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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되지 않은 역사] 사할린 한인의 영주귀국과정①
75년전, 일제에 의해 강제이주 당하고 끝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사할린 한인의 역사와 삶, 그리고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를 짚어보는 “기록되지 않은 역사” 기사를 연재합니다. 최상구님은 지구촌동포연대(KIN) 회원으로 사할린 한인 묘지조사 후속작업, 영주귀국자 인터뷰 등 ‘사할린 희망캠페인단’ 활동을 펴오고 있습니다. - www.ildaro.com
사할린 한인 문제를 둘러싼 남∙북∙일 트라이앵글
1956년 <일∙소 공동선언>을 통해 일본과 소련이 국교 회복을 하면서, 소련 내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일본인을 포함해 잔류 일본인들을 송환하기로 결정한다. 이에 따라 1957년~1959년 사이 일본인 766명, 일본인과 결혼한 한인 남자 및 가족 1천541명이 일본으로 입국한다.
이 시기에 한인 손정운씨는 일본인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부친 손치규씨도 모시고 입국할 것을 요청하였지만 ‘일본인과 배우자, 자녀’로 한정된 원칙을 들어 끝내 손치규씨는 송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부모 자식 간에 생이별을 강요한 것이다.
한국전쟁 전후로 북한은 사할린 한인들에 대하여 적극적인 포섭 정책을 펼친다. 선전요원들을 사할린에 파견하여 학습조를 만들고, 학습조의 북한 방문뿐 아니라 무국적자에 대해서 북한 국적을 취득하도록 강권했다. 여기에는 북한에서 온 2만6천여명의 파견노동자들을 통제하려는 목적도 깔려있었다.
특히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기회를 줌으로써 많은 수의 한인들이 북한 국적을 취득하고 북한으로 건너가는 이들도 생겼다. 당시 소련에서 대학 졸업장은 곧 취업을 보장하는 것이고, 무국적자인 한인들에게는 입학 시험을 보러 사할린을 나가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젊은이들에게 대학 진학은 매우 절실한 문제였다.
일부의 사람들은 일단 북한 국적을 취득하면 남북이 통일될 때 빨리 고향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이유로 사할린 한인은 한때 70% 가까이 북한 국적 취득율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북한으로 건너간 사람들이 연락이 두절되거나, 가까스로 사할린에 돌아온 이들의 입 소문을 통해 점차 북한 내부의 실상이 알려지면서 나중에는 북한 국적을 포기하게 된다.
한편, 1959년 북한은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재일동포들에 대해서 ‘북송사업’(1959년부터 1980년대까지 진행된 재일조선인 북조선 귀환사업으로 9만 명 이상 이주했다. 북한으로 간 재일조선인 다수가 제주도, 경상도 출신이며, 떠난 이들은 다시 일본땅을 밞지 못하고 있다)을 진행하였다.
북송사업은 한국전쟁 직후에 사회 복구를 위해 노동력이 필요했던 북한과, 패전 이후 재일동포에 대해 지속적으로 민족차별을 자행하고 있던 일본이 이들을 추방하려는 계획과 맞아떨어지면서 이루어졌다. 북한으로선 당시 진행 중이던 한∙일 회담을 방해하려는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재일조선인 북송사업에 대하여 일본이 밝힌 원칙은 ‘거주지 선택의 자유’와 ‘인도주의’였다. 이 두 가지 원칙은 재일동포뿐 아니라 사할린 한인들의 귀환 문제에도 적용되었기 때문에, 한국 정부는 같은 이유로 국제적십자에 사할린 한인 문제를 제기할 수 없었다. 같은 이유로 사할린 한인 문제를 제기하면, 일본에서 벌어지는 북송사업에 반대할 명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송사업이 진행되자, 한국 정부는 거꾸로 이 원칙을 이용해 일본 측에 사할린 한인 문제의 책임을 물으며 귀환을 요구하게 된다. 이는 사할린 한인 귀환 그 자체보다 재일조선인 북송 저지에 더 힘이 실린 것으로, 사할린 한인 귀환 문제는 냉전체제 하에서 남북 대결의 희생양이 되고 만 것이다.
귀환을 애타게 바라는 사할린에서 온 편지들
사할린 현지에서는 잔류하고 있던 일본인마저 돌아가고, 일부 한인들도 일본으로 가는 것을 보면서 남겨진 사람들은 점차 귀환에 대한 요구를 강하게 표출한다. 사할린에서 귀환운동은 1960년대 중엽부터 일어난다. 그러나 단지 개인적인 요구로, 조직적인 활동이나 단체결성 등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허조(토마리시 거주)씨나 김영배씨(코르사코프 거주)가 수십 명이 서명한 귀환청원서를 관련기관에 보내, 두 사람 모두 일본 정부가 입국을 인정하면 출국을 허락하겠다는 사할린주 내무국의 회답을 받았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국적 상실’이란 이유로 입국을 거부하여 귀환이 성사되지 못했다.
▲ 사할린에서 온 편지들 -2012년 8월 국가기록원 전시회.
한편, 1958년 <일∙소 공동선언>으로 일본에 들어온 사할린 한인들 중 박노학, 이희팔, 심계섭씨 등이 주축으로 ‘화태억류 귀환자 동맹본부’(이후 ‘화태귀환 재일한국인회’로 개명)가 결성되었다. 이들은 가진 것 없이 일본으로 들어와 하루하루 힘겹게 살았음에도 일본 국회위원과 적십자사, 부서들을 찾아 다니며 사할린한인의 귀환을 호소했다. 한국 정부와 대한적십자사 등에도 진정서를 제출했다.
‘화태귀환 재일한국인회’는 사할린으로부터 온 편지들을 정리하여 한국에 보내는 활동도 하였다. 국교가 없는 한국과 소련 사이에서 우편배달부 역할을 한 것이다. 이 편지들은 한국에서 박노학씨의 아들 박창규씨가 받아 전달했고, ‘가라후토 억류교포 귀환촉진회’(이후 ‘중소이산가족회’로 개명)가 만들어지면서 이 활동이 이어졌다.
이들을 통해 전달된 편지들로 생사를 확인할 수 있었고, 편지를 받은 면사무소 직원들이 일일이 수소문을 하여 이산가족의 소식을 답장을 통해 알리기도 하였다. 한국에서는 검열을 한 후에야 체신부에서 편지를 받을 수 있었고, 사할린 현지에서는 아예 다 개봉된 편지를 받아야 했다.
1967년에 이르러 박노학씨는 이들 서신을 근거로 1천744세대 6천924명의 귀환 희망자 명단을 완성했다. 이 명단은 한국, 일본, 소련 정부에 제출되어 귀환 협상의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또 박노학씨는 사할린 동포를 위한 방송을 KBS에 호소하여, 1972년부터 매일 밤 사할린에서 들을 수 있는 라디오 방송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민간 차원에서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반공-반일주의가 극심했던 이승만 시절에는 이렇다 할 한∙일 협상의 진전을 보지 못했다. 박정희 대통령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1965년 한일협정 당시 ‘화태귀환 재일한국인회’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사할린 한인의 귀환 문제는 아예 포함조차 되지 못했다.
사할린 한인 귀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
▲ 귀환 희망자 명부 -2012년 8월 국가기록원 전시회.
사할린 현지에서 한인들의 귀환 요구가 날로 높아지자 1970년대에는 소련 정부도 이에 대해 반응하기 시작한다. 앞서 일본인 아내와 일본으로 입국한 손정운씨의 아버지 손치규씨가 1971년 일본을 경유, 한국으로 최초로 귀국하게 된다. 그리고 1972년 조업 중 나포되어 1년 이상 사할린에 억류된 문종하 선장이 송환되는 등 정세의 변화 속에서 사할린 한인의 귀환 문제가 부상하게 된다.
이후 1973년 일소적십자회담에서 소련 적십자사의 토로얀 총재가 사할린 한인 귀환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가 그들의 일본 거주 또는 일본을 경유한 한국 귀환을 허가한다면 그 출국에 협력하겠다고 발언하였다. 이를 계기로 1974년 일본 정부는 47세대 201명의 귀환 희망자 명단을 한국에 전달하고, 이들을 한국이 받아들인다면 대소교섭에 임하겠다고 밝혔다.
한국 정부가 이를 받아들이자 일본은 소련에 출국 허가를 요청하였다. 하지만 돌연 소련 측에서는 사할린 한인의 귀환 문제는 일∙소 간 교섭대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를 거부하였다. 한국 정부가 재일동포의 ‘북송’을 극렬하게 반대했던 것처럼, 이번엔 북한 측이 사할린 한인의 한국 귀환을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이러한 좌절을 겪으면서도 1976년 3월 최정식, 6월 김화춘씨가 단독으로 귀환에 성공하는 사례들이 생기면서 희망은 남아있는 듯했다. 그러나 1976년에는 사할린 한인 귀환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이른바 나홋카 4인의 사례가 그것이다.
소련에서 출국 허가를 받은 황인갑, 백낙도, 안태식, 강명수씨는 가재도구 등을 모두 처분하고, 이웃들과 송별회까지 하고 나홋카로 가서 일본으로 가기를 기다렸다. 일본은 한국 정부의 승인을 기다렸고, 한국에서 허가 통보를 받았을 때는 이미 소련으로부터 받은 출국허가 기간이 지난 다음이었다. 결국 이들은 사할린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고, 3명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뿐만 아니라 1976년 7월에 사할린주 출입국 관리사무소에서는 ‘출국 희망자는 신청하라’는 공고가 나왔다. 수도인 유즈노사할린스크와 홈스크 등 일부 도시에만 이 소식이 전해졌음에도 불구하고 한인들은 새벽부터 줄을 섰다. 그리고 일주일 사이에 800~1천여 명이 접수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사할린주 당국은 예상을 뒤엎는 행렬에 놀랐고, 결국 일부에게만 출국 허가를 내주었는데, 여기에도 북한의 강력한 항의가 작용했다.
이에 격분한 한인들이 시위를 하기도 했다. 이 시위의 주동자로 지목된 도만상(코르사코프시 거주)씨 가족을 포함해 황태룡, 유길수(유즈노사할린스크,) 이창남(홈스크), 김일수(포로나이스크) 등 일가족 총 40여명의 사람들이 체포되어 어디론가 끌려갔다. 북한으로 강제 추방된 것이다.
더욱이 1976년 9월 소련 미그25기가 일본에 착륙하였는데, 소련인 조종사가 미국으로 망명하면서 일∙소 관계까지 악화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사할린 한인들은 귀환에 대한 어떠한 말도 입밖에 꺼내지 못했다. 페레스트로이카를 거쳐 한∙소 수교가 이루어질 때까지.
“아마 여기서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인 가봐”
1950~1970년대까지 한국 정부는 사할린 한인의 귀환 문제는 일본이 책임져야 할 문제이니 전적으로 일본이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반면 일본은 한국인들이니까, 한국으로 가려 한다면 일본을 거쳐갈 수 있도록 소련과 협상해주겠다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소련은 한반도에 있어 유일한 합법 정부인 북한 이외의 정권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와 교섭할 생각이 없었다.
각국의 입장이 팽팽히 맞서는 가운데, 한국과 북한은 재외동포를 자신의 세력 하에 두고자 했고, 상대방의 귀환 교섭을 방해하였다. 재외동포의 운명은 그들을 감싸 안아야 할 조국인 남과 북에 의해 농락당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홋카 4인 중 한 사람인 안태식씨가 사망 직전 고향의 아들에게 보낸 이 편지를 보았다면 남과 북의 태도가 달라졌을까?
“석환에게 … 오랫동안 소식이 없어서 궁금하구나. 이곳 아비는 고향에 돌아가서 너희들을 보고 싶어 견딜 수 없는 심정이다. 힘을 다해서 노력해 봤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보람이 없구나. 날개라도 있으며 날아가겠는데, 가슴만 타지. 아마 여기서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인 가봐. 죽으면 사망날짜는 누군가 전할 것이다. 그런 줄 알거라. …”
* 참고 문헌
-국회 재외동포문제연구회 “사할린 한인귀환을 둘러싼 한일 양국의 교섭과정”
<러시아 재외동포 현안과 과제> 2007.
-성점모 <강제연행 75주년 망향의 반세기, 박노학 회장, 연표> 2012.
-이토 다카시, 김문규 옮김 <사할린 아리랑-카레이스키의 증언> 눈빛, 1997.
-장민구 “사할린(樺太)억류동포실태에 관한 연구”, 동국대 행정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77.
-지구촌동포연대 “제5회 재외동포 NGO대회 in 사할린” 2008.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만화 <두 여자와 두 냥이의 귀촌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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