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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추은혜의 페미니즘 책장 (4)
거다 러너 「왜 여성사인가」
사르트르의 재미있는 사고 실험이 있다. 어느 한 방에 여러 명의 사람들을 모아 놓고 그 중의 한 사람을 뽑게 한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이 그 한 사람을 유심히 관찰한 후에 그 사람을 밖에 나가 있게 한다. 이제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은 돌아가면서 조금 전까지 함께 있었던 그 사람을 설명하는 말을 한 마디씩 하게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관찰한 것들, 느낀 것들을 종합하면 ‘지금 여기’에 부재하는 그 사람에 대한 이미지가 만들어지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종합된 그이의 이미지는 실재하는 그와 동일할 것인가.
답은 ‘전혀 동일하지 않다’이다. 하나의 이미지가 구축된 이후에 다시 그 사람을 방안에 불러 들였을 때, 사람들은 자신 앞에 현현하는 그의 얼굴이 전혀 낯선 것임을 알게 되고 당황하게 된다는 것이다. 실재와 형상에 대한 철학적 논의는 차치하더라도, 적어도 이 사고 실험에서 사람들의 관점은 각각 다 다르며 기억이라는 것은 다분히 선택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모든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우리는 선택적으로 기억하며, 끊임없이 그 나머지 부분을 망각하면서 살고 있다.
거다 러너(Gerda Lerner)는 이러한 ‘선택적 기억’, ‘거대한 망각’의 문제를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새롭게 재조명한 학자이다. 그녀는 미국의 역사학자이며 여성학의 선구자로서 최초로 여성사 박사과정을 개설하였다. 대표작으로「가부장제의 창조」,「여권의식의 발생」,「왜 여성사인가」등이 있으며 그 외에도 수많은 저술과 강연회 등으로 기존의 역사학계에서 가려져 있던 여성사의 장을 연 학자로 평가되고 있다.
「왜 여성사인가」는 그간 그녀의 강연원고, 에세이 등을 묶어서 펴낸 것으로 거다 러너라는 한 개인의 삶에서의 여성사의 의미와 나아가 페미니즘에서 여성사가 지니는 의미, 앞으로 써져야 할 여성사 전반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책이다.
선택적 기억과 망각의 역사를 넘어
▲ 거다 러너의 책 <왜 여성사인가 >(푸른역사, 2006)
“'거대한 망각', 바꿔 말하면 선택적 기억은 여성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여성들은 인류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세상의 일과 의무의 절반을 수행했고, 역사에서 능동적인 동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여성들은 인류 발전 과정에서 단지 '주변적인' 공헌만을 한 존재들로 역사에 기록되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보는 것은 남성 역사가들이 가부장적 가치들을 근거로 해서 내린 선택적 기억입니다.” (왜 여성사인가 149쪽)
‘세계사’적 관점에서(세계사에 괄호를 한 이유는 남성중심의 역사관에 기초한 것으로 구분하기 위해서이다) 국제정치는 거칠게 요약하자면 ‘전쟁과 평화의 연속’이다.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전쟁은 각 시대를 구분하는 주요한 사건들로서 등장했고, 그 속의 전쟁 영웅들에 대한 전기, 무용담 등은 역사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선언하는 기록이었다. 반면 ‘인류의 절반’에 해당되며 어느 곳에나 존재했던 여성들은 마치 기록될 가치가 있는 어떠한 역사도 지니지 않은 양 여겨졌다. 러너는 이러한 여성들의 과거에 대해 “주변화의 긴 역사”라고 지칭한다.
“이런 주변화의 긴 역사는 여성들의 자기 인식과 태도, 집단행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지금은 무척 자명한 일이지만, 최근까지도 거기엔 적절한 '이름'조차 없었다. (중략)
인류의 절반인 여성들은 종속된 채 수천 년 동안 지식과 자원을 빼앗겨 왔으면서도, 자신들이 능욕당하고 학대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도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2세기 전까지만 해도 조직적인 저항조차 할 수 없었다. 역사가 없는 사람들은 완전한 인간으로 간주되지 않으며, 이런 판단을 그들의 생각에 반영시킨다. 가능한 대안을 전혀 알지 못한 채, 그들은 자신을 억압하는데 협력하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은 진실로 문제가 된다.” (같은 책 395~396쪽)
우리가 무엇인가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순간, 부분을 전체로 파악하고 다른 절반을 망각하게 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이 오류의 심각성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 아래서 억압과 배제의 대상이 되었던 여성들의 역사를 통해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이데올로기는 하나의 관념에 불과하지만 모든 이데올로기는 현실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 또 하나의 실체로 존재한다. 이는 여성에 대한 수많은 편견과 왜곡된 인식이 ‘누군가의 생각’이지만 그로 인해 실제로 고통 받고 차별받는 여성이 존재한다는 데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따라서 러너는 ‘사회적으로 구성된 범주’에 주목한다. 그녀의 개인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그녀는 유태인 태생으로 파시즘을 경험하고 미국으로 이민을 가는데, 이러한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차별에 주목하게 된다. 러너는 스스로를 ‘주변인’으로 지칭하며 계급, 인종, 성차별을 각각의 분리된 문제로 인식하지 않고 그 모두가 함께 얽혀 복합적으로 전개되는 것으로 파악한다.
계급, 인종, 성 그 어느 하나 실재하는 것이라기보다 다른 사람을 ‘분류’-그에 함축되어 있는 ‘억압’-하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구성된 범주로 보는 것이다. 그러한 범주는 권력과 결부되면서 폭력이 된다. 앞서 언급한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와 마찬가지로, 사회적으로 구성된 인종과 계급 또한 개개인에게 적용될 때 그의 자아와 삶의 기회, 경험에 ‘실재적으로’ 작용하는 현실이 되는 것이다.
“'차이' 자체는 문제되지 않는다. 구축된 차이들에 호소하여 지배를 정당화하는 것, 그것이 바로 문제다.” (같은 책 379쪽)
차이를 포용하는 역사학을 위해
러너에 따르면, 지금까지 여성은 기록된 역사 속에서 ‘생략된 집단’이었다. 여성의 삶은 남성이라는 존재를 매개로 하는 결혼과 출산, 양육에 국한되어 왔으며 그마저도 그 고유한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새로운 여성사를 위해 ‘차이’를 바탕으로 역사를 재해석하고자 한다. 우리 문화 속에 존재하는 압도적인 남성 중심적인 편향에 맞서 페미니즘적 사고의 개념 틀을 기반으로 한 이 역사는 앞으로 우리가 직면할 새로운 문제 상황들에 대한 해석의 관점을 제공할 수 있으리라고 보는 것이다.
“우리가 과제로 삼는 것은 각양각색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남성과 여성이 서로 간의 차이를 감안하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교통하는 모습을 담아 하나의 전체사(holistic history)를 창조하는 일이다. 그와 같이 재구성된 과거가 풍부한 결을 지닐 수 있는지는 우리가 차이를 포용하고, 수많은 언어에 귀 기울이며, 분리보다는 상호 의존성을 파악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여성의 언어와 지각양식을 학습하면서, 우리는 관계나 실존에 중점을 두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분류하고 배열하며 분석하는 남성적인 양식을 사용할 때조차 우리 자신이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요점은 두 양식이 언제나 공존하며 보완관계에 있었다는 데 있다. 우리는 그런 현실을 인식하고 수용하면서 그것을 반영하는 역사학을 추구해야만 한다.” (같은 책 297쪽)
포스트모던 시대에 이르러 소위 ‘진리’라고 불리던 수많은 가치들이 해체되게 되는데 ‘단일한 하나의 역사’에 대한 믿음도 그 중의 하나이다. 주로 거시적인 역사 연구가 이루어지던 과거에 비해 최근 들어 미시사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도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단 하나의 권력적 시선이 아닌, 같은 시간과 공간에 살았던 수많은 존재들, 그 각각의 시선에 주목하고자 함이다.
역사에 대한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되고 또 논의되는 까닭은 그것이 단순한 집단적 기억 이상이며, 역사 그 자체가 계속해서 재해석되고 형성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선택적 기억과 망각은 인간에게 있어 불가피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누군가에게 폭력으로 작용하지 않을 수 있게 노력하는 것, 그 각각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추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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