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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 한인의 [기록되지 않은 역사] 한문형, 김인순 부부


75년전, 일제에 의해 강제이주 당하고 끝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사할린 한인의 역사와 삶, 그리고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를 짚어보는 “기록되지 않은 역사” 기사를 연재합니다. 최상구님은 지구촌동포연대(KIN) 회원으로 사할린 한인 묘지조사 후속작업, 영주귀국자 인터뷰 등 ‘사할린 희망캠페인단’ 활동을 펴오고 있습니다. - www.ildaro.com
 
서울 등촌동 임대아파트에서 만난 두 사람
 
1994년 한국과 일본은 사할린 한인 영주귀국 시범사업에 합의하였고, 아파트 건설 비용은 일본이, 부지는 한국이 제공하기로 했다. 곧 일본은 예산을 책정했지만, 한국은 부지 선정을 놓고 지지부진했다. 결국 안산 고향마을에 영주 귀국하게 된 것은 2000년의 일이다.
 
그 전에 하루빨리 영주 귀국하고 싶었던 분들은 급하게 임대아파트 1백가구를 서울, 인천, 부천 등지에 마련하여 모셔왔다. 이런 연유로 서울 등촌동 4단지와 9단지에 사할린 동포들이 자리잡게 되었다.
 
영주 귀국한 지역 별로 ‘사할린 동포 모임’이 있는데, 4단지 회장님께 연락을 드리고 한인 1세분들도 같이 만날 수 있었으면 한다고 부탁을 드렸다. 오후 3시경에 찾아갔는데 아뿔싸! 전화통화하면서 착오가 있었는지 1세분들은 한 시간 남짓 우리를 기다리다 가셨다는 것이었다. 죄송하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하여 인터뷰를 시작할 땐 냉랭한 분위기가 돌았지만, 이내 한문형 회장님이 살아오신 이야기를 꺼내니 청산유수 이어진다.

▲ 작년 6월부터 영주귀국한 사할린 한인들을 찾아가고 있는 ‘드림팀’과 한문형 회장님.  © 최상구 
 
일제 시대의 기억, 조선아이들의 마음
 
1933년생 한문형 회장님은 어릴 적 일본인들과 학교를 같이 다녔는데 일본 애들하고 많이 싸웠단다. 당시엔 일본어를 배우기 위해 학교에 늦게 들어온 조선인들도 있어, 덩치 큰 사람도 꽤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뭐 하러 그렇게 때렸는지, 크게 잘못한 것도 없는데. 그때만 해도 쪼금 쪼금 걸리는 게 있으니까 그랬겠지. 그럼 그 사람 아버지가 전화한단 말이요. 누구누구 집 아들이 때린다. 그럼 교장이 불러가지고 우리 아버지 끌려가서 실컷 잔소리 듣지. 자세히 들어봤자 (아버지는) 일본말도 모르지. 그럼 (아버지가) 몽둥이 가지고 내 뚜드려 맞고. 아, 뚜드려 맞았어? 하라쇼(좋았어!). 그 이튿날 이노무 새끼 핵교 끝나고 갈 적에 보자고, 눈에 파묻고. 그 이후로는 일본사람들하고 싸우진 않았어요.”
 
열 살 어린이의 마음에도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던 모양이다. 식민지 시대, 더욱이 전쟁 시대를 살아야 했던 사람들. 그들이 겪는 차별과 억압, 미래에 대한 공포와 불안감 때문 아니었을까? 훗날 듣게 되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들은, 아이들도 내재된 공포와 불안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해주는 것일 지도 모른다.
 
“어머이하고 한 고향 분인데. 일본시대 1942년돈가 1943년도인가. 사할린에서 천도열도(쿠릴열도: 사할린 동부 섬들)로 징용간 거지. 2백여명이 사할린에서 끌려 갔는데, 하루는 아파서 못 견디겠더라. 이 양반이. 사할린에 돌아가겠다 하니까 가라 하드래. 보내주드래. 나중에 들어보니까. 그 양반하고 같이 간 2백여명을 바다로 끌고가 몰살시켰대. 전쟁에서 졌으니까, 밤에 조선사람들 실어가지고 큰 배도 아니고 조그만 배에다 몇십 명씩. (그걸) 봤다는. (이야기를 들었지)”
 
“기다리고 기다리고” 코르사코프의 한인 1세들
 
남사할린 북쪽 우글레 고르스크 탄광에서 일했던 아버지와 가족들은 1945년 해방이 되자 코르사코프로 다 내려왔다. 남사할린 남부 항구 도시인 코르사코프는 홋카이도에서 불과 몇 시간 거리로, 1940년대 말 일본인 귀환선이 왔던 항구이다. 해방 당시 이곳은 아수라장이었다. 도둑배를 타고 일본인들은 마구 나갔고, 남사할린 전역에서 고향으로 가겠다고 몰린 한인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그러나 소련군은 해상을 봉쇄해버렸고, 사할린 점령이 안정화되고서 미-소 협정에 의해 일본인들은 자국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마냥 지켜만 봐야 했던 조선인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한문형 회장님의 부인 김인순 선생님이 말씀을 거드신다.
 
“일본사람들 다 가고. (우린) 못 가니까 홀아비들 앉았다 앉았다. 기다리고 기다리고. 아무 희망이 없으니까 죽는 사람은 죽고. 다른 데로 가는 사람은 가고. 장가를 갈래도 여자가 있어야 장가 가지. 모집으로 다 와서. 러시아 여자들 만나면 돈만 다 뜯기고. 그래 그래 하다가 모집으로 온 사람들은 다 돌아가셨어.”
 
-그분들 초상은 어떻게 하셨나요?
 
“이웃에서 다 했지. 여기서 말하면 복지관이 없지. 젊은 사람들이 댕기면서 친하게 그분네들이 우리 집에 친하게 댕겼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그렇게 하고.”
 
한번은 한문형 회장님이 아버지, 할아버지 다 초상을 치러준 분의 자식이 편지를 했단다.
 
“그분이 어떻게 어떻게 해서 알아서 편지 했드라고. 자기 아버지가 누구누군데, 찾는 분이 한문 모르는 사람이 많잖아요. 한문 읽은 사람이 내밖에 없다고 해서 우리 집으로 편지를 가지고 와요. 내가 초상 치른 사람이다, 그래서 편지했지. 대구로. 내가 당신네 아버지 누구를 초상 쳐서 묘를 만들어 놨다. 그러니까 들어오시오. 그분이 3년 걸려서 모셔갔지.”
 
사할린-일본-한국을 잇는 편지 왕래가 이루어진 것은, 1957년에 일본인 부인과 함께 일본으로 귀환한 박노학씨, 이희팔씨 등의 ‘화태귀환 재일한인회’의 노력으로 가능했다. 여기에 한 회장님도 일손을 보태었다고 한다.

“박노학 회장(화태귀한 재일한인회)이 바로 옆에 살았어요. 코르사코프에서 옆집에 살았어요. 아주마이가 일본(인). (그래서) 일본에 갈 수 있었단 말이요. 박노학 그 사람이 사업상 많이 했지. 편지 보내주고, 다. 사할린에 있는 사람들이 편지를 써가지고 일본으로 해서 대구, 거기로 편지가 왔는데, 이두훈(한국의 사할린 이산가족, 유족 모임 ‘중소이산가족회’ 회장) 그분. 편지가 처음에는 그분이 힘 많이 썼지요. 그후에는 그 당시에 저, 여기서 한문을 써 보내면 한문을 보는 사람 없잖아요. (내가 보고 했지.)”
 
조선사람이 삼판(벌목)을 접수했다!
 
한문형 회장님의 아버지 이야기를 듣다가, 독특한 일화가 소개되었다. 아버지가 일했던 삼판(벌목) 작업장은 조선인이 최고책임자였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젊어서 배운 일이라고 탄광, 아니면 삼판(벌목)이다 보니까. 그 당시에 삼판이 열려서. 그 김동문이라 하시는 분이 그 당시에 우리 사할린 사람들 중에서 공산당원이 됐어요. 공산당증을 받았어. 러시아 사람들한테 아주 친하게 살았단 말이야. 인기가 좋았지. 근데 그 양반이 돌린스크 라이온. 거기 삼판을 받았단 말이야. 그분이 받아가지고. 조선사람. 그곳은 조선 사람의 삼판을 만들었단 말이야. 자기가 두목이 돼 가지고 삼판 4군데인가 5군데를 했어. 하여간 그분은 두목이고 그 밑에 사람들은 일제시대 삼판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사무하고 다했지. 러시아 사람들 하나도 없지.”
 
러시아말 한두 마디 할 때에 벌써 공산당원이 되어 삼판 책임자로 일했다는 김동문. 특이한 건 조선사람들만 고용했다는 점이다. 다른 작업장에 비해 조선사람들에게 급여를 높게 준다거나 하는 특혜는 없었다. 다만 생산량이 다른 곳보다 많아 이름이 나 있었고, 신문에도 나올 정도였다.
 
2세들의 연애담 ‘춤추러 다니다가…’
 
소련 시절의 생활은 소수민족으로, 혹은 적국의 국민이었던 사람들로서 녹록치 않았다. 그래도 사람의 인생에 낙이 없었을까? 먹거리와 두 분의 연애담이 이어진다. 코르사코프 항구도시에 살면서 크랍(대게)는 실컷 드신 모양이다.
 
김인순 선생님이 말씀하시길,
“사할린에서 크랍 같은 거 먹어봤어? 물고기 많이 나오지. 재밌어. 크랍 같은 것은 우리 할아버지(남편)가 애기들 얼마나 많이 먹여 놨는지 이제는 안 먹어. 그때 시절만 해도 보드카 한 병만 줘도….”
 
그러자, 한문형 회장님이 말씀을 이어받으신다.
“어부들이 100% 다 성한 게 아니란 말이야. 다리 부러지고. 그런 거 가지고 술 받아 먹는단 말이야. 예전에 쌀 포대 1백 키로짜리 있는데 거기에 열댓 마리 들어간단 말이야. 그럼 밖에서 깡통에다 삶아가지고. 우리 아들은 크랍 안 먹어요. 사흘에 한번씩 먹었으니. 동네사람들 맛보고….”
 
코르사코프에서 만나 4년 연애를 하고 결혼하셨다는 두분. 어찌 만났는가 했더니 김인순 선생님 말씀이,
“춤추러 다니다가. 그리 만났어요. 둘이 다 반했으니 같이 다녔겠지. 우리 클 때 춤이 유행이었거든. 그 전 우리 위에 사람들은 몰랐지. 우리 때는 직장에 나가서 일도 할 수 있고, 놀러도 다니고 여유가 있었는데. 부모들에게 거짓말하고 영화도 보러 다니고, 애인도 만나러 다니고.”
 
-춤출 데가 있었어요?
“그런 데가 있어요. 그때는 참 재미 좋았어. 도시는 춤추는 데가 있어요. 밖에 8시만 되면 음악 시작하고. 돈 주고.”
 
“한인들은 한배 반, 두배 더 일해야 했어”
 
한 회장님은 처음에는 사진사를 하다가 그 다음에 자동차회사, 조선회사, 그 후에는 자동차회사에 들어가 버스공장 등을 다니셨단다. 사모님은 몇 십 년간 바느질 일을 하셨다. 직장생활에서 차별이 있었는지 여쭈었다.
 
“차별 있었어. 후르시초프 때 중국과 국경분쟁 당시에 뭐라 했는가 하면, 일단 핵교도 없애고 사할린 조선사람들한테 주지 말라고. 높은 일 시키지 말라고.”
 
-빠스포르트(공민증)가 있으나 없으나 상관 없이요?
 
“상관없이. 보통. 우리가 직장에 일해봐서 아는데. 러시아 사람은 일 좀 잘 못해도 대가리 쓰다듬지만, 조선사람은 러시아 사람만큼 일하면 일 못해. 그러니까 그 사람들보다 한배 반 두배 반 더 해야 그 직장에서 붙어서 일할 수 있어. 그런 세월을 30년이나 지냈으니….”
 
공민증이 있어도, 조선인들은 러시아 사람들과 차별을 받으며 억울한 직장생활을 해야 했다고 한다.
 
“직장에서 일하면 무엇이 구별이 있는가? 가만 보면 있잖아요. 일을 만약에 조선사람들이 한배나 두 배나 일 더하면 일 더한 것만큼 돈은 더 준단 말이요. 그거 말고 3년 휴가, 2년 휴가가 있단 말이요. 러시아 사람들은 아주 마 좋은데 공짜로 보낸단 말이요. 조선사람들은 일 더 많이 해도 그런데 못 간단 말이야. 그것이 우리 조선사람들한테 돌아오지 않는단 말이야. 다 마우제들(러시아인) 가져가 불고. 다른 거 일해가지고 돈 타는 거는 자기 일한 것만큼 받는데. 그것이 천불 난단 말이야.”
 
와보니, 한국은 우리가 그리던 고향이 아니야
 
한문형 회장님은 1985년 빼레스트로이카(고르바초프 공산당 서기장이 실시한 사회주의 개혁) 이후 일본 회사에서 통역 일을 한 십 년 하다가 영주귀국을 하게 되었다.

▲ 등촌동 임대아파트에서 만난 한윤형, 김인순 부부. 영주귀국하였으나 자식들, 손주들과 떨어져 살고 있는 사할린 동포들은 이제 "죽을 일이 걱정"이라고 이야기한다.   © 최상구 
 
-처음에 한국으로 들어온다고 했을 때 어떤 마음으로 결정하셨어요?
 
“고향 간다고. 그것뿐이지 뭐. 1945년도부터 한국 나간다고 들었는데. 그래서 밭에서 일하면서도 라디오 방송 듣고. 만날 그랬지. 여기 와보니깐 그렇지도 않거든. 우리가 거기서 생각하던 고향이라는 눈물이 없어져버렸어요.”
 
-어떤 게 가장 많이 다른가요?
 
“하~ 우리는 (거기서) 아주 옛날식으로 살았거든. 여기 와보니깐 너무 앞으로 나갔어요. 친척도 모르고, 한국에 와보니 친척을 모르는 게 영. 옆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지. 우리 아파트 살지요. 아는 사람만 인사하지요. 러시아에서는 아파트 안 살아서 몰랐단 말이야. 그런데 아파트 살아도 옆에 누가 사는지 잘 몰라. 우린 거기서는 안 그래. 무슨 일 있다 하면 막 달려가서. 유즈노, 우글레 조금만 걸리기만 하면 사돈에 팔촌에. 차 타고 가서 잔치도 하고 초상도 치고. 굳은 일은 특별히 더 쫓아다니고 그랬는데. 거기는 우리 조선사람들이 그리우니깐 서로 도와주면서 살고 그랬지.”
 
김인순 선생님도 한마디 하신다.
 
“이제 사할린 가도 한국 다 나와버리고 나니깐, 가서 이야기 할 사람도 없고. 아이들이나 보고. 손녀들이나 보고. 남은 사람들이 참 불쌍하게 됐어요. 나올 수도 없고. 형편에 따라서. 자식 두고 올 수도 없고. 그 모양이니깐. 우리도 한쪽으로는 좋고, 한쪽으로는 답답하고. 10년은 잘 살았는데 이제 앞으론 어떻게 살까. 그런 입장이요.”
 
-한국에선 주로 하루 어떻게 보내세요? 사모님께 여쭤봤다.
 
“하루? 어, 아침엔 일어나믄 운동 할 때도 있고 안 할 때도 있고. 그저 아침 먹고 소제하고 청소하고 이리저리 하다 복지관에서 점심 먹고 그 담에 또 사할린 아주머니들하고 이야기하고 이리저리 하다 헤어지면 집에 들어오면 텔레비전이나 보고 그렇지 머, 그러다 저녁 해먹고.”
 
-경로당도 한국 분들과 같이 다 쓰시고요?
 
“경로당에 가면 우리가 말이 통화가 안돼. 바빠. 암만해도 우리는 우리 자라던 그 습관이 있고 한국 분들은 한국 분들 자라던 습관이 있고, 말도 그렇고 이 정신적이고 무엇이든지 틀려. 대화가 하기가 복잡해. 우리는 일본만도 튀어나오고 다 튀어 나오잖아. 대화가 좀 복잡해. 우리 말할 때 봐, 바쁘게 말하잖아. 사할린 사람 같으면 노국말도 하고, 조선말도 하고, 막 하잖아. 그거 한가지야.”
 
-그러면 친구분들 만날 때 주로 어디서 모이세요?
 
“처음에는 각각 도시에서 왔으니까, 인제 안면 익힐라고 저녁도 먹고, 아침도 먹고 집에 왔다 갔다 했지. 그때만 해도 10년전이니까 젊잔에. 이젠 아픈데 밖에 없으니까 병원이 더 빨라. 이빨 아프지 머 어데 아프지. 그저 병원 쫓아다니다 보면 친구하고 대화할 사이도 없어. 그저 점심 먹고 나면 한 30분 앉아서 누군 아프단다 누군 병원에 갔단다. 누군 어떻단다…. 그러면 각자 자기 집에 가지. 그전에는 힘있을 때는 점심 먹었으면 야, 커피라도 한잔 마시자 우리 집에 가자 이젠 그렇게 못해. 힘이 없으니까.”
 
인터뷰 시작하자마자 한윤형 회장님이 하신 말씀은 다음과 같다. 사할린에서 영주귀국을 ‘고려장’이라 부는 이유를 충분히 알 수 있는 이야기이다. 이 근심을 덜어드릴 해법은 무엇일까?
 
“내가 2001년도에 왔거든요. 근데 뭐이 문제인가 하면, 처음에 올 적에는 좋았는데 이젠 나이가 먹기 시작해서, 내일모래 80인데, 이젠 죽을 일이 걱정이야. 손자 젊은이들이 거기 다 있단 말이야. 어린이들도 다 거기 있고. 합할 형편이 안 된단 말이야. 우리는 이제 어떻게 됐는데 아이들을 여기로 데리고 오려고 해도 한국말 모르지. 거기서 이젠 할 수 없으니 이젠 우리가 도로 돌아가서 죽을 형편이지. 어떤 사람들이야 여기서 죽는다고 하지만. 말이 그렇지, 자식 놔두고 여기서 죽는다고 하는 것도, 한쪽으로 하면 이상하잖아. 그러니까 이제는 하루하루 늙어가니까. 제일 근심이 죽을 일이 걱정이야.”  ▣ 최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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