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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윤하의 딸을 만나러 가는 길 (26) 바람 속에서 
 
[연재 칼럼 소개] 이혼을 하면서 두고 온 딸은 그녀에게는 늘 어떤 이유였다. 떠나야 할 이유, 돌아와야 할 이유, 살아야 할 이유……. 그녀는 늘 말한다. 딸에게 하지 못한 말이 너무 많다고. 열흘에 한 번씩 연재되는 <딸을 만나러 가는 길>은 딸에게 뿐만 아니라 이 땅의 여성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윤하의 고백이 될 것이다.

 

▲ 프랑스 릴의 자유대로 거리의 플라타너스.  그리고 그때 앉아서 우체부를 기다리던 돌  © 윤하 

 
북부 프랑스의 릴이라는 도시를 다시 방문할 기회가 있다면, 꼭 가보고 싶은 데가 있었다. ‘블르바흐 들 라 리베흐떼’ (자유대로)라 불리는 거리. 그 길가의 플라타너스들과, 앉아서 우체부 아저씨를 기다렸던 돌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이런 꿈은 그저 소망으로 끝날 거였다. 다 이룰 수 없는 꿈들 중 하나라고, 그래서 그저 잊지 않는 걸로 만족해하면서 살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 꿈을 이룰 기회가 찾아왔다.
 
내가 프랑스를 다시 찾은 건 지난 9월 말의 일이다. 프랑스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릴의 예전 집주인 미리암에게 알렸을 때, 그녀는 너무 반가워하며 한시라도 빨리 릴로 와서 자기 가족을 만날 걸 재촉했다. 그렇게 북부 프랑스를 다시 온 건 9년 만이다. 릴의 곳곳은 새로운 건물들이 세워져, 낯선 풍경으로 변해 있었다. 그러나 시내 중심가의 오래 된 건물들은 예전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었다.
 
이런 변함없는 모습은 참으로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나의 발길을 재촉한다. 근처 거리에 들어섰을 때, 망설임 없이 내가 다니던 길로 발길이 옮겨지고, 그 발걸음은 아주 자연스럽게  리베흐떼 거리로 흘렀다.
 
내가 소망한 대로 아름드리 플라타너스들은 여전히 거리를 휘덮고 있었다. 얼굴만한 마른 플라타너스 잎들이 늦가을이면 서걱서걱 소리를 내며 떨어지곤 했다. 이런 풍경 때문에 더 추웠던 시절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날도 이렇게 을씨년스런 늦가을이었다.
 
“아! 돌도 여전히 있네!”
 
너무 반가운 마음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나의 서글픔을 알고 있는 친구를 만날 때처럼, 나는 그 돌을 보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리고 덥석 그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더 눈이 아리다.
 
일 년간 살았던 이 기숙사에서는 나 혼자 덩그러니 남아 주말을 보내는 일이 잦았다. 게다가 우편물을 배달해 주는 직원이 없는 주말에는 편지조차 받을 수 없어, 고립감이 더욱 컸다.
 
그런데 어느 날, 프랑스 남부에서 살고 있는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게 특별한 선물을 보냈다고. 계산대로라면 그 우편물은 토요일에 도착할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날 아침, 나는 친구가 보냈다는 선물을 당장 받고 싶어 밖에서 우체부 아저씨를 기다리기로 했다.
 
매일 오고가는 길가의 가로수가 플라타너스라는 걸 깨달은 건 바로 그때였다. 밤새 비가 내리고 갠 11월 오전, 아름드리로 늘어서 있는 플라타너스들은 쉼 없이 바람에 잎을 떨구고 있었다. 나는 문 앞에 있는 작은 돌 위에 앉아 있기도 하고 서성이기도 하며 우체부를 기다렸다.
 

▲낙엽 지는 플라타너스들을 볼 때마다 떠나지 않고 튀어나오는 기억이 있다. 

 
그런 내 곁으로 한 남자가 어린 아이를 안고 지나갔다. 나를 지나쳐 한참 밑으로 내려갔던 그가 다시 돌아, 또 내 곁을 지나간다. 무척 초조해 보인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혹시, ‘OOO클리닉’을 아세요?”
 
내게 다가와 질문했다.
 
하지만 그의 질문에 나는 “모르겠는데요” 라고 짧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 안타까운 건 사내의 팔뚝에 아이의 바지가 쑥 말려 올라가 종아리가 허옇게 드러나 있었다. 그런 상황을 눈치 채지 못한 채, 사내는 허둥거리며 병원을 찾고 있었다. 바람이 차고, 그 바람 속에서 얼굴조차 발갛게 얼어 있던 아이와 길을 헤매고 있는 사내를 보면서, 나는 두고 온 딸아이를 생각했다.
 
‘바람 속에서라도 그녀를 안고 있었어야 했을까?’
 
우편배달부를 기다리며 내내 그 생각을 했다.
 
그렇게 두 시간 넘게 기다려, 결국 우체부 아저씨를 만났고 예상대로 프랑스 남부에서 친구가 보냈다는 우편물과 함께 한국의 한 친구로부터도 뜻밖의 소설책을 선물 받았다. 그날 돌아와 시름에 겨워 주말을 보내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순전히 그 소설책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부녀의 모습은 오래도록 내 기억을 떠나지 않고 한 번씩 낙엽 지는 플라타너스들을 볼 때마다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난 돌에 앉아 또 그때처럼 낮게 중얼거린다.
 
“그녀의 손을 놓지 말았어야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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