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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까페 버스정류장] (9) 그리운 나의, 조명이 있는 교실 

경북 상주시 함창읍 함창버스터미널 맞은편에 있는 “카페 버스정류장” 이야기가 연재됩니다.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머무는 이 까페의 문을 연 박계해 선생님은 “학교를 떠나 산골로 들어간 한 여자의 귀촌일기” <빈집에 깃들다>의 저자입니다. www.ildaro.com 

햇살과 바람이 좋았던 구월의 어느 토요일.
문을 열 준비를 하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꺅!!! 계해쌤?”
“꺄악!!! 미은?”
“우와, 목소리 기억하시네요?”“우와아~~ 진짜 오랜만이다.”
“여기 괴산인데요, 쌤의 카페는 여기서 얼마나 걸리나요?”
“어머, 괴산? 아마, 한 시간?”
“아, 다행이다. 두 시간 이내의 거리면 들리자고 얘기가 됐거든요.”
“거긴 왜 갔어?”
“전국 연극교사 모임이 있었어요. 우리 10시에 해단식 마치면 바로 거기로 갈게요.”
“진짜? 어머, 진짜?”
 
‘우리’라면 바로, 교사극단 <조명이 있는 교실>의 선생님들.  
진짜 눈물이 났다.
극단의 창립 멤버였던 나는 당시 서른 두 살이었다. 서른두 살…….
학교를 그만 두던 해에 나는 마흔 두 살 이었다. 마흔 두 살…….
그리고 지금 나는 쉰 두 살 이다.
 
서른 두 살의 나와 마흔 두 살의 나와 지금의 나는 전혀 다른 삶 속에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변함없는 사실은 다른 삶 속에서도 여전히 연극으로 아이들을 만나고 있다는 것이다.

까페 버스정류장 박계해

그들은 정오 무렵에 왔다.
같이 연수에 참여했던 다른 지역의 선생님들도 함께 오셔서 모두 스물 세분이었다.
우린 공연을 마치고 무대 뒤에서 파이팅을 외치던 그 순간처럼 얼싸안고 팔짝팔짝, 십년의 시간을 뛰어넘었다.
 
모두 자리를 잡고 앉는데 '대운'은 마치 시집간 딸집에 온 친정아버지처럼 카페 구석구석을 돌아보며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마치 시험을 통과한 학생처럼 후련한 기분이었다. 그는 내가 부산교육연구소에서 학급운영강의를 할 때 수강생이던 인연으로 극단에까지 발을 들인 후배교사였다. 그의 열정과 헌신성은 내 모든 인간관계를 통틀어 손에 꼽을 정도의 것이어서 극단의 운영에 큰 도움이 되었다. 황송하게도 그런 그에게 나는 교사로서의 역할모델 중 한 명이었던 것이니, 나의 느닷없는 귀농이 그에게 적지 않은 충격이었음은 짐작이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간간히 안부전화를 주곤 하던 그는 4년여가 흐른 어느 여름방학에 아내와 함께 내가 사는 곳을 찾아왔다. 우리 집 마당을 들어서던 그의 환한 얼굴이 집 안팎을 둘러보며 굳어지더니 마루 끝에 걸터앉아 눈만 끔벅거렸다. 그의 입에서 금방이라도 ‘이러려고 교직을 그만두고 온 건가요?’라는 말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 때 즈음에 나는 귀농 한지 4년째였는데 경제 상황이나 남편과의 사이 등 어느 것 하나 순조로운 게 없어 막막한 날들을 보내던 중이었다. 한마디로 체면치레를 할 만큼의 자존감도 없는 상태여서, 그저 나의 남루한 현실에 출현한 그의 존재가 빨리 퇴장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리고 오늘, 그는 얼굴가득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던 것이고 나의 무의식은 그 순간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배달되어온 비빔밥을 먹고 차도 마셨다. 일층 홀이 그들의 웃음소리와 이야기소리로 가득 찼고 시간은 과속으로 달렸다. 나는 궁금한 게 많았다.
 
“요즘은 누가 연출해?”
“병욱샘이 주로. 이번에 <그 학교> 공연 다시 했어요. 그 이야기가 아직도 유효하더라고요.”  “맞아, 그 이야기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지. 창단을 했지만 아무도 연출을 할 역량이 못돼서 초빙한 분이 김윤석씨 였는데. 연출력이 뛰어났었지. 난해하거나 단순한 이야기도 꼭 재미있게 만들고 마는 분이었어. 결국은, 뜨데.”
“그랬다면서요? 우리는 그 얘기 듣고 참 신기해했어요.”
 
그랬다. 지금은 우리나라 영화계를 주름잡는 김윤석씨가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내려와 지방에서 시작한 첫 번째 일이 <조명이 있는 교실>의 연출 자리였다. 배우가 모두 교사들이니 연습 시간에 제대로 맞춰 오지도 못하는 답답한 구조 속에서 그는 한 작품에 백만 원 정도의 연출료를 받고 작업에 참여했다. 한 작품을 완성하는데 석 달 정도가 걸리는 구조였으니 월급으로 친다면 삼십 만원 남짓이었다. 아무리 그 시절이었다 해도 돈만 생각한다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때 나는 연습실에 갈 때 어린 아들을 데리고 다녔는데 아들은 대본을 곧잘 외우곤 해서 연습하던 배우들이 대사를 잊으면 큰소리로 대사를 일러주어 우리를 놀래곤 했다.(그러더니 결국 대학에서 연기를 전공하고 있다.) 윤석씨를 포함한 몇몇이 대본수정작업을 핑계로 우리 집에서 밤샘을 하고 논적도 있었다. 어쨌거나 그가 유명해진 덕분에 그런 소소한 기억들도 자랑거리가 되었다.
 
남편과 두 아이의 치다꺼리에 학교생활도 열정적으로 하느라 늘 피로를 호소했던 미은은 그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공부의 끈을 놓지 않더니 지금은 대학에서 강의도 하고 극예술연구소를 차려서 운영하는 등, 퇴직과 동시에 탄탄하게 자리를 잡은 모양이었다.
 
“영철샘 소식은 들었어?”
 
그는 나와 같이 극단 <열린무대>의 ‘교사를 위한 연극교실 2기’로 <조명이 있는 교실>의 창립 멤버이자, 나이며 교직을 떠난 시기도 나와 비슷하고, 무대에도 항상 같이 올랐던 수학선생이었다.
  
“못 들었어요.”
 
그는 귀농을 하고 몇 년 후, 지용샘과 둘이 문경의 우리 집을 찾아왔었고, 얼마 후 중국으로 간 것으로 알고 있다. 중국에서도 몇 번 안부전화를 했는데 거기서 학원강사를 시작했다며 언젠가 우리 창립 멤버 네 명이 모여서 공연을 하자고 했다. 나는 쉽지 않은 일일거란 생각을 앞세우면서도 힘차게 대답했었다.
 
“좋아요! 꼭 그럽시다.”
 
두 종류의 렌즈를 단 두꺼운 안경을 낀 그는 렌즈 하나를 들창문처럼 위로 제치고 대본을 읽었다. 일상 속에서는 어눌하고 표정도 단조로운 그가 무대에만 서면 어찌나 섬세한 연기를 하는지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배역도 맡기만 하면 멋지게 소화를 해냈다. 주변에서 아무리 농담을 하고 낄낄대도 그는 언제나 차분하고 진지했으며, 정말 어떤 연극에서 튀어나온 사람처럼 보였다. 이 자리에 그가 있었다면 그는, 언젠가 꼭 같이 공연을 하자는 약속을 한 번 더 했으리라.
 
다른 손님의 등장으로 내가 자리를 뜨기 전까지 우리는 ‘그 때’ 이야기를 하느라 옆을 돌아볼 짬도 없었다. 나의 움직임을 신호로 모두들 훌훌 털고 일어섰다. 부산으로 서울로 경주로, 심지어 제주도로 가는 분도 있었으므로 시간이 많지 않았던 것이다. 홀에서, 마당에서, 대문 앞에서 악수와 포옹을 거듭하느라 긴 인사를 나누고 모두들 승용차에 올랐다. 차가 한 대씩 멀어지고 드디어는 완전히 사라지도록 나는 손을 흔들어댔다.
 
또 눈물이 났다.  (박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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