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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푯대를 찾아 다시 항해를 준비하며
<선 밖으로 나가도 괜찮아> 정아림이 만난 ‘세 개의 공동체’②
‘여성주의 저널 일다’는 사회가 강요하는 10대, 20대의 획일화된 인생의 궤도를 벗어나, 다른 방식의 삶을 개척해가는 청년들의 시간과 고민을 들어봅니다. 특별기획 “선 밖으로 나가도 괜찮아” 연재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 <일다> www.ildaro.com
스무 살, 짐가방 들고 무작정 상경하다
▲ 고등학교 자퇴 후 지난 4년간, 나는 세 개의 공동체에 몸을 담았고 많은 배움과 무너짐을 경험했다. (정아림, 22세)
인도에서 돌아오며 이제는 홀로 고립되지 않으리라, 사람들과 같이 살리라 다짐했다. 다사다난했던 십대를 떠나보내고 이십 대를 맞이하는 내게는 ‘대학’이라는 이름을 대신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당시 나는 ‘대학 말고 대안 없을까?’ 하는 이상적 고민과, 막연하게 ‘독립과 자유’를 갈망하고 있었다. ‘대학 가서 독립하면 되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대학에 가야 할 그 어떤 이유도 보이지 않았다. 남들보다 늦더라도 정말 하고 싶은 공부가 생겼을 때 가야지, 남들 다 가니까 무조건 가야 된다는 식으로 떠밀려 가고 싶진 않았다.
당장은 집을 떠나는 것, 온전히 내 의지로 사람들을 만나고 사귀는 것이 독립을 의미했다. ‘집을 떠나 다른 사람들과 살겠다’는 목적으로 짐 가방 하나 들고 상경했다. 아는 인맥을 총 동원해 똥배짱으로 신세를 지며 발을 넓히던 중, 연을 맺게 된 영상집단을 통해 한 인문학 공동체와 만나게 되었다. ‘앎’과 ‘삶’을 일치시키기 위해 인문학을 연구하는 공동체! 이곳이다 싶었다.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공부까지 할 수 있다니 일석이조가 아닌가.
당시 제도권 교육과 대학에 불만을 느끼는 내 또래들도 이 공간으로 조금씩 모여들고 있었다. 같이 세미나를 꾸려보자는 제안을 받고 나는 그곳으로 입성하게 되었다.
인문학 연구공동체의 무지렁이
그곳은 한 마디로 삶의 터전이었다. 연구실 식구들과 밥을 해먹고, 공부하러 오는 사람들이 기증한 옷을 입고, 나처럼 서울에 집도 없고 경제적으로 넉넉지 않은 사람들과 적은 월세를 내고 한 집에서 살며 의식주를 해결했다. 원하던 대로 집을 떠나, 사람들과 함께 살게 되었고, 대학이라는 이름을 대신할 대안을 찾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그 공간에서 ‘삶’만 살 뿐 ‘앎’을 구하지는 못했다. 각자의 현장에서 생겨난 문제의식을 가지고, 그 문제에 대한 답을 구하려는 사람들에게 그곳은 소중한 배움터였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물음을 던질 현장도, 문제의식도 없이, 그저 같이 살기 위해 억지로 공부하며 버둥대고 있을 뿐이었다.
▲ 집을 떠나 대학이라는 공간을 대신할 대안공간으로, 인문학 연구공동체에 들어갔다.
철학, 문학, 역사, 사회에 대한 어려운 책들을 읽으면서 경험의 폭을 넓혀가고 있는 거라 믿으며 이해가 되지 않아도 끙끙거리며 부여잡고 있었다. 좋은 책과 좋은 사람들을 수도 없이 만났지만 정작 마음은 답답했다. 연구실 생활 반 년쯤 접어들었을 무렵,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왜 이런 어려운 말들을 밤새 읽고 듣고 쓰고 있어야 되는 건지, 왜 공부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책 속에 아무리 좋은 앎을 담고 있어도, 내 삶에 녹아 들지 못하면 의미가 없었다.
그러던 중 연말 학술제에 올릴 연극을 한 편 준비하게 되면서 나는 답답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철학 책이 아직 어리둥절하기만 한 나와 10대, 20대 청춘들은 연극을 하며 서로 간 많은 촉발이 일어나다. 이성적 사고 밑에 눌려있던 내면의 감정들이 올라온 것이다. 시원했고, 한편으로는 불안했다. 우리들은 연구실의 리듬에서 벗어나 다른 리듬을 만들고 있었다. 마치 기성세대에 저항하는 무리가 된 듯도 했다.
우리는 연구실에서 해야 할 일과 약속을 방기했고, 그런 모습은 어른들 눈에 철이 없어 보였을 것이다. 학술제에 연극을 성공적으로 올렸지만, 그 성공적이라는 것도 우리들끼리 자축하는 것으로 그치고 말았다. 사람들의 반응은 ‘어떻게 <아큐정전>(중국작가 루쉰이 쓴 근대소설)을 저런 식으로 해석할 수 있느냐’ 였다. 학술제가 끝나고도 연극팀을 계속 유지해가고 싶었지만, 그 사이 연구실과의 관계는 불투명해지고 말았다.
인문학공동체 생활 1년이 지나고, 함께했던 20대들 다수는 연구실을 나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물론, 돌아갈 자리가 없던 나는 그 속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저 연극을 했던 것이 좋았을 뿐, 그 후 진로를 어떻게 결정해야 하는가 망설여졌다.
수능 공부를 해서 대학에 들어가 연극을 배울 것인가, 극단에 들어가서 청소부터 할 것인가, 무수한 조언들이 쏟아졌지만 나는 정신이 분열된 것처럼 혼란스러웠다. 공동체를 떠난 서울은 너무나 차가웠고, 소속이 없다는 건 외로웠다.
스물한 살 “사감선생님”
하루라도 빨리 허전함과 무기력함 속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던 중 아버지는 시골에서 대안학교를 시작할 생각을 하고 계셨고,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셨다. 연극에 관한 풀지 못한 숙제들 앞에서 기회가 될 때 많은 경험을 쌓는 게 곧 공부라고 합리화하며, 두 번이나 고배를 마셨던 대안학교에 학생이 아닌 21살 보조 사감으로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그리고 여우 피하려다 호랑이 만난다는 속담처럼 나는 무지하게 어려운 상대들과 맞닥뜨리게 된다.
대안학교에 와서 청소년들과 같이 연극을 해보면 재밌지 않을까 하는 안일한 생각은 아이들을 만나는 순간 깨지고 말았다. 아마 내가 대안학교에 갔었어도 그런 아이들 중 한 명이었겠지만, 마치 밧줄로 꽁꽁 묶여있는 것처럼 보였다. 무기력하고 수동적인 아이들을 보면서, 왜 내가 학교를 나오고 싶어 했었는지 그제야 확실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혼자서 생각하는 법이 서투르고,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탓에 스스로 움직이는 것도 두려워하는 인간을 만들어내는 우리나라 교육의 현실을 보게 된 것이다.
▲ 이제 막 문을 연 대안학교에서 21살 '보조 사감'으로 청소년들과 만났다.
동시에 대안학교가 지향하는 생태적인 삶, 자발적 학습 같은 철학과 눈앞의 현실과의 괴리를 보게 되었다. 철학과 삶을 일치시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아이들과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고, ‘권위’라고는 눈곱만큼도 세울 수 없는 포스에, 나도 내 생활을 챙기지 못해 안달복달하고 있는 상황에서, 사감이란 이름으로 깨우고, 재우고, 없는 놈 찾고, 아픈 놈 약 먹이며 남의 생활을 챙기고 돌봐야 하다니….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내가 누구인지, 뭘 하는 사람인지 망각할 만큼 정신이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잘 때까지 ‘이불은 왜 정리해요? 다시 깔 건데’, ‘청소는 왜 해요? 다시 더러워질 건데’, ‘노작은 왜 해요? 힘든데’ 이런 시답잖은 물음들에 ‘뭣 하러 사냐, 어차피 죽을 건데’, ‘닥쳐’로 초지일관하면서 오로지 나의 목표는 하루하루 버티는 것뿐이었다.
처음 시작하는 학교라 암묵적으로 정해진 틀이나 규칙도 없었고 거의 백지상태였다. 그곳에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가야 하는데 소위 민주주의, 민주정치라고 말이야 쉽지 규칙 하나를 만드는 데도 선생님과 학생간의 회의가 길어지는 게 그렇게 진이 빠질 수가 없었다. 소통불가능이라고 여길 만큼 선생님들의 말은 허공을 맴돌고 있었고, 학생들은 하루도 빠짐없이 사건사고를 터뜨렸다. 처음부터 잘할 수 없다지만, 내 허술하고 부실했던 준비와 안일한 생각은 그만큼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당시 학교에서 적은 일기를 들여다보면 이렇게 적혀 있다.
<“힘들고 괴로움을, 편하지 않은 역동들을 억울해하지 않고, 충분히 느끼며 견디고 살아내면 지금은 좀 어렵겠지만 나중엔 다 좋은 밑거름이 될 거다.” 이런 말을 가끔, 아주 가끔, 삶의 폭이 넓고 풍부한 어른에게서 들으면 좋겠는데, 요즘 내가 애들에게 말하는 주 대사가 되어버렸다. 너무 형식적이고 상투적이기까지 하다. 내가 하는 말에 확신이 서지 않는다. 정말 내가 이러고 있는 게 나중에 도움이 되는 거야? -2011년 9월 15일>
이곳에서도 나는 주체로 살고 있지 못했다. 아이들에게 ‘이 공간의 주인은 너희이기 때문에 주인의식을 가져야 한다’, ‘너의 삶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정작 내 삶은 너무 혼란스러웠다. 사감이라는 역할, 선생님이라는 호칭에 매여 아이들에게 무언가 그럴 듯한 말을 해줘야 할 것 같고, 반듯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 버겁게만 느껴졌다.
상투적이고 깔끔한 말과 모습으로 만나기보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꽤 오래 걸렸다. 그리고 진정한 선생님의 역할은 지시하는 자가 아닌 듣는 자라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처절한 몸부림 끝에 내년에는 떠나기로 결정한 후였다. 교육이란 것도, 아이들과의 관계도, 아는 체 하는 것보다는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먼저 듣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좋았겠지만, 이런 지독한 경험이 아니었으면 영영 깨닫지 못했을 수도 있었겠지.
내 마음 속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이 ‘자유’
▲ 인생의 푯대를 찾기 위해 나는 다시 항해할 준비를 하는 중이다.
이곳 학교에서 작년 말부터 올해 초까지 선생님 셋과 아이들 열세 명은 인도와 네팔로 74일간의 여행을 떠났다 돌아왔다. 여행 이야기만으로 밤새 수다를 떨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에피소드가 있었고, 그 안에서 배움이 깨알같이 쏟아졌다. 마치 전쟁을 치른 것 마냥 혹독했던 시간들만큼이나 끈끈해져 버린 아이들, 선생님들과의 정을 간직한 채 학교를 떠났다. 잘 배우고 닦아서 넓어진 품으로 다시 돌아오리라고 무언의 약속을 했다.
인문학공동체에 있을 때 읽었던 임꺽정 소설을 가지고 아이들과 연극을 만들며, 스스로 혹은 남의 시선들로 묶여진 자의식의 밧줄을 풀어낼 수 있는 역량을 지닌 연극치료사를 꿈꾸게 되었다.
거창에 있는 입체극단에서 프로 배우들과 작품을 함께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석 달간 스태프로 뛰면서 이것저것 거들고, 엑스트라로 잠깐 출연도 하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즐기지 못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았다. 과거를 충분히 정리하고 성찰하는 시간을 가지지 않고서 막 바로 뛰어 들었던 것이 문제였다. 그걸 알고서는 그 후로는 내게 충분한 여유를 주고 있다.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남을 더 생각하느라, 남들과 살기 위해, 나의 기분과 감정을 외면해온 시간들을 돌아보면서 내 맘대로 사는 게 자유가 아니라는 걸 새삼 느꼈다. 맘대로 산다고 하면서 내 맘을 너무 몰라줬던 것은 아닐까. 언제나 남들의 논리, 남들의 시선에 맞춰 살기 위해 아등바등하며 지나온 날들을 떠올리면, 학교를 떠나고 제도권에서 벗어나 대안을 찾는 것이 자유는 아니었다.
어느 곳에서 어떤 일을 하더라도 나의 시선을 가지고 진정 이루어가고자 하는 것을 찾아 나의 이유로 산다면, 비로소 그 어느 곳에 머물러도 공허함을 느끼지 않고 살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의 이유로 사는 것, 막연하게 갈망했던 자유에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다.
나의 시선을 갖기 위해서는 많은 경험들 속에서 부딪히며 몸에 익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말 귀 기울여야 할 것은 내 마음 속 작은 이야기”라는 노랫말처럼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에 충실해야 한다. 자유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니.
이렇게 글을 쓰며 돌아보니 지나온 4년 동안 많은 배움과 무너짐이 있었다. 그 시간들을 보듬으면서 다시 항해할 준비를 하는 중이다. 망망대해에 표류된 배가 아니라 평생을 붙들 푯대를 찾기 위해서. (정아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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