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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으로 말하다

나는 날마다 소울푸드를 먹는다

그 여자들의 물결 일다 2011. 11. 11. 07:30
<일다> 자야, 귀촌을 이야기하다: 아홉째 이야기  
 
올해는 무가 아주 튼실하게 잘 자라 주었다. 작년에 심어 거둔 것과 같은 씨앗인데도, 열매는 작년보다 1.5배 정도 더 큰 것 같다. 농사의 달인인 동네 아주머니들조차 우리 텃밭 옆을 지나가실 때면 야물게 잘 컸다고 추켜세우실 정도다. 그러고는 덧붙이는 한 말씀. 비료 안 줬쟈? 전(前) 주인이 거름을 워낙 잘 해놔서 땅심이 엄청 좋은가베.
 
으쓱했던 내 어깨가 도로 내려앉는 것과 무관하게, 어른 손바닥 크기만큼이나 두둑 위로 비죽 솟은 무를 매만지는 내 손은 마치 감전이라도 된 듯 찌르르 떨린다. 전 주인이 뭘 어떻게 했건, 이제 이 밭에 씨앗을 심어 거두는 사람은 나라는 자명한 사실이 나를 이처럼 의기양양하게 만드는 것이다.
 
텃밭이 주는 짜릿함과 훈훈함
 

▲ 저녁 밥상을 준비하기 위해 텃밭에서 막 거두어 온 야채들. 이보다 더 건강하게 영혼을 살리는 소울푸드가 있을까.     © 자야 

 
텃밭을 가꾸면서 가장 좋은 점은 무엇일까? 자연과 교감할 수 있다는 것? 아니면 생태적인 감수성이 열린다는 것? 다 맞는 말이다. 내 경험에 근거해 한 가지 덧붙이자면, 마음이 어지럽고 괜히 부아가 날 때도 텃밭은 좋은 치유처가 된다. 빨간 비닐장화를 신고 고랑에 쭈그려 앉아 있으면, 씨를 뿌리든 모종을 심든, 혹은 그저 풀을 뽑으며 흙냄새를 맡든, 단지 거기 있다는 자체만으로 가슴에 이는 흉포한 파도가 가라앉고 머릿속을 헤집어놓는 온갖 망상들이 점차 사라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좀 더 솔직해지자면, 텃밭이 있어 가장 흥분될 때는 역시 씨 뿌려 가꾼 것을 갈무리하는 순간이라 하겠다. 이사 온 첫 해 겨울, 옆집 아주머니가 배추 수확하는 방법을 알려주겠다며 칼로 밑동을 잘라내고 그 푸른 몸통을 반으로 가를 때 나는 얼마나 가슴을 졸이고 숨을 죽였던가. 그리고 마침내 드러난 그 노랗고 뽀얀 속살 앞에서 나는 또 얼마나 주책없이 감탄사를 남발하며 눈에 맺히는 물기를 털어냈던가.
 
그 순간 내가 느낀 것은 건강한 식재료를 내 손으로 직접 가꿔 얻었다는 기쁨 이상의 무엇이었다. 씨앗을 심은 늦여름부터 수확을 한 초겨울까지 세상을 떠돌던 햇살과 바람과 빗방울이 한 포기의 배추 안에, 그것도 가장 내밀한 안쪽에 오롯이 고여 있음을 발견한 사람에게만 허락되는 경이와 신비를 체험했다고 하면 되려나.
 
비록 그 첫 경험만큼 강렬하지 않을지언정, 작물을 갈무리할 때 느끼는 특별한 감동은 지금껏 계속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그날 배추 속에서 본 햇살과 바람과 빗방울은 가지와 호박에도, 감자와 옥수수 에도, 심지어는 아주 작은 완두콩 한 알에도 그대로 살아 있기 때문이다.
 
수확을 할 때 정점으로 치닫는 '짜릿함'이, 바로 그 수확물로 요리를 해서 사랑하는 이들과 나눠먹는 순간 '훈훈함'으로 바뀌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도 물론 행복하다. 그래봤자 푸르디푸른 잎채소들을 섞어 버무린 샐러드거나, 호박과 부추와 쪽파를 썰어 부친 전이거나, 아니면 감자와 배추를 넣어 끓인 된장찌개가 전부일 뿐이지만, 직접 키워 거둔 것들로 차린 밥상엔 그 어떤 진수성찬과도 비교할 수 없는 묘한 아우라랄까 감동이랄까, 그런 게 분명 있다.
 
함양에 정착한 초반에만 해도 누가 온다고 하면 뭘 해서 먹일 것인가에 좀 민감했었다. 먼 곳에서 나를 보겠다고 일부러 내려오는 이에게 푸성귀만 대접하자니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그래서 정작 나는 먹지도 않는 삼겹살이며 골뱅이 등을 사와 조리하곤 했는데, 몇 번 그러고 난 다음부터는 누가 오건 그냥 내 식대로 상을 차린다. 일일이 신경 쓰기 귀찮아진 것도 있고, 무엇보다 내가 부담을 안고 음식을 만들면 그 에너지가 먹는 이들에게까지 그대로 스며드는 것 같아서다.
 
사실 여름이면 텃밭에서 나는 것만 뜯어도 상이 모자랄 지경이고, 옥수수와 감자만 쪄도 간식거리가 해결되지 않는가. 게다가 아침에 딴 방울토마토를 후식으로 내면 되는데 굳이 마트에 가서 뭔가를 따로 장만할 필요가 있을까. 요즘 같은 철엔 무와 배추를 각각 한 포기씩만 뽑아서 요리를 해도 네댓 가지 반찬은 넉넉히 만들고도 남는다. 겨울과 이른 봄에는 바싹 말려 저장해 둔 가지와 호박 등속을 꺼내 묵나물을 무치고, 밝은 그늘에 널어둔 시래기를 다듬어 된장에 지져 먹으면 되고 말이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이렇게 차려진 밥상에 누구도 불만을 보인 적이 없다. 집에 돌아갈 즈음 우리 집 텃밭에서 뭐라도 좀 뽑아갈 수 없을까 눈치를 살피는 걸 보면, 불만은커녕 오히려 그들도 나처럼 텃밭에서 밥상으로 이어진 소박한 감동에 단단히 매료된 것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그 마음을 모른 척 외면하며 반응을 살피는 재미가 쏠쏠하다면, 그들은 나를 못됐다고 욕하려나.
 
채식, 그리고 요리본능의 발견
 
밥상에 오르는 음식이 아무리 단순하고 소박할지언정, 어쨌든 요리하는 과정에는 시간과 품과 정성이 필요한 법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집에 찾아오는 지인들은 내가 그다지 힘들이지 않고 뚝딱 상을 차려내는 걸 굉장히 신기해한다. 요리와는 거리가 먼 줄로만 알았던 내가 어느덧 요리를 즐기는 사람이 되어 있으니 그럴 법도 하다.
 
부모로부터 물리적인 독립이란 걸 감행한 스물넷 이후로 밥을 먹기보다 잡다한 것을 주워 먹는 데 더 익숙한 생활을 해온 나로서는, 이런 변화가 참으로 신선할 뿐만 아니라 굉장한 행운으로 여겨진다. 오랜 동안 방치해 온 내 몸을 돌보는 치유의 8할은 바로 내 손으로 직접 차린 밥상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 4월 이후로 완전채식을 하게 되면서 나는 요리와 더욱 친밀해진 느낌이다. 직접 만들어 먹는 게 완전채식의 가장 확실하고도 안전한 방법이기에 그러하다. 실제로 채식주의자를 위한 음식점을 따로 찾지 않는 한, 밖에서 완전채식을 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또한 채식 사이트에 들어가 주문하지 않고서는, 달걀과 유제품이 들어가지 않은 빵이나 과자를 시중에서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애초에 요리를 좋아했든 아니든 친해지는 수밖에.
 
집에서 뿐 아니라 서울에 올라갈 때도 주먹밥이나 고구마 따위를 도시락으로 준비하는 내게, 사람들은 종종 묻는다. 그런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완전채식을 고수하는 이유가 뭐냐고. 그럴 때 나는 차마 입 밖으로 발설하지는 못하고 속으로만 되묻는다. 너무 많은 동물을 비인도적인 방법으로 길러내고 죽이면서까지 육식을 과소비하는 이유는 그럼 무엇이냐고.
 
나 자신은 건강상의 이유에서 완전채식을 시작했고 지금도 그 점이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단지 건강을 기준으로 채식이 좋은가 육식이 좋은가를 따지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고 내가 불살생의 정신이 투철한 사람인 것은 아니고, 누구에게나 채식을 강권하는 채식전도사는 더더욱 아니다.
 
다만 구제역으로 생매장당하는 수천 마리의 돼지를 보면서, 광우병으로 무릎이 꺾인 채 쓰러지는 소들과 좁아터진 양계장에서 부리를 잘린 채 죽을 날만 기다리는 닭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더 이상 외면할 수만은 없는 어떤 것에 눈을 떴을 뿐이라고 할까. 대량 생산과 소비를 강요하는 현재의 비정상적인 시스템 아래서 과도한 육식은 부적절하다는 것. 그리고 이대로라면 동물과 사람의 생존은 지금보다 더 심각하게 위협받으리라는, 인정하기 두렵고도 곤란한 진실에 말이다.
 
이에 덧붙여, 매 끼를 직접 해먹고 도시락을 싸 갖고 다니는 것이 생각만큼 불편하지는 않다는 점도 말하고 싶다. 오히려 나는 시골에서 텃밭을 일구며 내 안에 숨어 있던 요리본능을 발견하게 된 것에, 완전채식을 통해 요리에 필요한 전 과정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한다. 만약 이런 기회를 갖지 못했다면 지금 내가 맺고 있는 정도만큼도 자연과 관계하지 못했을 것이고, 자연을 매개로 한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도 무지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무엇보다 삶에 진정한 '맛'이 결여되어 뭔가 좀 밍밍해지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감각의 유혹, 끌리지만 두렵진 않아
 

▲ 무를 떼내고 남은 무청을 밝은 그늘 아래 말리면 시래기가 된다. 올 겨울 밥상은 이로 인해 든든하고 따스할 것이다.     © 자야 

 
사람에겐 저마다의 소울푸드가 있다고, 그래서 삶이 고단할 때 그 음식을 먹으며 위안을 받는다고 하던가. 내게도 그런 음식으로 꼽을 만한 것들이 몇 가지 있다. 특정 시기에 내가 겪은 사건과 흐름을 같이하는 그 음식들은, 생각만으로도 혀가 먼저 꿈틀거릴 만큼 강렬하다. 그때 그 시절은 흐릿해졌을지언정 육체가 기억하는 맛과 향만은 여전히 생생한 것이다.
 
남들은 어떤지 몰라도 나의 소울푸드는 좀 자극적이다. 너무 달거나 미치도록 뜨겁거나, 혹은 너무 달면서 미치도록 뜨겁거나. 그러므로 이따금 절절하게 그립기는 해도 매일 즐길 수는 없는 것이, 그랬다가는 삶에 위로가 되기는커녕 해를 입힐 가능성이 더 크기 때문이다. 내 몸도 본능적으로 그걸 감지해서인지 자주 먹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내 심신과 영혼에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진짜' 소울푸드는, 추억 저편에 웅크리고 있는 자극적인 음식이라기보다 오히려 지금 내게 일용할 양식이 되어주고 있는 심심하고 소박한 음식이 아닌가 싶다. 더욱이 완전채식이니 비단 내 영혼만이 아니라 다른 생명의 영혼까지 더 많이 배려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공치사도 해본다.
 
하지만 영혼도 때로는 자극과 일탈을 원하지 않느냐고? 물론이다. 그래서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너무 달거나 미치도록 뜨거운 음식들 가운데 하나를 골라 먹여주는 순발력을 발휘하려 한다.
 
인도 차에 우유와 설탕과 생강을 들이부어 펄펄 끓인 짜이의 맛과 향이 오전 내내 나의 뇌를 어지럽히는 걸 보니, 오늘이 혹 그런 날일까. 그렇다면 우리 집 선반에 인도 차가 남아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밖에 나가 우유를 사와야 할까. 그래, 그렇게 해도 좋으리라. 저녁이면 다시 내 영혼은 정상 궤도로 진입하고 완전채식 밥상이 사랑스러워질 터이니. 그것을 알기에 나는 그 모든 감각의 유혹이 두렵지 않다.  (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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