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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측도, 반체제파도 영토 싸움만 한다”  


2011년 시작된 시리아 내전. 시리아 정부군과 국내외 세력을 포함한 반체제파의 무장 충돌로 사망한 사람은 10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중에는 5천명 이상의 어린이, 3천명 이상의 민간인 여성들도 포함된다. 하지만 시리아 사람들의 상황은 좀처럼 전해지지 않고 있다.
 
올해 3월 시리아에 들어갔던 아시아프레스의 다마모토 에이코 기자가 소식을 알려왔다.


인민방위대의 검문을 거치다

내전 시작 후 2년째를 맞은 시리아. 사망자는 10만명을 넘는 것으로 보인다. 언론은 전투 상황은 보도하지만, 시민의 생활을 전하는 곳은 적다. 올해 3월부터 4월에 걸쳐 나는 해당 지역 주민들의 협조를 구해 시리아 북동부 지역에 들어갔다. 

▲ 검문소의 인민방위대(YPG). 내전이 시작되고 쿠르드 조직의 인민방위대가 북동부 지역 대부분을 장악했다. 카미슐리시 외곽 2013년 3월 하순.  © 촬영: 다마모토 에이코 (전재 불가) 
 
이전 아시리아 제국이 번영했던 지역에 펼쳐진 초원지대. 곧게 뻗은 간선도로를 자동차로 달린다. 몇 킬로미터 간격으로 검문소가 설치되어 있고, 자동소총을 든 병사가 눈을 반짝이며 수상한 사람의 침입을 경계한다.
 
“일본인 여성 기자? 통과하도록 허락하지만, 정부 쪽의 비밀경찰도 있으니 조심하세요.”
 
검문을 했던 사람은 인민방위대(YPG)의 여성병사였다. 인민방위대는 크루드인들의 무장조직이다.  시리아 국민의 10%에 해당하는 쿠르드인은 북부에 많다. 하사카 주의 최대 도시인 카미슐리에는 아랍인보다 크루드인이 많은 지역이다. 이 도시에서 반정부운동을 주도한 것은 크루드인이다.
 
내전이 시작되고 쿠르드 조직의 인민방위대가 북동부 지역 대부분을 장악했다. 공방 끝에 시의 40%를 정부군이, 60%를 인민방위대가 이분하는 형태의 지배 체제에 들어가 긴장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검문소에 선 여성병사(21세)는 스스로 총을 들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여성도 시민을 지킬 수 있다. 언제든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고 이야기했다.
 
난을 구하기 위해 줄지은 여성들
 
아침 5시 반, 아직 쌀쌀한 아침 안개 속에 수백 명의 긴 행렬이 생겼다. 빵집이 열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내전이 확대되며 운송망이 끊기면서 밀가루가 들어오지 않아 주식인 난을 먹을 수 없게 되었다. 매일 아침마다 개점 두세 시간 전에 줄을 서지 않으면 난을 살 수 없다고, 줄 선 여성들은 이야기한다. 

▲ 내전으로 운송망이 끊겨 밀가루가 마을에 들어오지 않게 되었다. 여성들은 매일 아침 2~3시간 줄을 서 주식인 난을 산다.  카미슐리시, 2013년 4월 초순.   © 촬영: 다마모토 에이코 (전재 불가) 
 
시장에 가보니, 물건은 팔고 있지만 사는 사람은 적었다. 토마토나 오이의 가격이 두 배로 뛰었다. 가솔린이나 의류 등 일용품의 가격도 치솟아 월급이 20만~30만원인 일반 가정에서는 사기 어려운 물품이 되었다.
 
시장을 지나는 사람에게 말을 거니, 모두가 두려워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대답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시민 한 명이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말하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모여들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정부 측도 반체제파도 영토 싸움만 한다.”
“우리들은 버려졌고 기댈 곳이 없다.”
 
내전은 국토를 쪼개는 것뿐 아니라, 시민들의 생활도 무너뜨리고 있었다.
 
“친구들을 만나고 싶어요. 유일한 소원이에요”
 
나는 그 지역 사람의 집에서 묵었다. 디로판 씨(36세, 남성)는 잡화점을 운영하는데, 그것만으로는 가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어 택시운전 일도 시작했다. 하지만 “이제는 한계”라고 말하며 한숨을 쉰다.
 
전기가 공급되는 것은 하루에 저녁 1시간뿐. 그 사이에 텔레비전을 켜고 외국의 아랍계 위성 텔레비전 방송국의 뉴스를 보고서야 자국의 상황을 안다. 전기가 없으면 수도 공급도 끊긴다. 아내 린다 씨(28세)는 1시간 동안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을 할 수 있는 만큼 모아 취사와 빨래를 하고 있었다.
 
큰딸인 헤이만느(초등학교 3년)는 방에서 조용히 공부를 하고 있었다. 많은 초등학교가 내전의 영향으로 1년 이상 폐쇄된 상태다. 헤이만느는 집에서 친척에게 공부를 배우고 있다. 

▲ 내전의 영향으로 학교가 폐쇄되어, 초등학교 3학년인 헤이만느는 집에서 친척에게 공부를 배우고 있다.  카미슐리시, 13년 3월 초순.   © 촬영: 다마모토 에이코 (전재 불가) 
 
“빨리 전쟁이 끝났으면 좋겠어요. 학교로 돌아가 친구들을 만나고 싶어요. 그게 유일한 소원이에요”.
 
카미슐리에는 학교가 재개된 지구도 있지만, 여기에서의 생활을 포기하고 국외로 피난하는 가족도 끊이지 않는다.
 
밤, 마을은 암흑이 된다. 가족들은 손전등 불빛 속에 식탁에 둘러앉는다. 난 위에 딱딱해진 치즈 조각을 얹은 것이 전부인 저녁식사였다.
 
삶 터를 떠나 국외로… 피난민 170만명
 
곤궁한 생활에 힘들어하면서도 카미슐리 지역에는 대공습이 없어 아직 그나마 나은 편이라고 시민들은 말한다. 전투가 격렬한 마을의 주민들은 생활을 포기하고 조금이라도 안전한 장소로 피난해있다. 카미슐리에도 이렇게 피난해온 국내 피난민이 급격히 늘었다.
 
마을에서 30킬로미터 정도 남하하면, 반체제파인 자유시리아군이 지배하는 지역이 펼쳐지는데, 전선에서는 매일같이 정부군과의 전투가 계속되고 있었다. 시의 동부에 있는 병원터에는 피난민 열 가족이 몸을 밀착하고 있었다.
 
지역의 지원 조직에서 빈곤 가정용 쌀이나 기름, 설탕 같은 것을 담은 식료품 바구니를 피난민과 나누고 있다.
 
동부 데리졸 주에서 피난해온 여성(34세)과 가족은 자신들이 살던 지역에 자유시리아군이 진입한 탓에, 정부군의 폭격을 받았다고 한다. 친척 세 명이 죽었다. “장례식도 치르지 못한 채 집과 가구도 그대로 두고서 도망쳤다. 언제까지 이런 생활이 계속될지 불안해 견딜 수가 없다”고 힘없는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기독교인도 가혹한 상황에 놓여있다. 자유시리아군 내에는 과격한 이슬람교도도 있어, 기독교인 시민이나 교회가 공격 당하는 사건도 빈발하고 있다. 아사드 정권이 붕괴된 후에는 종파 항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은 속속 해외로 피난하고 있다. 주변 국가로 대피한 피난민은 시리아 전체에서 170만 명을 넘었다.
 
전쟁은 인간의 목숨을 빼앗고, 상처 내고, 그곳에 있는 사람들의 생활을 파괴한다.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도 갈기갈기 찢는다. 지금도 계속되는 살육과 파괴 속에서 시리아 사람들은 전화의 공포에 떨며 한 줌의 물자로 목숨을 이어가고 있다.  ▣ 다마모토 에이코 (아시아프레스 소속 프리랜서 기자)
 
※ <일다>와 제휴 관계를 맺고 있는 일본의 여성언론 <페민>에서 제공한 7월 25일자 기사입니다. 고주영님이 번역하였습니다.  *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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