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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윤하의 딸을 만나러 가는 길 (25) 
 
[연재 칼럼 소개] 이혼을 하면서 두고 온 딸은 그녀에게는 늘 어떤 이유였다. 떠나야 할 이유, 돌아와야 할 이유, 살아야 할 이유……. 그녀는 늘 말한다. 딸에게 하지 못한 말이 너무 많다고. 열흘에 한 번씩 연재되는 <딸을 만나러 가는 길>은 딸에게 뿐만 아니라 이 땅의 여성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윤하의 고백이 될 것이다.

난 인생의 고갯마루 어디쯤에 있을까?

지난 6월말, 드디어 항암 5주년을 맞았다. 암환자에게 5년이라는 건 그동안 건강관리를 잘했다는 걸 의미하고, 암의 재발위험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하다는 걸 증명하는 시기다. 이런 것들 못지않게 이제부터 병원을 자주 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나를 즐겁게 한다. 5년이 지나면 1년에 한 번씩만 정기 검진을 받는 다는 걸 주변 사람을 통해 난 잘 알고 있었다.

 
수술 후, 3개월, 4개월, 6개월 간격으로 정기검진이 이어져 왔다. 검진들은 외과, 암센터, 영상의학과, 핵의학과 등을 골고루 드나들어야 했다. 그래서 검진이 있는 달은 한 달 내내 병원을 다니는 기분을 느끼며 5년을 보냈다. 게다가 갑상선암 치료를 위한 ‘옥소 요오드치료’는 한 달의 식이요법과 방사선 치료, 세 달 내 이어지는 피로감등으로 무척 힘들었다. 이 치료를 3년에 걸쳐 세 번이나 받았다. 그래서 난 5년 내내 병원에 매어있다는 느낌을 거둘 수가 없었다.
 
다행스럽게 이런 날들을 다 보내고 5년차를 맞은 것이다. 그리고 지난여름, 5년차 검진순례를 했다. 유방암과 관련해 핵의학과에서 pet(양성자 방출 단층 촬영)촬영을 할 때였다. 난 의사에게 물었다. 5년이 지나면 이제 이 촬영을 안 해도 되냐고, 그러나 그렇지 않을 거라는 부정적인 대답을 들었을 때는 여전히 병원을 멀리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데 다소 실망했다.
 
그런데 막상 결과를 듣기 위해 암센터에 들렀을 때, 그 촬영을 지시한 의사는 “이제 저한테는 안 오셔도 됩니다. 우리 여기서는 더 이상 만나지 않기로 해요!”라고 상냥하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한 명이라도 의사를 적게 만난다는 사실에 난 큰 행복감을 느꼈다. 살아 있기에 맞을 수 있는 행운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난 최초의 암진단이 내려지던 때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당시, 암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유방촬영, 초음파촬영, 그리고 조직검사를 했다. 3주째 이어진 이것들은 내 가슴 속의 혹이 암이라는 걸 더욱 확실히 해주는 검사들이었다. 드디어 결과를 듣기 위해 진찰실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날이 되었다.
 
다소 떨리는 마음으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옆에는 연세 지긋한, 꼭 우리 부모님 또래의 어르신 두 분이 앉아계셨다. 그들 옆에는 딸처럼 보이는, 역시 내 나이 또래의 여성이 있었다. 의사의 호명에 딸이 먼저 벌떡 일어났고, 그녀를 동반해 어머님이 들어가셨다. 얼마 후 어머님은 돌아 나오시면서 당황한 나머지 문턱에 걸려 넘어질 뻔 하셨다. 그녀의 마음 철렁함이 고스란히 느껴지던 순간이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어머님은 눈시울을 붉히며, 지옥문턱을 넘는 것 같다고 내게 낮게 중얼거리셨다. 그 모습을 나는 그저 처연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뒤따라 나온 딸이 초조한 눈빛으로 대답을 기다리시는 아버님께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죽을 거라네! 세 달 후에 자리가 있으면 수술을 해 볼 수도 있다고…….”
 
난 그들의 모습을 더 보지 못하고 불려 들어갔다. 그리고 나도 암진단을 받았다.
 
의사는 내게 그녀와 전혀 다른 소식을 전했다.
 
“자세한 건 수술을 해봐야 알지만, 초기일 거예요. 수술만 하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음 주에 수술을 하기로 하죠.”
 
천국과 지옥의 문턱은 이리도 낮은가보다. 나는 진찰실을 나오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문턱을 넘으며, 마음을 쓸어내리기도 하고 심장이 내려앉기도 했을지 실감이 나, 수술 예약도 하지 않고 돌아왔더랬다. 그리고 바로 이어진 갑상선암 진단! 유방암보다 갑상선암 때문에 치료를 더 많이 받았고, 갑상선암이 다소 마음 놓이게 된 지금은 재발이 심한 유방암을 신경 쓰고 있다. 또 매일 먹어야 하는 갑상선 호르몬제는 평생을 따라 다닐 것이다.
 
그 사이, 친하게 지내는 한 이웃이 유방암에 걸렸고, 가까이서 유방암이 간에 전이되어 목숨을 잃었다는 사람도 보았다. 또 폐로 전이돼 힘들게 싸우고 있다는 사람의 이야기도 들었다. 이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나는 암진단을 받을 때, 진찰실 문 앞에서 마주쳤던 여성이 떠올랐다. 그녀는 어떻게 되었을까?
 
죽을 수도 있었을 텐데, 살아서 봄을 맞이할 때마다 눈물이 난다. 눈부시게 피어나는 봄꽃들을 볼 때마다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눈물겨워 마음이 아프다. 요즘은 덤으로 산다는 느낌을 거둘 수가 없다. 암에 걸리지 않았다면, 일과 돈을 쫓아 뛰어다녔을 것이다. 암에 걸리고 나서야 비로소 삶의 치열함을 거두었다. 천천히 걸을 줄 알게 되었고, 들풀들을 깊이 고개 숙여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꼭 나쁘지만은 않았다고 늘 생각한다.
 
항암 5년을 맞은 지금, 나는 다시 새로운 꿈을 꾼다. 더 천천히 사는 법을 배우고, 더 낮게 고개 숙일 수 있기를. 그렇게 살아 다시 돌아오는 봄을, 더 오래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윤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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