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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페 버스정류장] (11) 잊지 못할 시월의 마지막 밤 
 
경북 상주시 함창읍 함창버스터미널 맞은편에 있는 “카페 버스정류장” 이야기가 연재됩니다.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머무는 이 까페의 문을 연 박계해 선생님은 “학교를 떠나 산골로 들어간 한 여자의 귀촌일기” <빈집에 깃들다>의 저자입니다. www.ildaro.com

함창은 상주시에 속해있지만 시의 끝에 위치해 있어서, 오히려 문경시에 속하는 점촌이 가깝다. 차로 10분이면 점촌의 상설시장이며 편의시설도 다 이용할 수 있으니, 함창의 상권이 내리막길을 걷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한다.
          
카페를 차릴 때 가장 많이들은 말이 ‘점촌이 코앞인데 누가 함창까지 차 마시러 오겠느냐’는 것이었다. 그 때 내가 한 대답은 ‘점촌이 코앞이면 점촌에선 함창이 코앞이죠’ 였다. 실제로 지금 단골손님은 대부분 점촌에서 오신다.
  
요즘 눈만 뜨면 생기는 게 커피전문점이라는데 점촌도 예외는 아니어서, 특히 시청을 중심으로 빙 둘러서 다양한 카페들이 많이 생겨났다. 그래도 함창까지 우리 카페를 찾아오시는 단골 중에는 시청과 그 산하의 도서관, 보건소, 박물관 등에 다니는 분들이 많으니, 카페란 위치보다 분위기에 대한 취향을 타는 것 같다.
 
그들이 카페를 찾은 것은 초여름 어느 날 오후 일곱 시 무렵이었다. 네 분의 남자와 여자 두 분이 일행이었는데, 제일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남자 한 분이 카페 판매대에 놓여있는 내 책을 발견하곤 여섯 권을 집어 들었다.
 
“<빈 집에 깃들다> 작가님이시네요. 일 다 끝내고 우리한테 오셔서 책에 싸인 좀 해 주세요.”

그리고 지갑을 여는데 곁에서 여자 분이,
“어머, 과장님! 우리 것도 사 주시는 거예요?” 하였다. 그가 과장님인가 보았다.
 
다른 테이블의 차를 다 내고, 그들이 주문한 차를 들고 갔다. 펜 하나를 주머니에 넣고.
 
한 권 한 권 사인을 하고 건넬 때마다 모두 자신의 명함을 주었는데, 한결 같이 ‘문경시청 문화예술과 ㅇㅇㅇ’라고 되어있었다.
 
“우리, 한 페이지씩 맛보기 할까?”
 
과장님이 책을 펼쳤고 그들은 책의 첫 장부터 돌아가면서 읽기 시작했다. 여섯 명이 돌려 읽기를 마친 후 과장님이 작가의 목소리도 들려달라고 하여 나도 한 쪽을 읽었다. 내가 읽기를 마치자 모두 박수를 쳐 주었다. 쑥스러움에 얼른 고개를 숙여 인사하며, ‘황송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하고 농담처럼 얼버무렸지만 내심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그들은 주로 같이, 때로는 다른 분들과 뒤섞여 자주 들렀고 각자 가족을 동반하고 오기도 했다.

과장님은 음주가무보다 차를 마시며 이야기하는 것이 좋다고, 그래서 이 카페의 분위기가 마음에 든다고 했다. 가끔 여직원들끼리 와서 하는 이야기를 들어도 그렇고, 내가 보기에도 한 점의 권위의식도 느껴지지 않는 편안한 분이었다.
 
가을에 그들은 우리 카페에서 단합모임을 한번 갖자고 벼르다가 드디어 시월의 마지막 날로 일정을 잡았다.
 
시월의 마지막 날 밤, 그들은 미리 예약 해 둔 카페 일층 홀에서 케이크를 자르고 샴페인도 터뜨렸다. 술과 안주를 내면서 들은 바로는 몇 가지 축하할 일들이 있는 것 같았고 그 중의 하나는 한 분이 유럽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것에 대한 환영의 뜻이었다.
 
박수 소리가 요란하게 나더니 그날 카페에 처음 오신, 영국 신사같이 훤칠한 분이 기타를 연주하기 시작하였다. 역시나 ‘시월의 마지막 밤’ 전주였다. 곧 모두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
 
나는 바에서 이층의 손님들에게 낼 커피를 내리며 같이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날의 쓸쓸했던 표정이 그대의 진실인가요~”
 
그리고 이어서 한 사람 한 사람이 부르는 노래 소리가 들렸다. 노래가 끝날 때마다 박수소리와 감탄사가 와르르 쏟아졌다. 나중에 들으니 기타를 치는 분이 ‘소문만 기타리스트’였는데 이번에 처음 모두가 보는 앞에서 연주를 한 것이라 한다. 오랜만에 치는 거라 실력이 녹슬었다며 각자 자기가 부를 노래의 악보를 한 장씩 가져 오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여덟 명이 돌아가며 한곡씩 부른 다음에는 우리 카페에 놓여있는 대중가요 책의 노래들을 샅샅이 섭렵하느라 문 닫을 시간이 가까워 왔다. 나는 서비스로 준비한 차를 가지고 들어갔다. 모두들 자리에 좀 앉으라고 성화였다. 나는 건네주는 맥주잔을 받으며 말했다.
 
“오늘은 자정까지 문을 열어드리지요.”
 
과장님이 손사래를 쳤다.
 
“아, 쥔장도 쉬셔야 되고 우리도 출근해야 하니까 이제 가야죠. 자, 그럼 이제 오른쪽 방향으로 돌아가면서 오늘 모임에 대한 소감 한마디씩 발표하고 일어섭시다.”
 
오른쪽 방향으로 돌아가면서 한마디씩 발표하다니, 정말이지 풋풋한 느낌이었다. 듣고 보니 모두 한마디씩 안했으면 서운 할 뻔하였다. 직장 생활 전체를 통해 이런 모임을 가져 본 것은 처음이라고, 별 기대 없이 왔는데 너무 멋진 시간이었다고, 서로에 대해 더 친숙해 진 것 같다고, 이 밤을 잊지 못 할 거라고........ 들 했다. 이야기는 옆길로 새기도 하면서 길어지고 문 닫을 시간은 이미 훌쩍 지나고 있었다.
 
과장님은, 이 공간의 유혹 때문에 이 자리가 있었다며 주인장도 한마디 해 달라 하였다. 나는 음, 음, 하고 장난스레 목청을 가다듬은 후 말했다.
 
“예전엔 공무원이라면, 어딘지 융통성 없고 재미없는 사람들 일거라는 생각을 했거든요. 그런데 계속 만나면서 그 생각은 사라졌고요, 오늘 저에게 카페를 차린 보람을 안겨주셔서 고맙습니다. 자, 계산서입니다.” 그리고는 후렴구처럼, “아싸, 돈이다, 신난다.” 하고 관광버스 춤을 추는 시늉을 했다.
 
모두 까르르 웃으며 주섬주섬 소지품을 챙기고 일어섰다.
 
10월의 마지막 밤이 11월로 넘어가고 있었다.   (박계해)

  * 성주의 저널 <일다> 창간 10주년을 축하하는 독자들의 응원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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