들이 눈에 들어왔다. 동전 하나를 꺼내 헌금함에 넣고 하얗고 동그란 양초가 담긴 푸른 양초그릇을 집어 들었다. 파랑과 하양이 성모의 색깔이라고 했던가? 조심스럽게 양초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잠시 눈을 감은 채, ‘어머니께 평화가 함께 하시길...’이라는 기도를 마음속으로 가만히 중얼거렸다.
죽은 자를 위해 밝힌 촛불
▲ 작은 성당 안의 성모상 앞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해 기도하며 촛불을 밝혔다. © 이경신
이런 기도의 순간, 내가 특정 종교의 신앙인인지 아닌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신이 존재하건 존재하지 않건, 내가 신을 믿건 믿지 않건, 그런 것 따위가 무슨 상관이랴. 죽은 자를 기억해내고 그 사람을 기리는 순간이 소중할 뿐이다.
내가 죽은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촛불을 밝히기 시작한 것은 제법 오래된 일이다. 일상에 파묻혀 살아가는 우리가 매순간 죽은 사람을 기억하고 기도할 수 없으니까, 대신 촛불을 밝힌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촛불이 우리를 대신해서 기도해주는 셈이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그 이야기는 기숙사에서 만난 한 미국인 친구로부터 들었을 것이다. 그 친구는 돌아가신 내 어머니를 위해 자기 집에 촛불을 켜두었다고 했었다. 그때 그 마음에 무척 감동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난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 촛불을 켜두기 시작한 것이 바로 그 이후였던 것 같다.
우리보다 앞서 이 세상을 떠나간 사람들, 그 사람들을 추억하고 기리기 위함이라면, 누군가를 소외시키는, 껍데기만 남은 형식적인 제사의식에 매달리기보다는 촛불 하나를 밝히는 것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아니, 죽은 사람들을 기억하는 데 꼭 제삿날을 기다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나는 죽은 사람이 떠오를 때면 언제든 집안 한 구석에 촛불을 켜둔다.
최근에는 마음이 끌리는 성당을 발견할 때마다 생전에 가톨릭 신자였던 어머니를 위해 양초에 불을 밝혀두곤 한다. 살아서 내내 앓느라 힘겨운 삶을 견뎌야 했던 어머니, 어머니의 영혼이 존재한다면, 죽어서나마 그 영혼이 편안히 쉴 수 있기를 소망하기 때문이다. 아주 잠깐이지만 이렇게 여행지에서도 어머니를 떠올리는 짬을 낼 수 있어 좋다.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어머니와 나누는 것이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내 눈물로 무거운 물통을 져 나르지 않고 솜털처럼 가볍게 춤출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들에게 영원한 휴식을 주소서’
나는 양초에 불을 밝히듯, 때로는 죽은 사람들을 생각하며 ‘레퀴엠(Requiem)’을 듣기도 한다. 레퀴엠을 듣고 있는 동안에는 죽은 사람들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 드리는 마음을 갖게 된다. ‘레퀴엠’이 ‘죽은 사람을 위한 미사곡’이라서 그런가 보다.
‘레퀴엠’이란 용어는 원래 로마 카톨릭 교회의 종교의식인 ‘죽은 사람을 위한 미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죽은 사람을 위한 미사로는 죽은 사람을 매장하기 직전의 장례의식이나 이 세상을 이미 떠나 버린 사람들을 추억하기 위한 종교의식이 있다.
이 망자를 위한 미사는 “Requiem oeternam dona ei [leis], et lux perpetua luceat ei [leis](주여, 그[그들]에게 영원한 휴식을 주소서, 그[그들]를 위해 영원한 빛을 비추소서)”라는 라틴어 구절로 시작된다. 그래서 그 첫 단어 ‘레퀴엠(휴식)’이 ‘죽은 자를 위한 미사’를 대신한 이름이 되었다. 그리고 이때 사용되는 미사곡에도 ‘레퀴엠’이라는 이름이 함께 주어진 것이다.
레퀴엠의 가사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신이 죽은 이들을 불쌍히 여겨 이들 영혼이 지옥에 떨어져 고통 받지 않고 영원한 안식을 얻을 수 있게 해 달라는 간절한 바람을 담고 있다. 바로 죽은 사람을 위해 살아 있는 사람이 바치는 기도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레퀴엠을 듣는 이유도 다르지 않다. 비록 죽은 뒤 영혼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상관없다. 죽음이 데려가 버린, 사랑했던 사람들을 위해 잠시 내 시간을 비워낼 수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 죽은 사람을 떠올리는 그 순간, 아직은 살아 있는 내가 이미 죽은 사람과 이어지는 길이 열린다. 이 길을 조용히 거닐다 보면, 삶과 죽음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연결되어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된다.
죽은 자를, 죽음을 생각하기 위해서는 쉼 없이 달음박질쳐온 삶에 잠시 제동을 걸어야 한다. 양초에 불을 밝히건, 레퀴엠을 듣건, 뛰어가던 길에서 잠깐 멈춰야 한다. 그러면 우리가 바라보길 꺼려하는 길, 하지만 우리가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이 우리 앞에 펼쳐진다. 우리도 언젠가 앞서 죽어간 사람들처럼 같은 길을 가야 한다. 쉬면서 숨을 고르다 보면, 그 길을 앞서 간 사람이 나를 뒤돌아보며 손짓하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일지도 모르겠다.
이들이 떠나간 길도, 또 내가 걸을 길도 모두 평화가 함께 하기를……. (이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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