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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장애여성 숨은그림찾기(9) - 영화 '여행자'

▲ 영화 '여행자'의 포스터 이미지     
 
핑계 같지만 예전엔 영화와 책을 보는 것이 일상에 해당했었는데, 지금은 그것들에 몰입하는 일이 사치스럽게 여겨질 만큼 여유 없이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인지 영화나 책을 고를 때 꽤나 망설이게 된다. 투자 대비 확실한 무언가를 얻겠다는 심사라고나 할까. 흥행에 성공한 작품은 감동이 적을 것 같아 피하고 그렇지 않은 작품은 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 같아 꺼리게 된다. 감동을 추구하자니 지나치게 진지한 일상에서 벗어나보겠다는 취지와 멀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니 진퇴양난이다. 그런데 올 여름 내내 계속됐던 지리한 장마에서 벗어난 뒤 용케도 만난 영화 '여행자'는 딱 내가 찾던 바로 그 영화였다.
 
'여행자'(프랑스어 원제로 ‘아주 새로운 삶’을 뜻하는 Une Vie Toute Neuve, 영어로는 A Brand New Life)라는 제목도 생소했지만, 우니 르꽁트(Ounie Lecomte)라는 감독은 더더욱 낯설었다.

하지만  2010년 제12회 서울 국제여성영화제 상영작이라는 해설 때문에 일단 끌렸다. 여성이라는 그룹에 온전히 속하지도 못하면서 여성, 페미니즘 하면 무조건 끌리는 이런 현상도 일종의 식민주의일까? 어쨌든 영화는 기대를 배반하지 않았다. <오아시스>, <밀양>의 이창동 감독이 프로듀서뿐 아니라 공동각본가로 나선 영화라는 걸 미리 알았다면 조금의 망설임 없이 이 영화를 선택했을지도 모를 텐데.

 
절제된 감정으로 아픔을 응시하다
 
'여행자'는 아홉 살 소녀 진희가 경험하는 이별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니 르콩트 감독이 아홉 살이었을 때, 한국에서 프랑스로 입양되기 전 가톨릭 수녀들이 운영하는 서울의 성 바오로 고아원에서 보낸 1975년에서 1976년까지 한 해 동안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가난했던 시절, 입양을 소재로 한 데다 아홉 살 소녀의 시선으로 그려진 영화인만큼 한두 장면 이상에서 눈물깨나 쏟아질 법한데도 영화가 끝날 때까지 감정은 절제되어 표현되었다. 그로 인해 감정이 정화되는 느낌이었는데, 이는 섬세한 스토리 구성과 연출력으로 인해 더욱 빛을 발한 듯하다.

 
2009년 제22회 도쿄 국제영화제 최우수 아시아 영화상, 2009년 제3회 아시아태평양영화상 최우수 어린이 영화상, 2009년 제40회 인도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 수상이라는 이력으로 보아 '여행자'의 작품성은 이미 입증이 된 듯하며, 주인공 진희 역을 맡은 김새론의 연기 역시 어린 소녀의 연기라고 보기 힘들 만큼 신들린 연기로 언론의 찬사를 받은 바 있기에 재론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다만, '여행자'에서 내 시선을 강력하게 끌었던 것은 그리 비중이 크지 않았던 다음의 인물들이었다.
 
먼저 진희의 아버지. 딸에게 옷을 사주고 함께 저녁을 먹는 장면, 딸을 보육원에 맡기고 돌아가는 장면 등에서 진희 아버지 역할을 한 설경구는 한정된 프레임 내에서 얼굴이 드러나지 않도록 몸으로 절제된 연기를 했다. 그러면서도 영화 도입부에서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영화의 전반적인 정서를 이끌어나가는 비중 있는 캐릭터이다.

다음으로 보육원에 입소한 진희의 건강검진을 했던 의사 역할의 문성근. 그는 자신의 잘못으로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진희에게 "왜 그렇게 생각하니? 그렇지 않아!"라고 따뜻하게 말해준다. 

▲ 아홉 살 진희를 둘러싼 세계는 아프고 혼란스럽다.  그러나 세상을 바라보는 영화의 시선은 절제되고 포용적이다.  
 
아빠에게 버림받은 폭력적인 상황인데 등장인물 중 어떤 남자도 폭력적이지 않은 공통점을 지녔다는 것이 다소 의외지만, 그런 상황이 작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느껴지도록 그려진 것이 더욱 의외다. 보육원 원장마저도 자신의 집에 한번 가봐 달라는 진희의 부탁을 외면하지 않고 들어주는 넉넉한 인물로 그려져 있다.
 
적어도 아홉 살 진희를 둘러싼 세계는 아프고 혼란스럽긴 하지만 폭력적인 세계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 세계는 의상디자인을 전공하고 의상담당으로 영화계에 입문한 뒤 마침내 영화감독으로 성공한(?) 우니 르콩트가 애써 미화하려는 어린 시절 혹은 모국(母國)이 아니라 이별과 혼란, 아픔을 겪고 성장한 어른 진희가 마침내 마주하고 있는 세상인 듯 보였다.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별은 폭력이지만 그녀는 그 이별을 경험한 뒤 아주 새로운 삶으로 여행을 떠난 것이었다.
 
분단, 전쟁, 산업화……. 어른, 남자, 아빠들이 만든 폭력적인 세상에서 마침내 버려진 아홉 살 소녀가 피해자의식을 넘어 이토록 절제되고 포용력 있는 세계를 만들어낼 수 있는 힘이 있다니 놀랍다. 영화 속 진희는 아픔, 고통, 혼란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것과 맞부딪치며 조금씩 성장한다. "그래서 주인공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가 아니라 낯선 땅에 첫 발을 내딛는 진희의 두려움과 기대 섞인 눈망울로 영화가 결말을 맺듯이 어쩌면 어른 진희는 지금 현재, 혹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수많은 이별과 아픔을 경험하며 살아갈 것이며 그 과정에서 더욱 성장할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사랑스런 장애소녀
 
마지막으로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든 또 하나의 인물은 고아성이 연기한 열일곱 살 장애소녀. 그녀는 다리를 저는 장애로 인해 나이를 꽉 채우도록 입양되지 못하고 고아원에서 어린 동생들을 돌보는 보조 역할을 한다. 짝사랑하는 남자에게 마침내 고백을 하지만 거절당하고 자살까지 기도하지만 실패한다. 그리고 결국 가난한 집으로 입양되어 떠나게 된다.

입양부모의 태도나 외관으로 보아 그녀에게 펼쳐질 미래가 녹록치 않음을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데, 이는 그녀만의 특수성이 아니라 장애여성이 처한 현실을 제대로 반영한 대목이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해냄으로써 홀로 애태우는 수동적인 장애여성상을 뛰어넘은 것에도 박수를 보내고 싶다. 다시는 생명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경건한 의식을 치르는 진지한 장면에서 급기야 웃음보를 터트리고 마는 이 사춘기 소녀는 더 이상 불쌍하지도 낯설지도 않은 참으로 사랑스런 여자였다.

 
성인,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 특히 여아와 장애를 가진 소녀는 폭력적인 세계의 한가운데 놓일 수밖에 없는 약한 존재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무수히 많은 소녀들이 실제 폭력에 노출되어 살아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피해자로만 스스로를 규정하기에는 삶이 너무도 피폐하고 옹색하기에, 우리는 어떻게든 피해자로서의 삶이라는 어둡고 긴 터널을 빠져나와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고자 발버둥치는 것이리라.

그 과정에서 나보다 먼저 혹독하고 치열한 과정을 통해 더 넓고 깊은 세계에 발을 디딘 여성의 이야기는 힘이 된다. 그것이 ‘여행자’라는 잔잔한 영화가 오래도록 내게 여운을 준 이유인 듯하다. (백발마녀)

인터넷 신문 <일다> www.ildaro.com
 는 2003년 창간한 대안언론입니다. "이루어지다"란 의미를 가진 <일다>는 여성과 소수자의 시선으로 사회를 비추는 매체로, 다양한 작가와 저널리스트를 발굴해왔고, 독자들의 후원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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