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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페 버스정류장] 18. 시 모임이 있는 날
경북 상주시 함창읍 함창버스터미널 맞은편에 있는 “카페 버스정류장”.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머무는 이 까페의 문을 연 박계해 선생님은 '학교를 떠나 산골로 들어간 한 여자의 귀촌일기' <빈집에 깃들다> 저자입니다. - www.ildaro.com
▲ 카페 앞 마당을 가득 채운 푸른 보리밭. 오월, 버스정류장에 봄이 찾아왔다. © 박계해
파란 하늘, 그 속으로 파고드는 새 한 마리, 푸른 보리밭, 보리밭 위를 날아다니는 흰나비, 노란 유채꽃 무리, 그 사이를 쏘다니며 꽃술에 코를 박는 벌들, 새끼를 배어 뱃가죽을 자루처럼 늘어뜨린 고양이, 송홧가루를 안고 내달리는 바람난 바람.......
오월의 카페 마당에는 이렇게 연애질이 한창이다. 비로소 겨울이 완전히 떠나갔다.
나에게 봄은 ‘연탄을 때지 않게 된 때’를 이르므로, 카페의 봄은 오월이다. 작년 11월부터 올 오월 초까지 연탄을 땠으니 반년이 꼬박 겨울이었던 셈이다. 에궁, 노년에는 아무래도 저 남쪽나라로 살러가야지.
오늘은 시모임이 있는 날.
나는 개수대 전면과 정수기 옆면 등, 눈높이 어디쯤마다 깨알 같은 글씨로 시를 적은 포스트잇을 붙여놓았다. 설거지를 하거나 커피콩을 갈면서 시를 마저 외기 위해.
포스트잇을 흘깃거리며 오늘 암송할 시를 외다가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보리밭을 보고는 나도 모르게 지난 모임 때 외웠던 시를 읊고 있었다.
‘밭, 정우영, 암시랑토 않다, 니얼 내려갈란다. 내 몸은 내가 잘 안다. 이거는 병이 아니여, 내려오라는 신호제, 암먼 신호여...... 그려, 내 몸이 곧 밭이랑게........ 긍게로 나를 짠허게 생각하덜 말그라. 느그 어매는 땅심으로 사는 사람이여......... ’
나는 시를 읊다말고 물에 젖은 손을 닦고 핸드폰 버튼을 눌렀다.
“엄마!”
“아, 우리 막내딸이구나.”
“뭐해?”
“아버지랑 고사리 꺾는다. 허리가 둘러빠지는 것 맨치 아프다.”
“그럼 좀 쉬어.”
“쉬면 더 아픈디 머.”
그런 엄마랑 일하지 말라고 실랑이 하는 게 싫어서 전화 걸기도 망설여지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고사리 꺾는다는 말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금침에 누워 창백하게 앓고 있는 대신, 녹차를 따다가, 뱀의 독이 퍼진 어린왕자처럼 그렇게 스러진다면, 고사리를 꺾어 돌아온 밤에 지쳐 코를 골다 영원히 잠들 수 있다면, 엄마는 행복한 사람일 것이니.
6시를 조금 지나자 H가 왔다. H는 멀리 경주에서 온다.
“어머나, 웬일로 한 시간이나 일찍 오셨네요?”
“항상 시간에 대어 오느라 카페를 제대로 못 즐겨서 맘먹고 일찍 나섰지요.”
H는 마당의 비치파라솔 아래 자리를 잡고 앉더니 들고 온 종이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거, 나한테는 영 안 어울리는데 자기한테는 어울릴 것 같아서 들고 왔어요.”
항아리모양의 감청색원피스와 하늘색 목도리였는데 내가 옷가게 할 때 즐겨 팔던 디자인이었다.
“어, 내가 이런 거 좋아하는 줄 어떻게 알았어요? 와우! 지금 입어봐야지.”
나는 호들갑을 떨며 방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면이어서 촉감이 부드러웠다.
“오늘은 제가 일등이 아니네요.”
노래하듯 경쾌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J. 그녀의 어깨에는 오늘도 기타가 들려있었다. 어쩌다 보니 우리는 시를 외다가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심지어는 춤까지도 추게 되어 그녀는 악사로도 활동 중이다.
“지난번에 악보가 없어서 연주하지 못했던 S의 신청곡 악보를 이번에는 몽땅 외워왔어요. 미리 연습 한 번 해 봐야지.”
그녀는 자리에 앉자마자 기타를 꺼내 연주를 시작했다.
H와 나와 새들과 보리들과 유채들과 나무들과 바람과 고양이와, 아마도 땅속지렁이들까지 눈을 지그시 감고 음악을 들었다.
“아, 너무 좋다. 음악회가 열렸네요.”
L의 등장. 나는 L을 향해 손을 흔들며 외쳤다.
“자기는 몇 시간 전에 보고 또 보네요. 반가워라!”
“그러게요, 또 보니까 더 좋다.”
고등학교 교사인 L은 학생 네 명에게 논문쓰기 지도를 하고 있는데 한 달에 두세 번 정도는 우리 카페에서 수업을 한다. 아이들이 교실보다 카페에서 수업하는 것을 너무 좋아한다며. 그래서 4시경에 아이들이랑 우리 카페에 다녀간 참이었다.
“와, 봄은 봄이네요. 아무도 안 들어가고 다 여기 계시는 구나.”
부부인 K와 S의 등장이었다.
“와우~!!!!”
우리는 K의 옷을 보고 감탄사를 내질렀다. 봄을 그대로 몸에다 걸친 듯 풋풋한 진 연둣빛 생활한복 저고리였다. K는 거의 매번이다시피 새 옷을 입고 나타나는데 그건 모두 아내인 S가 직접 만든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그 모든 사랑 중에, 내가 알고 있는 그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아름다운 사랑을 하는 두 사람.
햇살이 스러지며 노을빛이 퍼지기 시작했다. 일곱 시였다.
“자, 다 왔죠? 시작해요!”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만화 <두 여자와 두 냥이의 귀촌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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