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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자야, 귀촌을 이야기하다: 다섯째 이야기 ② 
 
듬성듬성해진 텃밭을 한 바퀴 휘 돌며 고랑에 가득한 잡풀을 뽑다가, 나는 규모가 작은 감나무 아래 이랑에 쪽파 구근을 심기로 한다. 두 개의 두둑 중 한 곳엔 이미 지난여름에 심은 당근 20여 포기가 쌉쌀한 향기를 내뿜으며 연한 주홍색 어깨를 넓혀 가고 있다.
 
떨어지는 감 폭탄을 견뎌내면서도 놀랄 만큼 잘 자라준 당근을 곁눈질해 가며, 나는 그 옆 고랑에 쪼그리고 앉아 쪽파를 심는다. 늦어도 일주일 후면 싹이 올라오고 늦가을이면 파란 줄기가 제법 뾰족해지다가 겨울을 넘기면서 마침내 달고 매운 제 맛을 내리라. 그러고 나면 뽑히고 다듬어져 밥상에 오르겠지. 그럼 그다음은? 이 자리엔 또 어떤 작물이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게 될까?
 
오직 사람만 없는, 집

▲마을 입구 가로등이 켜지는 저녁. 더 이상 불이 들어오지 않는 빈집을 보면서, 가족이 아니어도 함께할 수 있는 삶을 그려본다. © 자야

계절이 바뀌고 해가 바뀜에 따라 텃밭에 서로 다른 작물이 올라오고 들판에 서로 다른 풀과 꽃들이 자라는 것을 보면, 본래 사람 사는 일도 저러하지 싶다. 한 영혼이 지구별을 떠나면 또 다른 영혼이 몸을 입고 오듯이. 나는 사람이 있으면 드는 사람도 있듯이.

그러나 대부분의 시골 마을에는 나는 자리를 채울 만큼 드는 이가 많지 않은 게 사실이다. 귀농 귀촌 인구가 꾸준히 늘고 있다지만 아직은 역부족인 것일까. 아니면 끼리끼리 모이는 특성상 일부 지역에만 편중되는 것일까. 우리 동네는 해마다 새 얼굴들이 들어오는데도 전체적으로 치면 내가 이사 온 후 빈집이 세 곳이나 늘었다.
 
그 중 한 곳은 상동 할머니 댁으로, 옆집에 곧바로 새 사람이 든 것과 달리 그 집은 일 년이 넘어가도록 그저 방치되어 있는 상태다. 볕 좋고 무료한 오후, 바싹 말라가는 콩잎 서걱대는 소리에 발을 맞춰 조용한 동네를 한 바퀴 돌다 보면 상동 할머니네 이층 방 깨진 유리창으로 서늘한 기운이 새어 나오는 걸 느낀다.
 
헛간에 쟁여놓은 땔감들은 그대로고 사랑채 낡은 벽 위에 걸린 우산들도 제 자리에 있을 텐데. 오직 사람만 없는 그런 집 앞을 지나노라면 “접시는 있어도 식욕은 없다”고 노래한 어느 시인의 쓸쓸한 읊조림이 가슴을 파고드는 것만 같다.
 
얼굴이 작고 동그란 상동 할머니는, 이런 표현이 어르신에게는 부적절할지 몰라도, 참 귀여우셨다. 늙으면 아기가 된다는 말이 그처럼 잘 어울리는 분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자식들은 전부 출가하고 할아버지마저 먼저 떠나 보낸 처지가 비슷해서인지, 상동 할머니와 옆집 할머니는 비교적 가까워 보였다.
 
그나마 거동이 덜 불편한 상동 할머니가 옆집에 들르는 적이 많았는데, 그럴 때면 그 집에 가사도우미로 오는 젊은 여자 분이 호박전이며 파전 따위를 부치느라 들이붓는 고소한 기름 냄새가 우리 집 마당으로까지 건너왔다.
 
하지만 사이가 가까운 만큼 티격태격하는 일도 잦았는지, 옆집 할머니는 툭하면 내게 “그 할망구 제 정신이 아니여. 무슨 딸이 왔다 갔다고 자랑을 해쌌는지. 내가 안 온 거 뻔히 아는디.” 하면서 상동 할머니의 흉을 보곤 했다. 그 모습이 마치 별 거 아닌 일로 친구와 다투고 토라지는 소녀 같아서 그저 웃고 넘겼는데, 훗날 알고 보니 상동 할머니는 실제로 치매를 앓고 계셨다.
 
네 발로 칼바람 속을 헤매다
 
이사 오고 몇 달이 지나도록 나는 상동 할머니가 가끔 정신을 놓는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 길에서 인사를 드리면 매번 처음 본다는 듯한 표정으로 “댁은 어디 사요?” 하고 같은 질문을 던질 때도, 나는 그저 습관처럼 건네는 말씀이려니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옆집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상동 할머니는 텅 빈 논에 들어가 한겨울 모진 바람 속을 몇 시간씩 헤매다 나오는 등의 이상한 행동을 하시곤 했다. 더군다나 그 땅 옆에서 도로 공사를 하고 있는 인부들에게 큰소리로 욕을 해가며 시비를 걸기도 자주 하셨다. 그런 할머니를 볼 때마다 동네 분들은 아무래도 정신이 점점 이상해지는 것 같다며 뒤에서 이렇게 수군거렸다.
 
“하이고, 할매하고는. 아직도 저 땅이 자기 땅인 줄 아는가베. 넘어간 지가 언젠데.”
동네 아주머니 말을 빌리면, 그 논은 원래 상동 할머니 소유였으나 인근에서 진행 중인 고속도로 확장 공사를 시작할 때 아들이 나서서 처분했다고 한다. 그런데 치매로 그 사실을 잊은 할머니가, 공사 현장에서 굴착기 소리만 나면 혹여 당신 논이 어떻게 될까 봐 걱정되어 불편한 다리를 끌고 기어이 논바닥으로 내려가는 거라고.
 
그러던 어느 날 산책을 하러 나서는 길에 나는 할머니를 만났다. 인사를 드리니 할머니는 예의 그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뉘요? 어디 사요?” 하셨다. 파란대문 집이요, 하는 나의 대답에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으셨다. 누렇게 변색된 이 사이사이에 점점이 박힌 고춧가루들이 반짝이는 태양 아래서 더 붉게 보여, 어쩐지 나는 조금 슬퍼졌다.
 
저수지로 향하는 길에서 내려다보니 할머니는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이제는 당신 땅이 아닌 그 논바닥을 걷고 계셨다.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할머니를 지켜보았다. 오른쪽 지팡이를 먼저 짚고 그다음에 오른쪽 다리를 옮기고, 이어서 왼쪽 지팡이와 왼쪽 다리를 차례로 땅에 디디는 불완전한 걸음걸이를. 얼굴은 아기 같이 순하고 귀여우나 걷는 폼은 마치 상처 입은 네 발 짐승처럼 처연해 보이는 뒷모습을.
 
그로부터 얼마 후, 상동 할머니 또한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갔다. 치매가 악화되어 아들이 모시고 갔다고 했다. 그 이후로는 별 한 조각 없는 어둔 밤이 와도 그 집엔 더 이상 불이 켜지지 않았고, 어느 날 저녁인가 먼발치에서 그 집을 올려다보며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저 집이 한겨울 모래바람 휘몰아치는 논바닥보다 더 춥고 쓸쓸했을지도 모르겠다고. 그래서 할머니가 그처럼 바깥을 헤매고 다녔는지도 모르겠다고.
 
두려움의 뿌리, 개체로서의 나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슬픔이 잠재되어 있다. 인생에 확실한 게 있다면,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운명이란 게 있다면, 우리 모두 매 순간 늙어가고 죽어가고 있다는 그 하나뿐이기에. 특히 나이가 들면서는 그것이 곧 현실로 닥칠 수 있다는 생각에 젊고 건강할 때보다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불안해할 수 있다.
 
당장 내 친구들만 봐도 그렇다. 내가 시골에서 만난 할머니들 얘기를 하면 그들은 이렇게 말하곤 한다. 우리도 독거노인 될 날이 멀지 않았다고. 그게 바로 피할 수 없는 우리들의 미래라고. 웃자고 하는 말임을 모르진 않으나, 실은 아무도 크게 웃지 않는 것이 스스로 던진 뼈 있는 농담에 찔려 아파하는 것 같다.
 
죽음에 관한 두려움을 포함해 인간이 느끼는 모든 두려움은 분리감에서 온다고 어느 현자는 말했다. 여기서 분리감이란 단지 내 가족, 친구, 이웃과의 절연된 관계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내가 발 딛고 사는 자연 환경과 그에 깃들어 사는 온 생명, 그리고 보다 넓게는 우주 혹은 신과 내가 단절되어 있다는 고립감에 가깝다.
 
전체와 분리된 개체로서의 나는 얼마나 나약하고 보잘것없는가. 그리하여 육체에, 돈에, 사회적 지위와 명예에, 크고 작은 관계에, 그리고 무수한 말과 행동과 생각에 얼마나 많이 흔들리고 무너지는가.
 
즉, 분리감이 크고 고립감이 강할수록 사람은 자기 자신이 아닌 조건에 연연하게 된다. 그 결과 가난하고 병들고 약하고 늙을수록 불행해진다는, 그 불행이 내게 닥칠까 두렵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기에 더더욱 불행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영적인 수련 전통에서는 하나같이 이렇게 강조한다. 조건화된 나(에고)에서 깨어나 참나의 본성을 회복할 때 비로소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하지만 이런 말은 가슴으로 경험되어야만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것이기에, 사실 말로 표현하는 자체가 한계를 지닌다. 나 역시 요가와 명상을 수행하는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꼭 요가 자세와 호흡을 수련하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명상을 할 때 전체로서의 나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텃밭에서 한 줌 흙을 쥘 때, 갓 돋아난 싹의 수줍은 눈웃음과 마주칠 때, 오래된 나무 아래 서서 하늘 높이 뻗은 가지를 쳐다볼 때, 동네 분의 친절하고 따뜻한 마음의 결과 닿을 때, 나는 더 자주 우주와 연결돼 있는 내 안의 안테나가 진동하는 것을 느끼곤 한다.
 
그러고 보면 보다 큰 존재에 더 잘 감응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하여 더 많은 느긋함과 평정심과 초연함을 누릴 수 있다는 점에서 나는 본능적으로 시골을 택한 것 같다. 물론 나 역시 친구들처럼, ‘언젠가 나도 독거노인이 되지 않을까. 내 육신 하나 내 맘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병들지는 않을까. 홀로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게 되지 않을까’ 걱정한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그 모든 걱정과 고민이 지금 내가 경험하고 느끼는 전체로서의 나를 제압할 정도는 아니라는 점에 위안하며 스스로를 다독일밖에.
 
더 늦기 전에 함께할 수 있다면
 
얼마 전, 역시나 독거노인으로 여생을 불행하게 살아갈까 걱정하는 친구들에게 나는 이런 말을 했다. 독거노인끼리 가까이 모여 살면 더 이상 독거노인이 아니잖아. 그런 환경이었다면 우리 동네에서 사라져간 그 할머니들도 덜 외롭고 덜 아프지 않았을까.

사실은 시골에 내려올 때부터 그런 생각을 했었다. 마음 맞는 사람들이(독신이든 가정이 있든) 가까운 거리에 살면서 서로 몸과 마음을 주고받으면서 살면 좋겠다고. 또한 각자가 가진 재능과 소질을 살리는 방향에서 공동의 일 혹은 문화를 도모해 더 넓은 틀에서 교류를 하게 된다면 참 좋겠다고. 이미 이런 시도를 하고 있는 사람이 여기저기 생기고 있는 걸로 보아 실현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거라고.
 
문제는 내 말에 박수를 치던 친구들이 막상 현실로 돌아오면 고개를 갸웃한다는 것이다. 먼저 시골에 내려와 사는 내 꼴이 그들 보기에 변변치 않아서일까. 아니면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무튼 그들은 의심하고 불안해한다. 시골에서 과연 먹고살 수나 있을지. 도시에서도 하지 못하는 ‘좋아하고 의미 있는 일’을, 그것도 함께 도모할 수 있을지. 당장 시작한다면 어디서부터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가만 보면 이런 질문들은 오롯이 내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들을 나무랄 수도 채근할 수도 없는 나는, 그저 같이 늙어가는 그들의 등을 바라보며 이렇게 속으로 외쳐댈 뿐이다. 얘들아, 독거노인이 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한 살이라도 젊을 때 함께하는 법을 연습하면 안 되겠냐. 쳇!   (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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