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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남섬여행의 추억과 소비뇽블랑
<일다> 여라의 와이너리(winery) 3. 만남 ① 산 
 
누가 나에게 왜 여행을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만남이 그 이유라 대답할 것이다. 여기서 만남이라 함은 무언가를 보고 듣고 배우는 경험에 그치지 않고, 그것들을 통해 일상에서 내가 간과했던 혹은 당연히 여겼던 내 자신을 새로이 만나는 것도 포함한다. 앞으로 몇 편의 글은 이런 만남들에 관한 이야기다. 물론 와인은 언제나 포함이다.
 
서른 즈음 깨달은 산에 대한 사랑

▲ 어느 해 내 생일에 내가 주는 생일선물로 요세미티 해프돔에 올랐다. 해프돔은 동그란 돔이 반으로 쪼개진 모양이라 붙은 이름이다. 해 뜰 때 시작해서 지루한 산행을 몇 시간 하다 마지막에 개미의 모습이 되어 저렇게 바위산에 매달려 올라간다.   ©여라  
 
길 떠나 여태껏 만난 것들을 떠올려봤다. 내가 빠릿빠릿한 인간이 아니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특히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 인간인지를 알아내는 게 참 멀고 긴 여행이다. 서른 즈음에야 내가 얼마나 산을 좋아하는지 깨달았다. 내게 고향이 되어준 곳에는 산이 있다. 북한산과 요세미티. 그렇다. 수유리와 버클리가 내 고향이 되어준 이유는 내가 기억하고 있는,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냄새도 있지만, 마음을 둘 수 있었던 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좀 다른 점이 있다면 버클리는 요세미티 기슭은 아니다. 차타고 4시간은 가야 한다. 그러나 버클리 사는 동안 사람들이 같이 가자고 말하면 내가 거절하지 못하던 곳이 두 곳 있었으니, 하나는 소노마였고 하나는 요세미티였다. 요세미티에 관해서는 이야기를 시작하면 말이 길어지니 나중에 따로 한 번 할 기회를 만들어야겠다. 대신 맛보기로 사진 하나. (왼쪽 사진 '요세미티 해프돔')
 
수유리에서 자란 사람이 다 산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수유리에서 자라지 않았으면 내가 산을 만나지 못했거나 훨씬 훨씬 나중에 만났을 것이 분명하다. 지금도 그 동네에 갈 일이 있으면 설레고, 이렇게 동네 이름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특별한 관계가 시작된다. 어릴 적 친구들 즉, ‘수유리 사람들’을 만나면 앞뒤 상황과 상관없이 무장 해제되어 버린다. 그런데, 수유리의 정수는 고개를 들어 올려야 하늘의 시작이 보이는 가파른 산이다.
 
그 시절 나의 취미이자 놀이는 나무 오르기와 화계사 지나 삼성암 오르기였다. 산 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올라가는 취미가 운명이었다면, 잠깐이나마 암벽등반을 배웠던 일은 충동에서 비롯되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다 그랬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인생에서 후회하지 않을 몇 안 되는 선택이라며 어느 날 같이 일하던 선배가 등산학교를 강력 추천했다. 그 덕분에 어려서부터 백운대 올라 다니며 언감생심 쳐다보기만 했던 인수봉에도 오르고, 자일에 매달려 잊을 수 없는 경치를 안겨주었던 노적봉에도 올랐다.
 
산에 들어가는 날이면 아침 일찍 쪽마루에 나가 앉아 발톱과 손톱을 정성들여 깎으며 마음이 경건해지곤 했다. 바위에 붙어있으면 좀 무서워서이기도 했지만 떨렸다. 다른 무엇으로도 몸과 마음이 그렇게 하나 되는 경험을 해 본 적은 없다. 달리기가 나의 ‘종교’였던 여러 해 동안도 그러지 않았다. 내 몸이 할 수 있다고 마음이 믿어주는 것, 그리고 그런 내 맘을 딛고 몸이 움직이는 것. 이것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목표지점에 닿아 있곤 했다. 정상에 올랐다는 기쁨은 나중에 그냥 주어진 것이지, 거기까지 이르는 과정에 비하면 극적이지도 않고 대단한 성취감도 없었다.
 
처음 ‘혼자’ 떠난 뉴질랜드 여행
 
내가 누구인지, 어떤 인간인지 알게 되는 과정이 흥미로웠던 여행지 중 하나는 뉴질랜드였다. 워낙 먼 곳이라 ‘어딜 갔다’ 할 만한 곳이기도 했지만, 처음으로 혼자 계획하고 혼자 다닌 곳이라 마음에 깊이 남는 곳이다. 어쩌면 그 때 경험으로 지금도 혼자 다니는 여행을 좋아하는 지도 모르겠다. 뜬금없이 거길 가게 된 건 이민 가서 살고 있는 친구들이 비빌 언덕이 되어주어서였다.
 
거기서 머문 한 달 중 하이라이트는 아무래도 남섬을 혼자 돌아다녔던 보름 남짓한 시간이다. 지금은 디카와 폰카로 모든 것의 인용 발췌가 가능하지만, 11년 전 뉴질랜드에 갔을 때 나는 수동 필름 카메라를 가져갔기 때문에 상자에서 꺼내서 보는 사진들 외에 모든 기억이 들쑥날쑥하다. 다른 표현으로, 몹시 주관적이다. 그래서 더 감상적인지도 모르겠다.
 
상대적으로 내가 여행을 많이 다닌 미국도 자연환경이 재산인지라 뉴질랜드의 이런저런 관광지가 그다지 신기하거나 놀랍지는 않았다. 다만, 남반구는 처음이라 화장실 갈 때마다, 목욕할 때마다 물 소용돌이가 정말로 반대방향인가를 확인했다. (안타깝게도 뉴질랜드의 모든 변기는 절약형이라 소용돌이 칠 만큼의 물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대로 그냥 물이 아래로 슝~ 빠진다.) 북향집을 최고로 친다는 그 곳에서 해가 있는 방향을 보면서도 동서남북이 늘 헷갈렸다. 그러던 중 남섬에 가니 산이 마음을 뭉클하게 했다. 아, 나는 산을 좋아하는구나!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와 함께 에베레스트 정상에 처음 올랐다고 알려진 에드먼드 힐러리 경이 뉴질랜드 출신인 이유를 얼핏 알 수 있었다.
 
다음에 뉴질랜드 갈 때에는 한여름에 가고 싶다. 초봄이라고 해서 가서 11월 한 달을 보냈는데, 아뿔싸, 늦겨울이었다. 혹시나 가져갔던 스웨터와 방수잠바를 매일 껴입고 다녔다. 계속 우중충하고 내내 비가 왔다. 남섬 여행 중 딱 하루 기적같이 반짝 맑은 날이 있었다. 아벨타즈만 (Abel Tasman) 국립공원에 가려고 넬슨이라는 조그마한 도시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그 전날 저녁까지도 장대비가 쏟아져서 산행 예약을 해놓고도 별 기대도 않고 저녁 먹고 일찍 잤다.
 
꼭두새벽에 일어나 차를 한참 타고 또 배로 갈아타고 가서 내려준 곳에서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바다를 끼고 있는 산 능선에 올라 반나절을 걸었다. 그러다 물 빠진 갯벌을 가로지르면 걷는 거리가 짧아진다는 안내를 보고 능선에서 내려왔다. 사방을 둘러봐도 나 밖에 없었다. 내가 내는 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등산화와 양말을 벗어들고 맨발로 질퍽한 갯벌을 건넜다. 햇살에 덥혀진 진흙은 기분 좋게 따뜻했고, 발바닥에는 이런 저런 패류가 닿았다. 뉴질랜드 한 달 여행 중에서 가장 기억이 생생하게 남는 날이다.
 
여러 해 뒤 하필 또 11월 어느 날 버클리에서 뉴질랜드 조개 한 꾸러미를 샀다. 생산지와 수확일이 적혀있었다. 수확된 지 일 주일도 채 안 된 이 조개들의 고향이라는 곳을 인터넷 지도로 찾아보니 그때 내가 걸었던 갯벌에서 불과 50km 거리다. 아……. 내가 감상에 빠져 그 때 그 갯벌의 느낌을 더듬어 기억하는 동안 조개들은 그 곳 하얀 모래를 뱉어냈다. 그것들을 냄비에 담아 그 위에 잘게 채 썬 고수, 얇게 저민 마늘과 세라노 고추로 덮고 살짝 쪄냈다. 잊을 수 없는 조개찜이 되어준 이 싱싱한 것들과 그날 난 뉴질랜드 소비뇽블랑을 곁들였다.
 
화이트 와인의 대명사 ‘샤르도네’와 ‘소비뇽블랑’
 
“와인 좋아하세요? “어떤 와인 좋아하세요?” 이런 질문에 편안하게 대답할 수 있는 데에도 참 오래 걸렸다. 저 질문이 왜 그렇게 위압적으로 느껴졌을까? 등산 좋아하냐, 어느 산 좋아하냐, 뭐 이런 유의 질문이나 마찬가지인데.
 
와인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우선 그들의 이름을 알아야겠다고 작심했다. 유럽이야 길게는 몇 천 년, 짧게는 몇 백 년은 와인을 만들어왔으니 긴 세월 셀 수 없는 시도와 실패가 있었다. 지금 어느 지역에 무슨 포도품종을 재배하는지는 그 오랜 역사의 결과물이다. 기후와 토양에 가장 적합한 품종이 그 지역을 대표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럽에서는 포도 품종을 따로 말할 필요가 없이 지역이름이 와인이름이다. 단일 포도 품종이기도 하고 그 지역 특유의 블랜드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호주, 미주,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이 대표하는 ‘신세계’ 와인생산지에서는 와인을 만들기 위해 포도나무를 옮겨왔기 때문에 포도품종이 그대로 와인 이름이다.
 
화이트 와인의 대명사는 샤르도네(Chardonnay)와 소비뇽블랑(Sauvignon Blanc)이다. 물론 다른 화이트 와인 품종도 무지하게 많지만, 유명세로 보았을 때 그렇다. 프랑스 고유품종이지만 지금은 전 세계 와인산지에서 재배할 만큼 둘 다 현지적응력이 강하고 다양한 스타일의 와인으로 만들어진다.

적당한 과일 맛에 오묘한 프랑스 브르곤뉴(Bourgogne) 지역 화이트 와인을 만나기 전에 오크향 짙고 알코올농도가 비교적 높은 캘리포니아 샤르도네를 먼저 만났다. 그 탓에 나는 들큰거리는 것 같은 샤르도네 보다는 상큼하고 싱그러운 소비뇽블랑을 선호하게 되었다.


▲ 자연을 좋아하는 뉴질랜드 사람들처럼 이런저런 동식물 그림이 많은 뉴질랜드 와인 라벨들     ©여라  

와인 맛을 볼 때 단 맛, 신 맛, 타닌과 알코올의 강약을 본다. 소비뇽블랑은 일반적으로 신 맛이 강해서 상큼한 느낌이 들고, 특히 뉴질랜드 소비뇽블랑은 달콤한 향이 깔끔하고 싱그러운 풀 내음이 난다. 그래서 웬만한 음식과 잘 어울리는 데다 무엇보다 큰 장점은 비싸지가 않다. 기후가 덥지 않은 남섬의 북쪽 말보로가 뉴질랜드에서 소비뇽블랑의 유명 산지이다. 뜨거운 햇볕에 과일이 잘 익어 당도가 높아지는 (알코올 도수는 과일의 당과 비례한다) 캘리포니아 와인의 일반적인 현상과 달리 뉴질랜드산 소비뇽블랑은 알코올 도수도 적당하다.

 
그리고 뉴질랜드 와인은 대개 생수병처럼 스크류캡으로 되어있어 코르크 와인마개가 때로 불러일으키는 문제로부터도 자유다. 와인을 따기 위해 코르크스크루가 따로 필요 없으니 언제 어디에서나 쉽게 가까이할 수 있다. 뉴질랜드 와인의 특징 중 또 하나는 라벨에 글씨로 가득 채운 정보 보다는 자연을 좋아하는 뉴질랜드 사람들 그대로 이런저런 동식물 그림이 많다는 점이다. 글씨가 가득해도 와인의 느낌처럼 간결하고 깔끔하다.

여라 / 미디어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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