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까페 버스정류장] 21. 어느 날, 그가 찾아왔다

경북 상주시 함창읍 함창버스터미널 맞은편에 있는 “카페 버스정류장”.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머무는 이 까페의 문을 연 박계해 선생님은 '학교를 떠나 산골로 들어간 한 여자의 귀촌일기' <빈집에 깃들다> 저자입니다. - www.ildaro.com 
 

“어서 오세요!”
손님인 줄 알고 반갑게 맞는 내 목소리가 쑥스러운 듯 어깨에 멘 가방을 앞으로 돌려 잡는 손이 검은 목장갑을 끼고 있다. 이 무더운 여름날에 장갑이라니. 하지만 그 장갑 덕분에 나는 그가 누구인지를 금방 알아차렸다.     
“실례합니다.”
그는 가스가 새어들 듯 슬그머니 들어 와 엉거주춤 서서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현관에 열 켤레도 넘는 신발이 놓인 것을 보고도 들어왔으니 그의 인사말대로 실례임에 분명하다.
“바빠 보이시네요. 참 다행입니다.”
“네! 좀 바빠요. 바쁜데......”
나 역시 불쾌감을 숨기지 않는 실례를 했다.
 
나는 커피를 내리기위해 점드립을 하고 뜸을 들이는 짧은 틈에 오렌지 주스를 그에게 건넸다.
“제가 지금 좀 바빠서....... 지난번에 산 칫솔이 괜찮더라고요. 그거 주세요. 만원이죠?”
“네, 네, 죄송합니다.”
나는 만원을 건네고 여덟 개의 칫솔이 든 납작한 상자를 받으며 반복해서 말했다.
“다른 물건은 구경할 틈도 없고요....... 오늘따라 바쁘네요.”
바쁘다는 말을 자꾸만 하지 않으면 내가 한가해 질 때까지 기다릴지도 모른다, 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아이구, 좋은 일입니다. 바쁘니까 참 다행입니다. 보기 좋습니다.”
그가 거듭 다행이라고 말하는 것이 왠지 주제넘게 느껴졌다. 지난번에 왔을 때 손님이 없었던 터라 그것이 덕담인 줄은 알지만.
 
그는, 그럼 또 뵙겠습니다, 하고 점잖은 목소리로 말하고 느릿느릿 돌아서 나가더니 신발을 한 짝씩 꿰어 신고 쭈뼛쭈뼛 뒤를 돌아보았다. 얼결에 눈이 마주치자 꾸벅 인사를 하고 뭔가 미련이 남은 사람처럼 잠시 멈춰 있다가 발을 내딛었다. 원래 저렇게 느긋한 사람이구나....... 저 느릿함이 불편했던 순간이 떠올라 미안해졌다.
 
종일 내린 눈이 자동차 문짝까지 막아버린 지난겨울 어느 날이었다. 눈은 영영 그치지 않을 듯 여전히 쏟아졌지만 두어 시간 남은 영업시간을 지키기 위해 문을 닫지 못하고 있는데, 여행객인 듯 커다란 가방을 멘 남자가 들어섰다. 반가운 마음에 재빨리 마른 수건을 가져와 내밀며 일행이 더 있는 지 뒤를 살폈다. 그는 수건을 받는 대신 가방을 내려놓으며 수줍게 웃었다.
 
“죄송합니다만 저는 손님이 아니고요, 좋은 물건이 있어서 구경 좀 해 보시라고 들렀습니다.”
한마디로 잡상인이었다. 김이 팍 새는 순간이었지만 온기를 싹 거두고 재빠르게 서릿발을 세우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게다가 누가 봐도 참으로 한가했으므로 그가 가방 속에서 꺼내 놓는 물건을 고스란히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늦은 시간이라 실례인 줄은 알지만 눈이 많이 와서 장사를 제대로 못했거든요. 오늘 안 얼어 죽으려면 지붕이 있는 방에서 자야 될 것 같은데........”
흐려버린 뒷말은 숙박비가 부족하다는 거겠지.
 
양말, 빗, 손수건, 휴대용 반짇고리, 이쑤시개등과 칫솔이 있었다. 물건은 펼쳐놓았으나 애초에 관심이라곤 손톱만큼도 없었다. 그래도 무언가 하나는 사야할 것 같아서 여행용으로 소비하리라 생각하고 칫솔을 샀던 것이다. 칫솔상자 겉면에 ‘나노덴탈케어’라고 근사하게 씌어있었지만 오전에 번 돈 만원을 그대로 내어준 내 눈엔 메이드 인 차이나만 또렷하게 들어왔다.

마침 연탄난로위에 대추차가 끓고 있었던 게 문제였다. 그는 대추 냄새가 정말 좋다며 물건도 팔았고 하니 한 잔 사 먹겠노라고 했고 나는 차라리 한 잔 대접하겠노라고 했던 것이다. 조금도 흔쾌하지 않은 마음이었지만 차를 팔수도 팔지 않을 수도 없었으니까. 그 대신 그가 떠나기 좋게 테이크아웃 컵에다 차를 담았다.
 
그러나 그는 일어설 생각이 없는 듯 자리를 잡고 앉더니, 검은 장갑을 낀 오른손을 무릎위에 올려둔 채 왼손으로 컵을 들었다. 약지와 새끼손가락이 없는 손이었다. 나는 살짝 당황했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아, 정말 맛있습니다. 진하고 달콤합니다.”
“네, 경산대추랍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오른손을 가슴께로 올리더니 손에 관해 이야기를 해주겠다고 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기에 거절을 하거나 그 자리를 피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이런 순간이면 꼭 엄마가 하신 말씀이 떠오르기 때문이었다.
“없는 놈은 쳐다만 봐도 섧단다.”(그 때 나는 학교도 가지 않은 어린 나이였던 것 같은데 아궁이에 불을 때며 그 말을 하던 엄마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하던 것이 잊히지 않는다.)
이 상황에선 들어주지 않으면 섧을 것이 분명했다.
 
“저는 오른손이 없습니다. 이건 인조손이지요....... 남의 일에 무심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어떤 사람을 구하다가 제 몸을 많이 다쳤습니다. 그는 멀쩡한데 나는 병원에서 삼년을 보냈지요. 치료하느라 전 재산이 날아갔지만 결국 손은 건지지 못했고 제 인생은 끝나버렸습니다. 그도 가난한 사람이라 그랬겠지만 모든 게 제 몫이더라고요.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내 고통을....... 아내에게 떠 넘겼지요....... 많이....... 괴롭혔습니다. 오 년 전에 아내는 위암으로 저 세상 사람이 됐습니다. 죽음으로 저에게 복수한 것 같아요. 스트레스로 그렇게 몸을 상한 게 확실하니까요. 그러니 저도 죽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아들 때문에 죽을 수가 없었습니다. 늙은 부모님께 아들을 맡기고 이렇게 발길 가는대로 떠돌아다닙니다. 불효막심한 놈이지요. 처음엔 그냥 미쳐서 돌아다녔어요. 가만히 있으면 죽을 것만 같아서. 이렇게 가혹한 내 인생이 이해가 안돼서요. 나를 더 학대하고 싶어서 거지가 되기로 했습니다. 비웃음당하고 밟히고 썩어 문드러져야 할 것 같았습니다. 아마 아들이 없었다면 그럴 수 있었겠지요. 아들에게 조금이라도 덜 부끄러운 아버지가 되려고, 거지는 면하겠다고 시작한 게 이 짓입니다. 못할 것 같았는데, 시간이 가니까....... 할 만합니다.”
 
그리고 그는 왼손으로 홀더를 연 핸드폰을, 언제나 활짝 펼치고 있을 오른손에 얹어 대기화면을 보여주었다. 지금보다 젊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귀엽게 생긴 여인이 환하게 웃는 얼굴로 어린 아이를 안고 있었다.
“앳되네요. 나이차이가 좀 나는 것 같아요.”
“우린 동갑입니다. 국민학교 동창이었어요. 제 인생에서 뜻대로 된 건 애 엄마와 결혼 한 것 뿐 이었지요.”
“.......”
나는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질문은 긴 꼬리를 가진 답을 듣게 할 것이므로. 그리고 괜한 감상에 빠지고 싶지 않았으므로.
 
“봄이 오면 아들은 3학년이 될 겁니다.”
그는 중얼거렸고, 나는 절대로 말꼬리를 달지 않으리라 마음먹으며 그가 스스로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어나야 되는데, 연탄불이 너무 따뜻해서 엉덩이가 안 떨어집니다.”
그리고 그는 물에 젖은 솜처럼 무겁게 일어나 더디게 신발을 신고 문 앞에서 잠시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그가 연탄불 곁에서 하룻밤만 자게 해달라고 부탁할까봐 서둘러 인사말을 내 놓았다.
 
“눈 길 조심해서 가세요!”
 
그가 눈 내리는 어둠 속으로 스며들자마자 나는 전등스위치를 차례차례 내렸다. 대문 밖, 현관, 이층 홀, 일층 홀....... 그리고 다리가 푹푹 빠지는 눈 속을 어기적거리며 걸어 나가, 쌓인 눈 때문에 잘 밀어지지 않는 대문을 허둥대며 닫았다. 그가 되돌아와서 ‘어떻게, 하룻밤만 좀 잘 수 없을까요’라고 묻기라도 할 것처럼.
 
그날 밤 나는 잠자리에서 조금 뒤척였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지금은 여름이니까 밤을 보내기가 한결 수월하리라.
 
나는 그를 무시하거나 귀찮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남자인 것, 상처가 깊은 사람인 것, 자신에 대해 화가 나 있다는 것 등이, 그리고 세상의 뉴스와 영화들과 경험 속에서 학습된 인식과 선입견 등이 나를 이렇게 못나게 만든 것이다.
 
딱한 일이다.  (박계해)

           - 여성 저널리스트들의 유쾌한 실험! <일다> www.ildaro.com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   2024/1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