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안전한 곳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꽃을 던지고 싶다] 11. 등굣길에 겪은 성폭력 
 
<여성주의 저널 일다> 성폭력 피해생존자의 기록, “꽃을 던지고 싶다”가 연재되고 있습니다. -> www.ildaro.com
 
4월의 악몽과 상관없이 시간은 흘렀고, 나는 13살이 되었다. 일 년의 시간은 조금은 나를 회복시켜 주었다. 질긴 생명력으로 하루하루 견뎌내는 것에 익숙해지고 있던, 스승의 날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집에 있기가 싫어 그 날도 다른 날과 다름없이 학교 도서관에 가기 위해 아침 일찍 등교를 하였다.
 
학교는 작은 야산 위에 위치하고 있었고, 서울인데도 신생학교여서 4반까지만 있는 작은 규모였다. 조금 멀리 돌아가는 곳에는 집들이 있었고, 학생들이 다니는 길은 집들이 없는 길이였다. 대다수의 학생들처럼 가깝지만 인가가 없는 곳을 등굣길로 삼아 이른 아침에 도서관을 가기 위해 그 날도 학교로 향하였다.
 
이른 아침이어서 풀잎에는 이슬들이 맺혀 있었다. 살아가기에 부끄러우리만큼 눈이 부시게 밝고 아름다운 아침이었다.
 
학교로 향하던 길에 황토색 점퍼에 청바지를 입고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동네주민처럼 여겨졌다. 땅을 보며 걷고 있는 나에게 그 사람은 지나치듯 질문을 했다.
 
“야, 너 보지에 털 났니?”
 
그 사람은 위협이 느껴질 만큼 험악하게 생겼어야 했다. 그러나 그냥 평범하게 생긴 아저씨였다.
 
당혹스러웠다. 무슨 소리지? 위험함이 느껴졌다. 빨리 그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발걸음을 빨리 옮겨가고 있었다.
 
갑자기 얼굴에 통증이 느껴졌다. 그 남자가 주먹으로 나의 얼굴을 가격했다. 그리고 한 손으로 나를 붙잡고 소리를 쳤다. 반항하면 때린다고 위협했다.
 
“너 보지에 털이 났냐고?”
 
대답하라고 다그쳤다. 대답을 하지 않으면 또 주먹이 날라올 것 같았다. 겁이 났다. 대답을 하면 이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나는 두려움에 떨며 대답했다.
“아니요.”
 
그 대답으로 나는 거기서 벗어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 상황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가는 것이었다. 13살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의 대답이 끝나자 그는 나를 끌고 등교 길 옆에 있는 등산로 입구로 향했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으나 나의 입은 두려움에 이미 마비되었고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또한 소리를 지른다 한들 아무도 없을 것이 자명했다.
 
몇 미터 지나지도 않아 방공호가 있었다. 방공호로 나를 밀어 넣었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그 안이 눈에 들어왔다. 두려움 속에서도 나는 주변을 살폈다. 방공호에는 술병들이 어지러이 놓여 있었고, 바닥에는 박스가 깔려 있었다. 어둡고 퀴퀴한 냄새가 더 공포로 나를 몰아넣었다. 무엇보다 폭력이 가해질까 두려웠다. 지겹도록 엄마가 맞는 것들을 보며 성장한 나는 그 누구보다도 폭력에 대한 공포가 심하였다.
 
그 남자는 나를 박스 위에 밀쳤다. 넘어진 나를 너무나 익숙하게 옷을 벗겼다. 나는 두려움에 눈을 감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이미 알 수 있었던 나는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밖은 너무도 적막하다. 지나가는 사람조차 존재하지 않는 그 곳. 나 혼자 오롯이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이 남자가 나를 죽여준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또다시 그 긴 시간을 고통에서 보내고 싶지 않다. 어차피 죽고 싶었던 삶이니. 죽는다면 고통이 끝날 수 있을까? 생각은 온통 죽음에 관한 생각이 가득 찬다.
 
그 남자의 혀가 오랜 시간 내 몸을 탐한다. 역겹고 더럽다. 오랜 시간을 천천히 내 작은 몸에 자신의 페니스를 밀어 넣는다. 허벅지 안쪽에서 불에 데인 것처럼 통증이 느껴진다. 비명을 지르는 것조차 수치스럽다. 입술을 깨물어 비명을 참으려고 하니 비릿한 피 맛이 느껴진다. 아까 주먹으로 맞은 입술이 터진 듯하다.
 
그 남자의 숨소리가 방공호를 가득 메운다. 너무나 적막해서 숨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듯하다. 숨소리마다 나는 하찮은 존재라고 말하는 것 같다. 퀴퀴한 냄새에 땀냄새가 더해지는 듯하다. 역한 기운이 몰려온다. 토하고 싶다. 정신이 희미해진다. 나는 조금 지나면 죽을 수 있을 것 같다.
 
시간이 멈춰버린 듯이 오랜 시간이 지난 것처럼 느껴졌다.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정신을 잃었던 것이다.
 
내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때 나는 혼자 누워있었다.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왔을 때 학교에 등교하는 친구를 만났으니 아마도 한 시간은 족히 흐른 듯하다. 나는 발길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집에는 항상 그렇듯이 아무도 없었다.
 
옷을 입은 채로 욕실로 들어가 샤워기를 틀었다. 통증이 느껴졌다. 빌어먹을 여전히 나는 살아있었다. 튼튼한 신경 줄은 끊어지지 않았고 나는 미치지도 않았다. 그 뒤로 일주일간 학교에 가지 못했으나 아무도 나의 변화를 알아내지는 못했다.
 
더 이상 학교도 나에겐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아니, 안전한 곳이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최근 이 장소를 다녀온 후 오랜 시간 앓아 누웠다. 통계에 의하면 아동성폭력 가해자는 반복적으로 범죄를 저지른다고 한다. 어리석게도 내가 비난 받을 이유는 아니지만, 그 고통이 얼마나 커다랗게 삶을 잠식하는지 알기에 나의 침묵으로 얼마나 더 많은 피해를 만들었을 지 죄의식이 들었다. 나를 비롯하여 또 있었을지 모를 그녀들이 이제는 그 장소가 사라졌듯이 상처도, 죄의식도 사라지기를 바래본다.  (너울) 


    
    * 여성저널리스트들의 유쾌한 실험! 인터넷 저널 <일다> 바로가기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   2024/1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