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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스무살 여연의 공상밥상 (4) 마음 담긴 채소볶음 


제도교육에서 벗어나 홈스쿨링과 농사일로 십대를 보낸, 채식하는 청년 여연의 특별한 음식이야기가 연재됩니다. 갓 상경하여 대도시 서울의 일상 속에서 펼쳐지는 스무살 청년의 음식을 통한 세상 바라보기, 그리고 그 좌충우돌 실험 속에서 터득한 ‘여연표’ 요리법을 소개합니다. www.ildaro.com  

 
엄마의 친구와 나, 우리의 이야기
 
서울에는 내가 알고 지내는 어떤 분이 살고 계신다. 우리 가족의 오래된 친구이고 멀리서 지지해주시는 분이다. 어렸을 때 서울 나들이를 가면 그분은 홍대 근처의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우리가 평소에는 먹기 어려운 케이크를 사준다거나, 숨겨진 작은 박물관이나 공원에 데려가는 식으로 촌에서 온 아이들에게 호강을 시켜주셨다.
 
그분은 시골에 사는 우리 가족에게 늘 선물을 보내주시곤 했다. 카드와 책, 양말, 엄마 눈치를 보며 먹어야 하는 달콤한 군것질거리들. 무려 1,236쪽이나 되는, 집에 있는 책장에서 가장 두꺼운 책인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합본도 이 분이 주신 선물이다. 내가 검정고시에 합격했을 때는 편지와 용돈을 보내주시기도 했다. 

▲ 어머니의 친구분이 가정용 두부제조기로 직접 만든 두부. ©여연 
 
서울에 올라온 나는 그분이 어머니와 살고 계신 집에 몇 번 놀러 갔다. 그러면 그분은 가정용 두부제조기로 직접 두부와 비지를 만들고, 채소를 다듬고 볶아서 반찬을 만들어 싸주신다. 사찰음식을 배우신 적이 있는 그분의 채소볶음에는 아주 단순한 양념만이 들어가지만 감칠맛이 난다.
 
어른과 아이, 혹은 나이 든 사람과 젊은이의 관계는 어찌 보면 참 틀에 박혀 있다. 나는 밥을 얻어먹고, 가끔은 선물을 받고, 어른들의 진심 어린 조언을 듣는다. 어울리지 않는 응석도 부리고, 때로는 애교를 떨어보기도 한다. 어찌 되었건 나는 ‘낯선 세대’이기 때문에 좀 지나치다 싶을 때도 어른들은 너그럽게 받아주신다. 여기서 말하는 ‘낯선 세대’란 같은 문화에 속하고, 같은 기억을 공유하는 친구는 분명 아니란 뜻이다. 그렇다면 나는 언제나 어른들에게서 받는 사람일 수밖에 없는 걸까?
 
그분이 20년째 환경단체 회원이시고, 목수이자 환경에 덜 해를 끼치고 살아갈 방법을 일상에서 연구하고 실천하시는 분이라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리고 십 년도 넘게 직접 일기장을 만들어 쓰셨고, 설거지할 때 비누를 거의 쓰지 않으시고, 고기를 안 드신다는 건 최근에 그분 댁에 놀러 가면서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어른인 그분을 잘 모른다. 가끔 그분이 하시는 짤막한 이야기로 과거를 재구성해 보지만 토막토막일 뿐이다. 나는 그분이 아주 섬세한 사람이라는 걸 알기에, 세상과 타협하는 문제로 힘들어 하셨을 것 같다고 짐작한다.
 
음식을 먹는다는 건 그저 습관의 문제일까?
 
음식 같은 일상적인 문제에서는 누구나 어느 정도의 타협을 하고, 즐거운 식사를 하기 위해 그 타협을 합리화시킨다. 늘 약간 찜찜해하면서 말하지만 내가 하는 채식이 바로 그렇다. ‘생선을 안 먹고는 싶은데 국물로 나오거나 어른이 사주면 먹어요. 달걀이랑 유제품은 빵을 너무 좋아해서 못 끊어요.’ 감히 채식‘주의’ 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사람에게 가장 어려운 게 뭔지 아니? 바로 습관을 바꾸는 일이야. 그중에서도 음식 습관을 바꾸는 게 가장 어렵지.” 몇 년 전 채식 문제에 관해 토론하던 중 누군가 한 말이다.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말은 이상할 정도로 기억에 남았고, 내 머릿속을 헤엄쳐 다니고 있는 말들 가운데 하나가 됐다. 말은 생각을 불러오고,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의문으로 변한다.
 
<그럼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생각하기조차 끔찍한 온갖 일들, 울부짖는 돼지를 땅에 파묻고, 부드러운 육질을 위해 송아지를 거세하고, 스트레스를 받아 서로 쪼아대는 닭의 부리를 자르고. 오로지 생산력과 상품성을 늘리기 위해, 방해되는 모든 것들을 다 무시해도 괜찮다는 논리는 우리의 사소한 음식 습관에서 비롯된 일인가요? 사람들은 기름진 걸 먹어야 배가 찬 느낌이 들고, 고기를 먹어야 힘이 난다고 말해요. 또 몸과 환경에 나쁜 건 알면서도 맛있게 먹어요. 어떤 사람은 밥 먹는 문제로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고 하죠. 보세요, 오늘도 다들 아무렇지도 않게 먹고 있잖아요!’ 이런 생각들이 모여서 지금의 음식문화를 만들어 낸 걸까요?>
 
<음식에 대해서 좋고 나쁘고를 가리는 건 이상한 일이에요. 먹어도 탈이 나지 않고, 소화해 영양분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다 음식인데. 그런데 저는 나쁜 음식과 좋은 음식이 분명하게 갈라지는 세상에 살고 있어요. 마트에 가면 ‘좋은 음식’으로 포장된 식품들이 자신을 사라고 마구 들이대죠. 건강, 웰빙 열풍이 불고 나서부턴 툭하면 ‘순수’ ‘천연’ ‘자연식품’ 기타 등등 좋다는 말은 다 가져다 쓰고 있고요. 딸기과즙 0.4%. 이런 애들도 겉모습만으론 자기가 진짜 딸기주스라고 주장해요. 참. 눈에 보이는 걸 믿는 게 사람의 본능인데 보이는 것과 안에 품은 이야기가 완벽히 달라요. 코카콜라를 보세요. 얼마나 유혹적이고, 얼마나 세련됐는지. 광고의 눈부신 승리일까요?>
 
<이런 유혹들에 순간순간 저항해야 하나요? 깨어 있어야 해요? 그러다간 피곤해서 어떻게 살아요? 과자 봉지 하나를 뜯을 때마다 이 과자에 들어있는 포화지방, 콜레스테롤, 인공조미료, 방부제, 그 때문에 내 몸이 앞으로 겪게 될지도 모를 고통을 떠올려야 할까요? 이 과자봉지가 썩는 데 걸리는 시간, 이 과자로 인해 늘어나는 거대 자본의 착취, 그런 걸 일일이 따지면서 살다가는 머리가 터지고 말 거에요. 가뜩이나 저는 음식에 대해서 죄책감을 엄청 가진 앤데.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이 지금 우리의 문화 같아요. 지식과 정보는 흘러넘치지만 그것들을 자기 삶에서 실천하는 사람들은 근본주의자나 외골수처럼 취급해요. 먹고 쓰고 버리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문화니까요. 그러니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원을 소비할 운명을 타고나는 걸까요?>
 
<사람이 습관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다면,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알면서도 모른 척할 만큼 식습관을 바꾸는 게 쉽지 않다고 그러잖아요. 그런 측면에서 보면 사실 제가 고기를 먹지 않는 것 또한 까다로운 음식 습관에 지나지 않아요. 아토피를 심하게 앓아서 네 살 때부터 채식을 해오지 않았더라면 분명 먹는다는 행위에 대해서 아무런 의식도 없이 살아갔을 거예요. 그걸 아는데 어떻게 제가 채식주의자라고 주장할 수 있겠어요?>
 
음식이라는 '일상의 행복'을 감싸안기
 
나는 대단한 채식운동가가 될 만한 결심을 한 적도 없고 그럴만한 지식도 아직 없다. 생태적인 삶이나 ‘좀 다른 삶'에 대한 긍지는 분명히 가지고 있지만 그 긍지에 근거를 만들어 줄 만큼 충분히 실천하지도 않았다. 주변 사람들은 “에이, 아직 뭘 모르는 게 당연하지. 지금은 젊잖아.”라고 말하지만 그렇다고 실수를 할 때 덜 창피하거나, 혼란스러움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길 수 있는 건 아니다.
 
처음에 음식에 대한 글을 쓰게 됐을 때 솔직히 조금 곤혹스러웠고, 내가 글을 쓸 거리가 이것밖에 없다는 게 부끄러웠다. 음식을 만드는 건 시험이나 자격이 필요한 일도 아니고, 수많은 사람이 이미 하고 있는 일이다. ‘다들 밥을 먹고 있잖아? 인터넷을 떠도는 수많은 조리법과 사진, 음식에 대한 글들. 도서관과 서점에 쌓여있는 요리책들. 이 틈바구니에서 글을 쓰면 도대체 어떤 걸 내세워야 할까? 스무 살? 혼자 사는 청년? 자연스러운 음식? 채식? 쥐꼬리만 한 농사 경험?’
 
하지만 나는 매일 먹는 음식이 가진 이야깃거리들을 좋아한다. 음식이라는 일상의 행복을 흘려보내지 않고 붙잡고 싶은 마음으로 글을 쓴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한 끼를 먹을 때 아무리 바쁘더라도 끼니를 ‘때운다’고 느끼는 날이 많지 않았으면 좋겠다. 생각하기 귀찮고, 생각하지 않고도 살 수 있는 문제들이지만, 잠시 숟가락질을 멈추고 생각해 보았으면. 밥에 대해 사람들이 서로 나눌 수 있는 이야기들이 많아지길 바란다.
 
다시 그분의 집으로 돌아가 보자. 작은 부엌에서 채소를 볶자 고소한 들기름 냄새가 난다.
 
“그런데요, 똑같은 양념으로 만들어도 제가 만든 음식은 아저씨가 한 것 같은 맛이 나질 않더라고요.” 반쯤은 진심, 반쯤은 아부 삼아 한 말에 그분은 빙그레 웃으며 손을 들어 가슴을 탁탁 두드렸다. 어안이 벙벙해진 나는 몇 초 후에 그 몸짓의 의미를 이해하자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요, 아저씨가 한 음식에 마음이 듬뿍 담겨 있어서 그런가 봐요.” 듣기만 해도 간질거리는 말이지만, 친구 딸에게 싸주기 위해 정성스레 만든 아저씨의 음식에는 이 말이 어울린다.
 
채소로 맛있는 음식을 하는 건 어렵지 않다. 신선한 재료를 기르거나 시장에서 사서 다듬은 뒤에 괜찮은 양념으로 간을 잘 맞추고 적당히 익히면 된다. 조미료를 넣지 않았다고 해서 못 먹을 정도로 심심한 음식이 되지는 않는다. ‘신선한’, ‘괜찮은’, ‘잘’ ‘적당히’ 이 말들에 대한 해석에는 딱히 정답이랄 게 없을 것이다. 자신만의 방법을 찾는 수밖에 없으리라.
 
나는 가공되지 않은 무나 단호박 같은 단단한 채소를 손에 들고 천천히 껍질을 벗겨 써는 일을 좋아한다. 음식을 할 때 되도록 ‘캔, 비닐포장, 플라스틱 용기’에 든 재료는 사용하지 않으려 한다. 소금 대신 간장으로 간을 맞출 때가 많다. 사소하지만 이런 습관과 약속들이 내가 음식을 하는 행위에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넉넉한 시간을 들여 음식에 이것저것 넣으면서 천천히 요리할 때, 나는 가장 행복하다.
 
<아저씨의 마음 담긴 사찰음식풍의 채소볶음>

▲ 사찰음식풍의 채소볶음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단호박 당근볶음, 고구마 견과류 볶음, 새송이버섯 양파 볶음)     ©여연  
 
단호박 당근볶음: 단호박은 씨를 빼고 주사위 모양으로 먹기 좋게 깍둑썰기를 한다(껍질은 벗기지 않는다). 당근은 반으로 잘라서 납작납작하게 썰어놓는다. 채소를 써는 동안 냄비에 물을 끓여놓는다. 물이 부글부글 끓으면 소금을 넣고 단호박과 당근을 넣고 살짝 데친 다음 찬 물에 헹궈 체에 밭쳐놓는다. 집간장, 매실액, 조청이나 물엿을 넣고 섞어서 양념을 만든다. 팬 들기름을 두르고 단호박과 당근을 넣어 말랑말랑해질 때까지 볶다가, 만들어 놓은 양념을 넣고 뒤적거려 충분히 간이 배어들면 불을 끄고 깨를 뿌려 마무리한다.
   
• 고구마 견과류볶음: 고구마를 잘 씻어서 껍질 채 한 입 크기로 잘라놓는다. 땅콩과 해바라기씨도 물에 한 번 헹궈서 체에 받쳐놓는다. 끊는 물에 고구마를 넣고 잠시 삶아서 건진다. 팬에 들기름을 두르고, 건져놓은 고구마를 넣어 볶으면서 소금으로 간을 맞춘다. 잠시 후에 견과류를 넣고 또 볶다가, 조청이나 물엿을 넣어 반지르르하게 만든 다음 불을 끈다.
 
• 새송이버섯 양파볶음: 새송이버섯을 씻어서 반으로 잘라 어슷어슷하게 썰어놓는다. 양파는 껍질을 벗겨서 버섯과 비슷한 크기로 자른다. 팬에 들기름을 두르고 새송이버섯과 양파를 넣은 다음, 간장과 매실효소로 간을 맞추고 노곤해질 때까지 볶는다. 마지막에 파를 썰어 넣고 깨를 부린다. 

            * 광고없이 독자들의 힘으로 운영되는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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