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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불쌍한 여자 돕자고 하는 거야”
<꽃을 던지고 싶다> 12. 생존자에 대한 편견
<여성주의 저널 일다> 성폭력 피해생존자의 기록, “꽃을 던지고 싶다”가 연재되고 있습니다. -> www.ildaro.com
남들이 당신을 설명하도록 내버려두지 말라.
당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또 무엇을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지를 남들이 말하게 하지 말라.
- 마사 킨더
처음 꿈을 꾸고 난 뒤 상담원 선생님의 권유로 성폭력상담원 교육을 받게 되었고, 성폭력 상담을 하게 되었다. 나는 누구보다도 생존자들의 절망과 아픔을 함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 꿈을 꾸었을 때보다 훨씬 괜찮아 졌고, 처음으로 세상에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죄인처럼 숨지 않겠다고 나를 다독였다. 태어나 처음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선택했고, 잘 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그만두었던 학사 과정도 마치고, 내 삶을 하나씩 회복시키고자 노력했다. 페미니즘은 성폭력 생존자인 나에게 치유책이자 치유를 위한 실천이었다.
여전히 우울감과 두통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다. 페미니즘을 접하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는 살고 싶어졌다. 내가 살아내기 위해 해왔던 방어 기제들은 나를 파괴하는 것이었지만, 나는 나 자신을 용서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상담소에는 여성들만 있어서 내가 상처를 받을 일도, 성폭력에 노출될 일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어느 단체에서 성폭력 상담을 하던 때였다. 성폭력상담원 교육을 받던 한 선생님이 ‘이게 다 불쌍한 여자 돕자고 하는 거야.’ 라는 말을 하였다. 성폭력 피해여성은 불쌍한 여성이고, 자신은 그런 불쌍한 여성을 돕기 위해 상담을 하고자 한다는 것이었다. 그 말이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서 마음을 찢어 놓았다.
과거에 겪은 성폭력 사건은 나에게 더 이상 문제가 아니라고 여겼고, 이제는 나처럼 고통 받는 여성들과 함께 하고 싶다고 일을 시작했던 나를 그 짧은 문장이 흔들어 놓고 있음을 느꼈다.
생존자는 불쌍한 여자도 아닐뿐더러 ‘당신의 동정 따위는 필요 없다’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성폭력 피해자는 그저 ‘불쌍한 여자’인 것인가? 참을 수가 없었다. 그 분이 열심히 성폭력 상담을 하고자 했고 선의를 가진 의미였다 할지라도, 일반 사람들의 생각이 다 그렇다 할지라도, 상담원의 위치에 서게 될 사람이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가끔씩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사람들의 말을 혼자 곱씹으며 상처를 받는 경우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한 번은 영화 <여자, 정혜>를 보고 나서 토론을 하는 시간이 있었다. 정혜라는 인물은 고모부에게 강간당한 기억을 간직한 채, 결혼 후 남편의 첫 섹스에 대한 질문을 받고 설명조차 하지 못하고 신혼여행지에서 결혼을 끝낸, 일상을 참아내는 인물이다.
어떤 선생님이 영화를 보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저런 여자는 결혼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자신의 상처가 극복되지 않은 상황에서 결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 아들이 저런 여자를 만나면 어떻게 해? 내 아들 일생을 망치는 거잖아.’
‘저런 여자’, ‘극복’, ‘일생을 망치는’…. 그 단어들이 머리를 어지럽게 했다. 저런 여자와 아닌 여자가 나뉠 수 있는 것인가? 성폭력 피해는 극복해야 할 장애물인가? 그리고 완전한 회복이란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라는 생각들이 떠올랐다.
자주 힘들어 하는 나에게 위로한답시고 ‘아직도 극복하지 못했어?’, ‘네가 왜 결혼을 안 하는 지, 너의 경험이 그런 선택을 하도록 한 것이 아닌지 생각해 봐’, ‘나도 성폭력 경험했어. 근데 그것이 사회 정의보다 중요하진 않아. 운동을 해야지’ 등의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더 괜찮아지지가 않았다.
화를 내면 당사자이기 때문에 지나치게 민감하다는 말을 들을 것 같았고, 내 생각을 말하면 다른 생존자들에 대한 편견을 갖게 할 것 같았다.
성폭력 생존자는 ‘불쌍한 여자’, ‘자신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한 여자’라는 편견을 만나게 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생존자들을 향한 편견은 너무도 흔한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그 사람의 의도와 상관없이 배척당하는 기분이 든다.
성폭력이 난무하는 사회에서 성폭력 기사에 달린 댓글에도, 성폭력 사건에 대한 판결문에서도, 그리고 가해자들의 말 속에서도 생존자들에 대한 편견은 항시 존재했다. 피해자에게 부당하게 책임을 전가하거나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는 말들, 즉 2차 가해는 성폭력의 경험만큼이나 나를 힘들게 했다.
생각해보면 그 당시에 나를 힘들게 했던 ‘불쌍한 여자’라는 말이 틀린 표현이 아닐 수 있을 것 같다.
<잡년행동>의 블로그에 실린 이 글처럼.
“성폭행이 개인의 불행과 불운으로 돌려지는 사회에서, 성폭행의 원인이 피해자에게 물어지는 상황에서, 성폭행이 오락과 흥미거리가 되는 사회에서, 모욕적인 시선과 의도적인 접촉이 용인되며, 성폭행이 난무하는 사회에서.”
성폭력 피해자도, 성폭력을 의식하는 모든 여성들도 불쌍하게 만들어버리는 사회인지도 모르겠다. 성폭력이 사회 구조의 문제로 인식되고, 성폭력의 책임을 가해자에게 묻고, 성폭력이 범죄로 다루어지고, 타인에 대한 모욕적인 시선과 의식적인 접촉을 용인하지 않는 사회가 온다면 더 이상 나는 ‘불쌍한 여자’가 아닐 수 있을 것 같다.
‘남들이 당신을 설명하도록 내버려두지 말라.’ 마사 킨더의 말이 더 의미 있게 다가온다. 다른 사람들에게 함부로 판단되지 않기 위해, 나의 경험이 불쌍한 여자로 동정 받는 것을 거부하기 위해, 나는 그래서 오늘도 기록을 한다. (너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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