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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
<선 밖으로 나가도 괜찮아> 정아림이 만난 ‘세 개의 공동체’① 
 
[‘일다’는 사회가 강요하는 10대, 20대의 획일화된 인생의 궤도를 벗어나, 다른 방식의 삶을 개척해가는 청년들의 시간과 고민을 들어봅니다. 특별기획 “선 밖으로 나가도 괜찮아” 연재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일다> www.ildaro.com]

고등학교 자퇴 후 지난 4년을 돌아보며  

▲ 정아림(22) "고등학교 자퇴 후 지난 4년간 방황하고 스스로에게 질문하며 조금씩 '나'와 가까워졌다." 
 
‘어느 대학 어느 과에 다니는 누구입니다.’
이 한 문장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게 많겠지만, 그렇게 간략하게 소개할 수 없는 까닭은 나는 대학에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어느 소속도 가지고 있지 않다. 이 사회가 보기에 ‘청년백수’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고등학교 자퇴 후, 지나온 4년 동안 인도에서의 자원봉사, 인문학연구실, 대안학교, 극단 등 많은 소속들을 거쳐 바쁘게 달려왔다.
 
나의 다음 걸음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그 선택이 대학이던 대안이던 간에 중요한 것은 한 가지 길로의 오랜 걸음이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길을 찾아 훌훌 떠날 수 있는 가벼움도 좋지만 한 길에서 오래 머물며 깊게 느끼기 위해서는 엉덩이심도 필요하지 않을까. 4년간 발품을 팔면서 한 곳에 진득하게 머물지 못하고 계속 방황하며 떠돈 것은 그 어느 곳에서도 나의 발목을 잡는 목표를 세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게 남은 건 소중한 사람들과 그 안에서의 방황, 그리고 끊임없는 질문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를 통해서 ‘나’라는 사람과 조금이나마 가까워지게 된 것이다.
 
대안학교에 두 번 떨어지고, 대안을 고민하다
 
유년 시절, 초등학교 6년을 6번 학교를 옮겼을 만큼 잦았던 이사와 부모님의 이혼, 그리고 몇 번의 인도 유학이라는 남다른 경력 때문에 난 스스로를 특별하다고 여겼다. 인도아이들 사이에서 다른 생김새, 다른 언어를 쓰는 나는 모든 아이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한국에서도 인도에서 왔다고 하면 조금 별난 아이로 취급되었다. 나는 그런 관심들을 은근히 즐기고 있었고, 이놈의 ‘자뻑’(자의식)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다른 애들과 난 달라’ 치부해버리고서 맺는 관계는 항상 겉돌았다.
 
풍파와도 같았던 초등학교 시절이 지나고, 한국에 자리를 잡은 중학교 시절 난 공부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그저 공상에만 몰두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가족은 엄마와 나 둘 뿐이었다. 모녀의 사이는 꽤 괜찮은 편이지만, 그것도 성적표가 오기 전까지다. 성적표가 날아오는 날로부터 몇 달간 냉전이 지속되었다. 그런 나에게 대안학교는 탈출구로 보였다. 앉아서 하는 공부만 아니라면 밭일이든 뭐든 하면서 몸을 움직이고 싶었다.
 
하지만 중학교 졸업 후 고등학교를 대안학교로 진학하려 했으나 그곳에도 어떤 방식으로든 경쟁은 엄연히 존재했고, 나는 떨어졌다. 그 후 일반 여고에 진학했다. 중학교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빡빡한 수업들과, 체육시간에 실기는 하지 않고 이론에 대해 배우고 있는 것은 나의 머리와 몸을 굳게 만들었다. 정말 심각하게도 심한 변비에 걸려 일주일간 똥이 안 나왔던 끔찍한 사건도 있다. 대장과 소장 사이에서 딱딱하게 굳고 있던 나의 똥처럼 나의 맘도 이곳을 벗어나야겠다는 결심으로 굳고 있었다.
 
대안학교라는 다른 출구가 있다는 생각이 드니까 이 현실에 전혀 집중을 할 수도, 마음을 줄 수도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대안학교에 원서를 넣기로 결정하고, 염려스런 눈길로 쳐다보는 친구들과 선생님들에게 그리고 변비에게 기쁘게 작별을 고했다. 허나, 결과는 기쁘지가 않았다. 나는 다시 대안학교에 떨어진 것이다. 대안학교를 두 번 떨어지니 도대체 ‘대안’이 무엇인가 고민되었다. 다시 학교로 돌아가고 싶은 맘은 추호도 없었고 내 스스로 대안을 만드는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내 딴에는 한 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몇 없던 친구들과의 인연도 끊고 생애 처음으로 공부에 매진했지만 검정고시 합격 후 18살 무렵, 나는 고립되었다. 또래들과의 관계는 줄었고, 학교라는 제도에서 벗어나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 막막했다. 빵집에서 하는 아르바이트는 재미있었지만, 평생 빵 포장과 철판을 닦으며 지내고 싶지도 않았고, 돈을 벌어도 쓸 곳이 없으니 주머니를 채우는 쾌감도 없었다.
 
이 세상은 막연한 불안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불안감을 달래기 위해 들었던 음악은 외로움을 더 고조시켰다. 나는 이 고립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아버지가 일하고 계신 인도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인도아이들과 바디랭귀지로 소통하며 

▲  내가 만난 첫번째 공동체. 인도의 한 시골마을 아이들과 함께하며 인생에서 가장 따뜻한 순간을 경험했다. 
 
18살, 아빠가 살고 있는 인도 공동체에는 나 말고도 아들, 딸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들과 내가 함께 살게 되었다. 1년 간 동거의 시작, 처음부터 순조롭지 않았다. 나름 밝은 사람이라 자부하고 있었는데 웬걸, 사람들 앞에서 말이 한 마디도 나오지가 않았다. 이런 나의 성격을 변화시켜 준 것은 인도 아이들이었다.
 
1년간 자원봉사자로서 내 역할은 시골 마을에서 아이들이 학교를 마치고 센터로 오면 방과 후 교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나에게 ‘티쳐’라는 이름이 붙여지고 누군가의 앞에 선다는 것 자체가 도전이었다. 아이들은 먼저 달려와 이름을 묻고 손을 붙잡고 놓아주지를 않았다. 기도 세고, 말도 많고, 몸이 솜털같이 가벼워서 바람이 불면 그대로 날려 가버릴 것 같은 아이들을 내가 가르치게 되었다.
 
초기에는 엄청 긴장을 했다. 아이들은 내 말을 못 알아듣고, 나도 아이들이 하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는 이 엄청난 소통의 벽이란. 다행히 시골마을에서 영어 좀 한다는 청년들이 안 되는 실력으로 영어를 인도말로 통역해주러 왔지만, 그마저 빠지는 날에는 골치가 아팠다. 하루에 1시간 30분, 아이들은 자신들 앞에 서있는 이방인에게 눈을 반짝거리고 있었고, 나는 그 앞에서 울던, 웃던, 춤을 추던, 뭐라도 해야 하는 개그맨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과 발표회에 올릴 영어연극을 준비하면서 골머리를 앓았다. 도무지 연습만 하자고 하면 매번 도망가고, 영어는 외워지질 않는 터라 공연을 올릴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그래서 생각했던 것이 동작과 표정이었다. 아이들은 언어가 그냥 언어로 다가왔을 때는 무감각하지만 그 언어를 몸으로 이해하면 쉽게 습득했다. 또 다른 세상을 알아버린 듯한 기분이 들어 아이들과의 하루하루가 내게 활력을 주었다.
 
공연 당일 날, 아이들은 자신들을 보러 온 관객들을 마주하니 사뭇 진지해져 있었다. 내가 말을 하지 않아도, 아이들은 나의 얼굴 표정과 손짓만을 보고서 나의 맘을 다 알아채고는 그 어떤 때보다 잘했다. 늘 대사를 까먹어 애를 먹었던 아이가 토시 하나 틀리지 않고 말하자 난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 공연을 마치고 인사 후 무대 뒤로 내려와서 나를 향해 달려오는 아이들을 안아주는데, 아 정말이지 인생의 가장 따뜻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연극을 올리면서 온 몸으로 만나 함께 뛰어 놀며 소통하는 바디 랭귀지가 얼마나 소중한 지, 사람을 만날 때 꼭 언어로만 말로만 만나는 게 아니라 부딪힘과 직감으로 만나는 게 어떤 것인지를 아이들은 내게 선사해주었다.
 
홀로 떠난 배낭여행이 남긴 깨달음 

▲ 홀로 배낭여행을 떠나 마음의 문을 여는 경험을 하고, 불편함과 일상의 소중함에 대해 많은 고민을 남겼다. 
 
자원봉사 기간 중에 홀로 배낭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공동체 생활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건드리면 할퀴기라도 할 듯 겁이 난 고양이처럼, 혼자라는 두려움과 낯선 환경에서 누가 해치진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날이 서 있었다. 하지만 며칠 가지 못하고 내 발톱은 꺾어지고 만다.
 
여행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생애 처음으로 일시적 기절이라는 걸 경험했다.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밥도 맘 놓고 먹지 못하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자 몸이 파업을 한 것이다. 기차역에서 쓰러진 순간, 오지랖이 넓은 인도인들이 내가 쓰러진 것을 보고 왁자지껄 모여들었다. 그리고 나에게 정신 차리라며 얼굴에 차가운 물을 들이 붓는 게 아닌가! 물벼락을 맞고 정신이 든 순간 기적적으로 나를 향한 손들이 모두 도움의 손길로 보였다.
 
아프고 나니 모든 게 달라 보이는 것이다. 내가 피하려고만 했던 그 사람들은 내게 ‘어디가 아프냐’부터 시작해서 어디서 왔는지, 밥은 먹었는지, 무엇을 먹었는지, 어디로 가려고 했는지, 돈은 있는지, 낯선 이방인에게 잘도 말을 걸고 무슨 일이든 자기가 도와주겠다며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잡고 온 몸에 물이 흥건한 채로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인도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기차표를 끊고 다음 여행지로 갈 수 있었다.
 
인도여행은 길 위에서 만났던 무수한 사람들의 얼굴, 낯선 마을과 도시의 풍경, 그리고 다른 차원의 불편함을 주었다. 기차바닥에서 바퀴벌레와 쥐와 함께 지샜던 밤을 생각하면…. 네팔로 가는 버스 안, 마치 출근길 지하철 2호선의 모습을 보는 것처럼 숨 쉴 틈도 없이 가득 찼던 사람들 속에서 나는 앉아서라도 갔지, 14시간을 서서 버티던 이들을 떠올리면 일상에서 가끔 일어나는 불편들은 그 기억들 앞에서 아주 소소해지고 만다.
 
불편하지 않고서 배움을 얻지 못한다는 것, 편하고 익숙하기 만한 환경에서 삶이 절실해지기 어렵다는 것. 이 두 가지가 인도여행에서 남은 깨달음이다. (정아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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