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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되지 않은 역사] ‘이중징용 유가족회’ 안명복씨 인터뷰
75년전, 일제에 의해 강제이주 당하고 끝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사할린 한인의 역사와 삶, 그리고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를 짚어보는 “기록되지 않은 역사” 기사를 연재합니다. 최상구님은 지구촌동포연대(KIN) 회원으로 사할린 한인 묘지조사 후속작업, 영주귀국자 인터뷰 등 ‘사할린 희망캠페인단’ 활동을 펴오고 있습니다. - www.ildaro.com
이중징용으로 안타까운 세월을 산 이산가족
20124호선 한대앞역에서 인터뷰 팀원들을 만나 안산 고향마을로 들어섰다. 바로 코앞이다. 그런데 여느 아파트와는 달리 주차장이 텅 비었다. 입주자가 전원 기초생활수급자이니 자가용이 있을 리 없다. 아파트 입구에서 보았던 러시아어 간판과 함께 우리가 ‘다른 공간’에 진입한 것을 실감케 한다.
고향마을. 1994년 한국 정부는 사할린 영주귀국자를 위해 주택과 요양시설 건설에 필요한 부지를 제공하고, 일본 정부는 건설 비용과 정착지원금을 제공하기로 합의했다. 일본은 1995년 건설 예산을 편성하였지만, 한국은 아파트 부지 선정이 늦어지면서 1997년이 되어서야 안산에 500가구 임대아파트를 마련하기로 했다. 그리고 2000년 사할린 동포들이 영주 귀국해 살아가고 있는 곳이다.
▲ 안명복 선생님은 이중징용 관련 자료들과, 가족의 일대기를 집필해 놓은 책자들을 보여주셨다. © 최상구
안명복 선생님은 부친의 이중징용으로 이산가족이 되어, 결국 생전에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된 안타까운 사연을 안고 사신다. 반갑게 우릴 맞으시는 선생님의 얼굴에는 그간의 세월을 가늠하게 하는 깊이 패인 주름살이 보였다. 준비하고 계셨던 한 뭉치의 서류를 꺼내신다. 여러 권으로 되어 있는 이중징용 관련 글들과 기사 모음, 그리고 가족의 일대기를 집필해 놓은 책이다.
간간히 한국 기사들이 보였지만 이중징용과 관련된 자료의 출처는 대부분 일본문서들이었다. (국회 전자도서관에서 ‘이중징용’을 검색했을 때에도 다섯 건이 전부였다.) 우리의 역사적 문제에 대해 한국에서는 그만큼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씁쓸하다.
이중징용. 1944년 우글레고르스크, 샥조르스크 등 사할린 북서부 지역 약 14개 탄광에서 조선인 광부 3천여명이 일본 본토로 다시 징용된 사건이다. 작업장 배치 원칙은 동일한 계열회사였으며, 지역은 후쿠시마, 이바라키, 큐슈(후쿠오카, 나가사키)였다. 일본측 연구에 의하면 실제 이중징용 인원은 3천191명이고, 이들 중 가족이 있는 인원은 1천여명이며, 가족의 수는 3천 5백여명이었다. 나머지 2천여명은 단신자(單身者)였다.
전쟁은 끝났지만, 소련군의 점령으로 해안선이 봉쇄된 사할린으로 극소수의 사람만이 가족을 찾아 되돌아 왔다. 해방 이후 소식이 끊겨버린 가족들이 대다수이다.
13살, 그때 아버지가 한 말씀이 끝인 거라
“고향은 충청도야. 그러다가(1년전 아버지가 먼저 징용가시고) 1940년 6월에 어머니는 어린 우리 형제남매 네 명을 다 데리고서 아버지가 계시는 가라후토, 사할린이란 말이지, 키타네요시 도요하라 탄산으로 오게 되었다. 그러니까 1년 동안 겨울 지나고서 그 다음에 할 수 없이 아버지한테 갔단 말입니다.”
아버지를 찾아 어머니 손을 잡고 간 사할린. 그곳 학교에선 일본 아이들이 조센징, 조선배추라 놀렸고, 먹을 것은 항상 부족했다. 목간통(목욕탕)엔 오십 명씩 들어간 물로 씻으니 오히려 피부병이 생길 지경이었다. 병원은커녕 약조차 제대로 없어 자연적으로 낫길 기다렸다. 안명복 선생님은 그래도 온 식구가 함께 모여 같이 산다는 게 행복했다고 한다.
“그런 고된 생활 속에서도 모든 가족이 모여 슬픔과 즐거움을 나눈다는 것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어요.”
그러나 1944년 9월, 갑작스럽게 가족은 또 이별을 겪게 된다. 이명복 선생님의 가족사를 적은 책자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도야하다 탄산에서만 근 150명의 한인 탄부들이 갑자기 연행되었다. 봇짐 하나만 들고 150명중에 42명은 가족을 도야다 탄산에 두고 끌려간 것이다. (…) 우리는 영원히 아버지를 일본 정부에 빼앗기고 말았다.> (안명복 선생님 가족사를 담은 책자 중에서)
젊은 어머니가 어린 자식 넷을 데리고 남편을 찾아 사할린 땅까지 왔는데, 또다시 이중징용으로 이산가족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후에는 또 못 만났단 말이야. 당시 어머니는 32세의 젊은 여성이고 나는 장남으로 13살이었어요. 그랬는데 아버지는 떠나면서 너는 남자로써 남은 가족들의 책임을 너에게 남기고, 나는 나라를 위해서 떠난다고 하였다. 이것이 마지막 아버지의 유언이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때 아버지가 한 말씀이 끝난 거라. 내 인생에서.”
배고픈 것보다 더 서러운 것은 없다
▲ 인터뷰 팀에게 자신의 가족사를 읽어주시는 '이중징용 유가족회' 안명복 선생님. © 최상구
“나는 그때부터 정말 내가 죽더라도, 죽기 전에 아버지를 찾아야겠다는 그 마음으로 힘을 내서 용기를 내서 살아왔단 말이야. 소련군에 의해 해방을 치렀으나 아버지 소식은 통 알 수 없었다. 소련 땅이 되니까 서신도 못 가고 한국하고는, 북한은 왕래도 하고 서신도 가져갔지마는 우리 한국, 대한민국은 굳게 닫혀서 이제 완전히 아버지를 찾을 수가 없었어.”
가장이 없이 그 혼란기에 살아남기란 처절한 투쟁이었다. 처음에는 사무소에서 청소하고 불 때고 또 여름에는 말을 먹이는 일을 하였다. 그때 받은 돈이 80루불. 이 돈으로 그 많은 식구를 먹여 살리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더욱이 1946년 4월에는 사할린 식량난이 극심했다고 한다. 일제가 실어온 예비(쌀)는 바닥이 났고, 소련의 배급도 충분하지 못했다.
“내가 받은 80루불. 암시장에서 빵 여덟 덩이 살 수 있어요. 두 킬로짜리. 우리말이 무엇이 서럽다 해도 배고픈 것보다 더 서러운 것은 없다, 배가 고파도 누구도 우리를 도와주는 사람 없었다. 생각해보세요. 피난 갔다가 왔지요 살던 나가야(숙소) 들어오니까 아무것도 먹을 거 없지요.”
돈이 없으니 아무것도 살 수 없었고, 배고픈 설움에 시달리며 십대를 보냈다.
<우리 어머님은 남편을 빼앗기고 자기의 귀중한 청춘을 희생시켰으며 우리 형제남매들은 자기 나름대로 아버지를 영원히 떨쳐버리는 비극적인 인생을 살아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아버지 있는 사람들은 소련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졸업하였으며 우수한 인재로 성장하였으나, 우리 형제남매들은 그렇지 못했다.> (안명복 선생님 가족사를 담은 책자 중에서)
“먹지 못해서” 한 많은 세상을 떠난 어린 동생들
어떻게든 아버지의 말씀대로 장남으로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일을 하면서 아버지를 찾겠다는 결심으로 하루하루 버텼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어린 동생들이 아사하면서 사별하게 된다.
“아버지 있는 사람들은 아버지가 돌아와서 먹이고 했지요. 아이들은 아버지 없이는 절대 못살아요. (…) 이런 고된 참지 못할 생활 속에서 나의 14살짜리 여동생과 7살 되는 여동생은 결국 먹지 못해서 한 많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죽었어요. 먹지 못해서 죽었어요. (…) 그들은 아마 저승에서 일본 정부의 잘못을 저승의 영혼들에게 고발하고 있을 것이다.”
여동생들이 죽고 초상을 치렀던 그때의 일을 안명복 선생님은 지금도 사무치게 기억하고 있다.
“여동생 죽을 때에 나보고 장남이라 해서 산에 가서 거기 뭐라 나무 껍데기 대패질 하는 거 그거 모아 놓은 데 불 지르라 해, 불 질러서 집에 와 가지구 그 뼈를 주으러 갔지. 어머니는 그 연기가 꺼질 때까지 울었어. 여동생 죽었다니까 그 때 어떤 중들이 목탁치고, 오쿄. 일본말로 오쿄(불경)라고 합니다. 그래 가지구서 초상 치워 버렸어.”
영혼이나마 아들을 찾아가겠다던 아버지의 임종
▲ 사할린 한인문화센터 앞에 있는 사할린 한인 이중징용광부 피해자 추모비. © 최상구
아버지는 해방 후 1946년에 한국으로 오셨다고 한다. 그러나 이념의 장벽은 가족 간의 서신왕래조차 어렵게 만들었고, 아버지는 결국 사할린에 남겨진 가족 소식을 듣지 못한 채 돌아가셨다. 안명복 선생님은 한소 수교 즈음 1984년 3월 29일에 부친이 별세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서 알게 되었단 말이야. 마침 90년도에 대한적십자에서 친척방문 한다고 우리를 방문시킨 일이 있어요.”
<나는 아버지 산소에 참배하면서 아버지 묘를 끌어안고 아버지, 아버지하면서 목메어 불러봤으나 그 소리는 산을 어루면서 되돌아올 뿐이었으며 전생에 계시는 아버지 목소리는 들을 수가 없었다. 45년 동안 불러보지 못한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자식 명복이가 돌아왔습니다 라고 외쳤으나 아버지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고이 잠든 영원 잠을 계속하고 있을 뿐이었다.> (안명복 선생님 가족사를 담은 책자 중에서)
이때 모국을 방문했던 어머니는 1993년에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현재 유즈노사할린스크에 모셔져 있고, 아버지 산소는 천안의 망향의 동산에 있다. 적십자, 이산가족회 등의 협력으로 1995년에 망향의 동산으로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귀국 후 재혼하여 딸을 두었다. 이명복 선생님의 동생인 것이다. 여동생의 편지에는 평소 술 한잔 안 하셨던 아버지가 술에 취해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고 적혀있다며, 안 선생님은 안타까워하셨다.
<오라버님 전상서. (…) 서로 다른 하늘 아래 살고 있지만 언젠가는 꼭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살았습니다. 살아서는 갈 수 없는 사할린 땅에 죽어서 영혼이나마 내 아들 찾아가겠다고 눈물을 흘리시며 눈을 감으시던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여 가슴이 아프답니다. 평소에는 안 그러시더라도 약주가 거나하게 취하시는 날이면 명복아 명복아 하며 오빠이름을 허공에 대고 부르시다 잠이 드시고 했어요. 그래서인지 얼굴도 모르는 오빠이지만 그 이름만은 결코 생소하고 낯설지 않답니다.> (안명복 선생님 가족사를 담은 책자 중에서)
일본 방문 ‘이중징용 피해자 명단이라도 밝혀달라’
안 선생님은 1990년대부터 이중징용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하였다. 123명의 피해자를 찾아냈고, 1992년 이중징용 광부 유가족회를 만들어 영주귀국하기 전까지 회장을 맡았다.
그런데 안명복 선생님의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로 인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위로금 지급 대상에서는 제외되었다. 사할린 대상자의 경우 ‘1990년 이전 사할린에서 사망해야 한다’는 규정 때문이다. 1946년에 귀국하신 아버지는 해당되지 않았다. 누구를 위한 규정인지 알 수가 없다.
현재 유가족회 회장을 맡고 있는 서정길 선생님은 올해 3월 사할린주 한인회 단체장들과 함께 일본을 방문했다. 지구촌동포연대도 이들과 함께 일본 외무성과 적십자를 찾아가 이중징용 피해자의 정확한 명단이라도 밝혀달라고 호소했다. 형식적인 답변을 듣고 숙소로 돌아온 우리에게 서 회장님은 울분을 토했다.
“이런 일이 있었고, 이에 대해 진상을 밝혀달라고 하면, 최소한 먼저 사과를 해야 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 아닙니까?”
사과조차 않는 일본 정부도, 해괴망측한 피해자 보상 규정으로 유가족들에게 또 한번 아픔을 주는 한국 정부도, 응어리진 역사의 한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에겐 그저 초록은 동색일 뿐이다. (최상구)
※ <사할린 한인 달력 만들기> 해피빈 모금 소식
이 기사 연재는 지구촌동포연대(KIN)의 ‘영주귀국 사할린 동포 인터뷰’ 활동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사할린 동포 희망 프로젝트는 정부 보조가 아닌 시민들의 자원활동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고향을 그리워하며 음력에 맞춰 지내고자 노력해온 사할린 현지 분들에게 선물할 <사할린 한인 달력 만들기> 네이버 해피빈 모금함을 채워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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