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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성매매 경험이 있는 십대여성들과 만나며 
 
‘청소년 성매매’ 현실을 들여다보는 연재를 시작합니다. <조금 다른 아이들, 조금 다른 이야기>(이후, 2011) 저자 김고연주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연구교수가 성매매 경험이 있는 십대여성들과 만나온 이야기를 기고합니다. <일다> www.ildaro.com
 
‘불쌍한 아이들’ 혹은 ‘무서운 아이들’  

 
성매매 경험이 있는 십대여성들에 대한 연구를 오랫동안 진행하면서,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정말 어려운 연구를 한다”는 거였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두 가지 의미가 담겨있다고 생각했다. 하나는 ‘청소년 성매매’라는 현상 자체가 다루기 어려운 주제라는 의미고, 다른 하나는 성매매 경험이 있는 십대여성들을 만나기가 어렵다는 의미 말이다.

 
청소년 성매매에 대해 연구하기 위해서는 십대여성들을 만나야 한다는 점에서, 후자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려고 한다. 

▲ '원조교제'를 하는 십대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 주목 받은 일본 영화 <바운스>(バウンス,Bounce KoGALS,1997) 중.   
 
우리 사회에서 성매매를 하는 십대여성들에 대한 일반적인 시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 것 같다. ‘불쌍한 아이들’ 아니면 ‘무서운 아이들’. 이러한 시선은 다른 성매매와는 구별되는 청소년 성매매의 특성에 따른 것이다. 한국에서 청소년 성매매가 “원조교제”라는 용어로 드러나기 시작한 시기는 1997년이다(‘도우면서 사귀다’는 뜻인 “원조교제”는 일본에서 1970년대에 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조교제”를 하는 아이들의 등장
 
“원조교제”의 등장은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것은 단지 ‘십대여성’들이 성매매를 한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었다. 사실 십대여성들의 성매매는 ‘티켓다방’을 위시해 오랫동안 존재해왔다. 문제는 소위 ‘비행’ 십대여성들뿐 아니라, 학교를 다니고 부모의 집에서 살고 있는 ‘평범한’ 십대여성들이 성매매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원조교제”가 ‘포주에게 고용되지 않은 개인형 성매매’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평범한’ 십대여성들이 아르바이트 삼아 성매매를 한다는 사실을 우리 사회는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 ‘성녀’와 ‘창녀’ 이분법이 무너지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새로운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워하던 우리 사회는 “원조교제”의 원인을 ‘십대여성들의 미성숙’으로 돌렸다. “원조교제”는 대부분 인터넷을 통해 성사되는데, 성구매 남성들뿐 아니라 십대여성들이 먼저 제안하는 경우도 상당하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이에, 판단력이 미숙한 십대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2000년에 ‘청소년성보호법’이 제정되었다. 또한 ‘원조’와 ‘교제’라는 단어가 모두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성인남성과 십대여성 모두에게 “원조교제”를 미화하고 죄의식을 희석시킨다는 이유로, 2001년 5월에 ‘청소년 성매매’로 용어를 개정했다.
 
보호 담론으로 인해 십대여성들은 ‘미성숙해서 성매매 피해를 입은 피해자’로 규정되었다. 보호 담론은 청소년 성매매를 연구하는 나와 같은 연구자들이 ‘십대여성들을 보호해야 하고 성구매 남성들을 비난해야 한다’는 주장을 쉽게 할 수 있게 해준다. 또 그러한 주장에 대한 ‘공개적’인 반발을 어렵게 만든다는 점에서도 편리하다.
 
그러나 이러한 편리함은 현상적인 것에 불과하다. ‘자발적’으로 성을 판매하는 십대여성들을 비난하면서, 십대여성들도 처벌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비공식적인 견해도 상당하다.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은 십대여성들을 ‘피해자’로 규정해버리는 것이 이들이 놓여있는 복잡한 상황을 단순화하고, 성매매의 다양한 맥락을 삭제한다고 생각한다.
 
성매매를 하는 십대여성들과 ‘관계 맺다’
 
내가 청소년 성매매를 연구하게 된 계기는 나 역시 성매매를 하는 십대여성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여성주의자로서 항상 성매매 문제에 대한 분노를 지니고 있었지만, 청소년 성매매는 성별, 연령, 경제력이라는 다층의 권력 차이로 인해 십대여성들이 그야말로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십대여성들의 ‘비뚤어지고 문란한 성의식’을 비난하는 사회적 인식에 대한 분노가 한층 커지면서, 나는 십대여성들을 ‘대변’하겠다는 의협심에서 연구를 시작하게 됐다.
 
하지만 막상 십대여성들을 만나보니 이들은 내 예상과 달리 굉장히 담담했고 또 명랑했다. 내가 상상했던 모습은 아마도 성매매를 하며 받은 상처에 압도되어 있는 무기력한 모습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여느 십대여성들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보며, 나는 성매매가 이들의 삶에서 한 부분일 수 있겠다는 가능성을 발견했다. 당시 많은 십대여성을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내 생각과 다른 그녀들의 모습에 내 선입견을 반성하게 됐다. 나아가 이들을 더 만나보고 싶다는 ‘욕망’이 생겨났다.

 ▲ 성매매 경험이 있는 십대여성들은 ‘불쌍한 아이들’과 ‘무서운 아이들’이라는 양극단의 이미지 사이에서 부유하고 있다.     ©일다  

2002년 석사논문을 쓸 때 은성원(현재 <윙>)에서 6개월 간 인턴으로 일했고, 같은 기간 동안 서울시 늘푸른여성지원센터와 YMCA가 진행하는 거리상담에 활동가로 참여했다. 박사논문을 쓸 때에는 새날을여는청소녀쉼터 산하 ‘서울위기청소년교육센터’에서 2007년 말부터 1년 2개월 간 교육코디네이터로 일했다. 이렇게 기관이나 시설에서 일했던 것은, 성매매 경험이 있는 십대여성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주제의 성격상 지속적으로 만나면서 상호 신뢰를 구축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전문 활동가 선생님들의 배려와 지지 덕분에, 나는 서울에서 대표적인 (청소년) 성매매 관련 시설들에서 일을 배울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그리고 ‘시설의 선생님’이라는 지위를 통해 십대여성들로부터 어느 정도의 신뢰를 받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사실은 초짜인 내가 십대여성들을 만나기란 녹록하지 않았다. 
 
은성원에서 일할 땐 여러 사람들 앞에서 십대여성과 얼굴을 붉히며 싸운 적도 있다. 대인 기피가 있는 십대여성에게 더 많이 마음을 쓰다가, 다른 십대여성들이 차별 받는다고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적도 있었다. 거리상담이 인연이 되어 소개를 받은 한 십대여성을 만나고 있을 때, 부모가 나 때문에 딸이 학교에서 무단조퇴를 했다며 당장 찾아오지 않으면 고소하겠다는 협박을 받기도 했다.
 
이렇게 십대여성들과 만나 석사논문을 쓴 후 5년 만에 박사논문을 쓰기 위해 다시 십대여성들을 만났을 때도 힘들기는 매한가지였다. 아니, 내가 십대여성들을 꽤 만났고, 석사논문도 썼다는 이유로 어느 정도 경험이 있다고 자만해서였는지 오히려 더 힘들었던 것 같다. 나는 성매매 경험이 있는 십대여성 8명을 대상으로 5박6일 캠프를 진행해야 했다. 캠프에 참여한 십대들은 좀처럼 시간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사라지기 일쑤였다. 여러 번 말을 해야 움직였고, 입이 굉장히 걸었다.
 
사실 그들은 밤에 잘 자지 못해 피곤하고, 거리생활로 인해 여기 저기 아프고,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집중력이 짧고, 또래들과 쓰는 험한 말을 여전히 쓰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상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나는 십대들에게 화가 났다. 이들도 프로그램에 참여하라고 채근하는 나를 싫어할 거라고 지레 짐작해, 나는 더욱 힘이 들었다. 다행히 경험과 이해의 부족으로 생겼던 나의 오해는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해소되었고, 캠프는 즐겁고 재미있었으며 때로 감동적이기도 했다.
 
관심과 애정에 목말라있는 십대들의 목소리
 
이런 식으로 갖은 우여곡절을 거듭하며 나는 십대여성들과 상호 신뢰를 쌓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을 지속적으로 만나면서 복잡한 삶의 경험과 생각을 들을 수 있었다. 특히 내가 십대여성들을 만나면서 항상 느꼈던 점은, 이들이 관심과 애정에 굉장히 목말라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시설의 선생님이라는 지위와, 내가 이들의 성매매 경험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십대여성들은 자신을 판단하지 않고,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자신의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어른들에게 쉽게 마음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이들의 이야기와 생각들은 뭐라 규정할 수 없는 중층성, 맥락성, 모순성, 그리고 성찰성을 지니고 있었다.
 
성매매 경험이 있는 십대여성들은 ‘불쌍한 아이들’과 ‘무서운 아이들’이라는 양극단의 이미지 사이에서 부유하고 있다. 불쌍한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동정을 받고 있고, 무서운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비난을 받고 있다. 그러나 삶의 한 편린에서 비롯된 단편적인 이미지들로 이들을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은 자명하다.
 
나는 청소년 성매매를 연구하면서 상당히 많은 어른들이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십대여성들을 만나면서 여러 번 껍질이 깨지는 성장을 경험했던 것처럼, 이들의 목소리는 많은 어른들에게 십대여성들에 대한 편견을 줄이고 나아가 청소년 성매매를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의 문제로 보는 눈을 키워줄 것이다. 십대여성들의 생생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필요한 이유다.  (김고연주)
 
(※ 2회는 ‘십대여성들에게 성매매 경험이란 어떤 것인가’에 관한 기사가 이어집니다.)
 
     * 여성저널리스트들의 유쾌한 실험! 인터넷 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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