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까페 버스정류장] 19. 결국, 비도 그칠 것이다

경북 상주시 함창읍 함창버스터미널 맞은편에 있는 “카페 버스정류장”.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머무는 이 까페의 문을 연 박계해 선생님은 '학교를 떠나 산골로 들어간 한 여자의 귀촌일기' <빈집에 깃들다> 저자입니다. - www.ildaro.com 
 
 

▲ 주인 아주머니가 들꽃을 가져다 주었다. 비에 젖었다.   
 
이틀째 비가 온다. 한낮인데도 어두워 실내등을 켰다. 빗줄기가 흘러내리는 유리창 너머로 둥근 전등 그림자가 달처럼 떠오른다.
 
날씨 탓일까, 점심시간마다 들리는 단골 은수마저 오지 않는다. 같이 마시려고 참고 있던 커피를 한 잔 내린다. 한 모금 마시는데 피아노의 선율이 쇼팽의 녹턴으로 넘어간다.
 
물병자리인 나는(정녕 그래서?) 비와 녹턴과 에스프레소 한 잔이면 허파 가득 바람이 들기에 충분하다. 비바람에 일렁이는 짙푸른 보리밭을 바라보며 슬며시 가슴이 부풀어 오르더니 버스정류장도 기차역도 택시 승강장도 길만 건너면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친다. 생각과 행동이 동시에, 어떨 땐 생각을 맺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이는 나는 벌떡 일어나 딸의 방으로 갔다.   
 
“뭐해?”
딸은 모니터에 눈을 박고 인체 크로키연습 프로그램에서 초 단위로 움직이는 여러 가지 포즈들을 크로키 하고 있다.
“바빠?”
“왜?”
“좀 나갔다 오려고.”
“어디 가는데?”
“그냥, 어디 좀......”
“언제 와?”
“글쎄, 가봐야 알지.”
“........”
“나가지 말까?”
“........”
“응?”
“크로키 하는 것 십 분이면 마치니까 좀만 기다리세요.”
 
이야기를 하는 중에도 눈은 모니터를 보고 있고 손은 스케치북 위를 날고 있다.
 
딸아이는 자신을 과대평가하거나 비하하지도 않고, 오르지 못할 나무를 쳐다보는 일도 없는 현실주의자에다, 밥 잘 먹고 잠 잘 자고 자기 스케줄이 그 무엇보다 우선인 개인주의자다. 하루 종일 골방에 틀어박혀 있어도 그날의 일정이 정해져 있다. 30분짜리 크로키 수업도 매일 한다. 
 
감상에 휘둘려 충동적인 일 따윈 하지 않는 딸의 무덤덤한 얼굴을 본 것만으로도 평정심이 생겨버렸다. 어디를 가서 무엇을 하고 싶은 건지, 뭘 타고 갔다가 언제 어떻게 돌아올 건지를 생각해야한다는 자각만으로도 허파에 가득 찼던 바람이 다 빠져버린 것이다.    
 
“커피 한 잔 줄까?”
“라떼로~!”   
 
딸은 만화를 업으로 삼으려는데 시중에 나오는 월간만화잡지의 공모전에 당선한 것이, 그것도 대상 수상작을 내지 못한 해여서 ‘당선작’으로만 뽑힌 것이 이력의 전부이고, 대입검정고시를 통과한 것이 최종학력이다. 결국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 할 수도 있겠지만 그 과정만큼은 나무랄 데 없이 밟고 있다.
 
나는 어미로서의 역할을 ‘자녀교육에 무심하기’로 정하고 완벽하게 실천해 왔으며 지금은 ‘자녀의 삶에 무심하기’의 경지까지 도달했다. 아마도 내 살림이 좀 넉넉했다면 이런 간 큰 짓을 하지 못했으리라.     
 
어쩌다 아르바이트로 그림 그리는 일감을 얻기도 하지만, 이렇다 할 경제활동을 하진 못하고 있어서 가끔 초조해 하기도 한다. 카페운영을 받아 업으로 삼으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더니 바쁠 때 도와주긴 하겠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싫다고 했다.   
 
일주일에 한 번은 ‘대중스토리 작법’에 관한 강의를 들으러 서울에 가는데 간 김에 서점에도 가고 영화도 보고 콘서트 장에 가기도 한다. 그리고 일 년에 한두 번은 친구들과 여행도 하지만, 대부분의 날들을 집의 가장 구석에 있는 작업실 책상 앞에서 보낸다. 
 
검정고시 출신이라 전공분야 운운하며 취업을 할 처지는 못 되고, 품위유지비 들여가며 어설픈 직장에 다니느니 시간이 좀 더 걸리더라도 하고 싶은 걸 하기로 한 것이다.     
 
나의 막역한 친구는 이 상황을 ‘햇볕도 안 드는 구석방에 처박혀서 젊음을 다 썩힌다’ 며, 이십대인 딸을 그렇게 살도록 방치하면 안 된다고, 그 나이에는 연애를 하고 돈을 벌고 세상과 온몸으로 부딪히며 살게 해야 한다고 어미로서의 내 태도를 나무란다. 
 
나도 안다. 그러면 좋다는 것을-. 그러면 좋은 일이 어디 한 두 가지일까.
 
인연이 닿아 운명의 사람을 만나게 되면 하고야 마는 것이 연애고,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 할 처지라면 그 또한 해야만 하겠지만, 전형적인 결혼의 절차를 밟을 형편도 안 되는 데다 당사자가 감지하지 못하는 일에 내가 조바심을 가질 필요는 없으리라.  
 
배우고 싶은 내용이나 과정을 스스로 선택해 온 덕분에 당연히 공부에 대한 거부감이나 의무감이 없는지라 아직도 배울 것이 무궁무진해서 시간 죽이기를 할 틈은 없어 보이니, 딱하기는커녕 슬며시 부러울 따름이다. 게다가 또래들에 비해 교육비를 덜 쓴 만큼 돈을 벌어야 한다는 부담도 덜 가질 권리가 있지 않을까.
 
크로키를 마쳤는지 으따따따, 하며 기지개를 켜는 딸에게 카페라떼를 건넸다.   
“쌩유~, 마암~. 나 머리감고.......”
“마, 됐거덩, 나 안 나가니까 네 일이나 해.”
 
녹턴이 끝나고 에스프레소 잔도 비었다. 결국 비도 그칠 것이다.  (박계해)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만화 <두 여자와 두 냥이의 귀촌일기>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   2024/1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