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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되지 않은 역사] 다시 찾은 사할린 방문기 

 
75년전, 일제에 의해 강제이주 당하고 끝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사할린 한인의 역사와 삶, 그리고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를 짚어보는 “기록되지 않은 역사” 기사를 연재합니다. 필자 최상구님은 지구촌동포연대(KIN) 회원으로 사할린 한인 묘지조사 후속작업, 영주귀국자 인터뷰 등 ‘사할린 희망캠페인단’ 활동을 펴오고 있습니다. www.ildaro.com 

▲ 바다까지 얼어버린 우글레고르스크항 © 최상구 

십 년도 넘게 입지 않았던 내복을 입는다. 새로 산 방한화를 신고 일어난다. 사할린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음력과 절기 표시가 된 달력이 들어있는 가방을 끌고 공항으로 향했다. 이 달력은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일행 모두 150부 정도씩 가져갈 수 있었다.

 
두 번째 사할린 방문. 1월 18일 전후 풍설이 몰아쳤던 사할린은 영하 32도, 36도에 달했다. 하지만 24일 막상 도착하니 영하 14도에 맑은 날씨. 그렇게 여정은 시작되었다. 

조선인 이중징용 역사의 장소, 우글레고르스크

사할린 주의 수도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약 390km 떨어진 ‘석탄의 도시’ 우글레고르스크. 철도가 없는 관계로 차로 4~5시간 거리이다. 여름 비포장도로는 6~7시간 걸리지만, 겨울에는 눈과 빙판이 마치 포장도로 역할을 하여 오히려 시간이 단축된다. 작년 삼성물산이 지분 50%를 넘겨받은 우글레고르스크 항은 바닷물까지 얼어있었다.
 
우글레고르스크는 일제가 이 지역 탄광 14개를 폐쇄하고 일본 본토로 3천여명의 한인을 끌고 가 이중징용을 했던 곳이다. 이중징용 당한 아버지 안치문 씨의 메모를 보여준 안복순(1934년생)씨도 직접 뵐 수 있었다. (2012년 12월 17일자 “이중징용, 떠난 자와 남은 자의 고통” 기사에 나와있다.)

▲ 인터뷰 응해주신 어르신들. 오른쪽부터 이정희, 안복순, 김인순님 © 최상구 

이 지역 한인 회장인 최종한씨 덕분에 안복순 어르신뿐만 아니라 관련 증언을 해주신 분들을 만났다. 우리를 흔쾌히 하룻밤 재워주신 이정희(1932년생)님, 위트 있는 말씀으로 인터뷰 분위기를 주도하신 김인순(1934년생)님 등.
 
특히 김인순 님은 일본군에 의해 부상을 당한, 같은 부락 어르신에 대한 증언도 해주셨다. 일본군도로 목을 내리쳤지만 쇄골에 맞아 목숨을 건졌다는 그 어르신은 몇 해 더 사셨다고 한다. 지역 별로 해방 후 사할린 한인의 피해에 대한 구체적인 조사가 필요함을 다시 한번 느낀다.

귀향할 수 없었던 한인여성들의 러시아 생활 

▲ 이번 여행의 방문 지역들     
 
고향으로 가는 길이 막힌 이들은 지금까지의 세월을 어떻게 보내셨을까?

대부분 여성들은 바느질 공장에 나가서 일을 하셨다. 20년을 근무하면 연금을 받게 되는데, 지금은 이 연금으로 생활을 꾸리고 계신다. 사할린 지역은 5년 빨리 연금이 지급되기 시작한다. 위험한 탄광 일을 하거나 오지에서 일한 것에 대한 배려로 보인다. 특이한 것은 자식이 많으면 인센티브가 있다는 점. 5명 이상 자식을 낳으면 연금을 더 받을 수 있다. 러시아인들에 비해 다산을 하였던 조선인들에게는 유용했으리라.
 
또, 여성들은 소련 시절 각종 나물과 해산물들을 직접 채취하여 먹기도 하고, 바자르(시장. 공식 시장은 아니고 일종의 노점상 형태)에 내다 팔기도 하였다. 텃밭에서 키운 채소와 꽃들도 팔았다고 한다.
 
조개, 게, 오징어와 일부 생선은 러시아인들이 처음에는 먹지 않는 것이 많았다. 고사리나 머위줄기 역시 그러했다. 그러나 한인들이 거주한지 70년이 지난 지금은 러시아인들도 봄철엔 고사리 캐러 산으로 가고, 겨울 전에는 김치를 담근다고 한다. 러시아식 식당은 대부분 카페테리아인데, 오징어무침이나 나물을 흔히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재래식 시장이나 마가진(상점)에서도 담근 김치나 나물 종류들을 쉽게 구할 수 있다.

이제는 자식들과 손자, 손녀들 안부 전화가 즐거우신 어머니들. 사할린 지역에서는 스무 살 무렵이면 결혼을 하기 때문에, 증손자까지 있는 분들도 많다. 허나 남편들이 대부분 먼저 세상을 떠나 지금은 거의 혼자 지내신다고 한다. 더욱이 이제 연세도 들고, 병환도 깊어 바깥출입이 어려운 독거노인들이 계신다.
 
이분들에게 유일한 낙이 TV에서 보는 KBS프로그램이었는데, 최근 KBS송출이 중단되고 아리랑TV가 나온다. (우리나라로 치면 지역 유선방송에서 편성된 채널이다.) 우리를 만나자 마자 하신 말씀이 ‘KBS 나오게 해달라’고 할 정도로 매우 답답해하셨다. 풍설이 몰아치면 사람 허벅지까지 눈이 쌓이는 곳에서 홀로 계신 분들이 집안에서 시간을 보내기란 여간 지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좋아하는 TV 프로그램마저 안 나오니 오죽 하실까.
 
우글레고르스크에서 돌아와 사할린 우리말 방송국과 한인회 등에 알아본 결과, 디지털 전환과 관련된 기술 문제와 비용 문제가 있다고 했다. 유즈노사할린스크의 유선방송에는 현재 KBS가 나온다. 문제는 지역 유선방송마다 설비를 갖추어야 KBS송출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대한민국 영사관과 사할린주 한인협회와 정왈레리 주의원 등이 블라디보스톡에 있는 본사와 협의 중에 있다고 한다. 아무쪼록 조속히 해결되기를 기원한다.
 
사할린 곳곳, 우리 문화를 지키려는 흔적들 

▲ 넉넉한 인심의 점심상. 조영재 어르신 댁 © 최상구 
 
수도 유즈노사할린스크에 다시 돌아오니 눈이 더 쌓였다. 우리가 우글레고스르크 지역을 다닌 이틀 동안 이곳에 풍설이 몰아쳤다고 한다. 시외버스 종점에서 바로 보이는 레닌 광장에는 얼음조각들이 놓여있었다. 뱀의 해라 그런지 긴 뱀 모양의 조각도 보였다.
 
샤슬릭(돼지고기, 혹은 양고기 꼬치구이)으로 저녁을 먹고 숙소인 민박집에 도착했다. 식사를 하고서 도착한다고 말씀 드렸지만, 민박집 어머니는 간식을 준비하고 기다리셨다. 넉넉한 인심은 꼭 우리네 옛 시골인심과 판박이다. 사할린 방문 일정 내내 한인들의 인심 때문에 ‘머슴밥’을 먹어야 했다. 서울서 온 우리는 그저 날 추운데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한 자식들이요, 조카들이었다.
 
북위 50도 옛 남사할린의 국경 가까운 지역인 보쉬니야코보에서 만났던 조영재(1932년생) 어르신은 소련군이 오던 날의 상황을 생생히 전해주셨다. 손이 떨려 수저를 잘 못쓰셔서 식사를 거의 못하셨지만, 우리에게 한마디라도 더 해주려 하셨다. 빼치카로 난방을 하는 1950년대에 장만한 집에서 느낀 훈훈함은 석탄 때문만은 아니었으리라.
 
돌린스크에서는 제지공장에서 일하셨던 이주호(1923년생) 어르신을 뵐 수 있었다. 연세에 비해 건강한 모습이었다. 부친상을 3년만에 탈상하셨다는 신용식(1937년생) 어르신의 말씀은 놀라웠다. 관혼상제와 음식 등 자신들의 문화를 지키기 위한 노력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만큼이나 커다란 것이었다.
 
코르사코프시에서는 시한인회장 이태준님과 시의원 이정식님께서 곳곳을 안내해주셨다. 제 2외국어로 한국어 수업을 하고 있는 학교를 방문해 교실을 돌아보았다. 1967년도에 폐교된 옛 민족학교가 있던 터와, 한인들이 주로 거주했던 지역 등을 둘러볼 수 있었다.
 
이정식 의원은 현재 사할린주 태권도협회 부회장이기도 하다. 한-소 수교가 되기 전에는 유도와 가라데를 배웠던 이 의원은 수교가 된 후 태권도를 배웠고 자식도 현재 자신이 운영하는 태권도장의 사범으로 있다.

▲ 한국어 수업을 하는 코르사코프 학교 복도     © 최상구 

역사의 매듭 풀기위해 3국 동포들이 모인다
 
일본이 무책임하게 버렸고, 소련이 붙잡아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던 사할린 동포들. 귀환의 꿈이 좌절되면서 이들은 이렇게 60년이 넘게 자신들의 문화를 지키며 꿋꿋이 살아왔다. 그러나 이들의 생생한 역사를 지금처럼 돌아다니며 들을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 이제 대략 1천 여명의 한인 1세만이 사할린 현지에 남아 있다.

옛 사진을 같이 보며 밤이 깊어 가는 줄 몰랐던 이정희님은 “나 죽으면 이 사진은 다 태워버릴 꺼야”라고 하셨다. 시아버지 상을 치를 때 사진이며, 자식들 결혼사진, 졸업사진 등 하나하나가 소중한 과거를 보여줄 수 있는 자료들이다. 이들이 어떻게 소련 시대를 살아왔는가를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들인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다차(일종의 별장)에 있다는 절구와 맷돌 또한 사할린 동포들의 생활사를 알려주는 물품들이다. 그런데 이런 귀중한 사료들과 소장품들이 하나 둘 그 의미를 찾지 못한 채 사라질 위험에 처해있는 것이다. ‘사할린 희망캠페인단’이 지난해 워크숍을 통해 사할린 피징용자 위령시설과 기념관을 건립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길 자체가 없어진 유즈노사할린스크 제1묘지. 정문에서 그저 바라만 볼 뿐이다.   © 최상구 
 
3월이면, 여전히 풀지 못한 역사의 매듭을 풀기 위해 3개국의 한인동포들이 한마음으로 모인다. 한국, 러시아, 일본에서 결성 중인 ‘사할린 한인 문제 해결과 기념관 건립을 위한 75인 추진위원회’ 모임과 결성식을 할 예정이다. 사할린 한인단체 대표단이 일본을 공식 방문하는 일정과 같이한다.
 
십여 년 만에 일본을 다시 방문하는 대표단은, 일본에 제국주의 침략전쟁의 역사적 책임을 묻고 그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요구할 예정이다. 작년 총선 이후 극우성향의 아베 정권이 들어선 일본의 정치 지형은 역사의 문제를 해결하기에 매우 불리해졌다. 아니, 언제 유리한 적이 있었던가. 그러나 우리는 모여서 외칠 것이다. 멈출 수 없는 역사의 외침을. (최상구 / 지구촌동포연대 KIN)
 
     여성주의 저널 <일다> Feminist Journal <Ilda> 바로가기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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