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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장애여성 숨은 그림 찾기(10) - 뮤지컬 '톡식 히어로' 

“장애여성, 숨은 그림 찾기”는 다섯 명의 장애여성들이 다양한 ‘매체 읽기’를 통해 비장애인, 남성 중심의 주류 시각으로는 놓칠 수 있는 시선을 드러내는 연재입니다.
 

외모 대신 괴력을 얻게 된 남자 주인공  

▲ 대학로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톡식 히어로> 포스터 이미지   
 
장애여성의 전형적 이미지 중 하나가 순정만화에서 튀어나온 듯 청순가련한 모습이다. 순정만화 캐릭터 중에 실제로 그런 인물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아는 만화는 보노보노(주인공이 해달인데다 딱히 장애를 가진 캐릭터도 없다)가 전부니까. 어쩌면 <독일인의 사랑>이나 <러브 스토리> 같은 이야기에 등장하는, (이제는 지겨운) 불치병의 청순가련 여주인공이 그 원형일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호리호리한 장애여성이 휠체어에 앉아 긴 머리에 초롱초롱한 눈으로 쳐다보면 먼저 다가가 도와줘야 할 것 같고, 또 그러고 싶은 모양이다. 만약 그 장애여성이 도움보단 데이트를 더 원한다면 매력이 반감될까?
 
영화 <톡식 어벤저(The Toxic Avenger, 1985)>를 뮤지컬로 만든 <톡식 히어로>가 재공연 중이다. 인기배우 오만석이 연출하고 솔비와 이기찬 등의 스타가 출연할 뿐 아니라, 사무실이 밀집한 강남에서 공연장이 밀집한 대학로로 공연장도 옮기면서 초연보다 더 많은 관객을 끌어들이고 있는 것 같다. 미국식 B급 코미디 정서를 좋아하는 관객이 한국엔 많지 않다는 점을 고려해 원작을 어설프게 타협시킨 느낌이지만 배우들의 열연만으로도 재밌게 볼 수 있는 공연이다.
 
이 작품에선 핵폐기물 때문에 (사고 전에도 그다지 뛰어나진 않았던) 외모를 잃는 대신 괴력을 얻게 된 범생 '멜빈'이 남자 주인공이다. 그의 파트너는 바비 인형 몸매의 금발 아가씨 '새라'다. 초능력을 가진 영웅 영화에선 으레 그렇듯, 새라도 멜빈이 지켜줘야 할 연약한 여성이다. 게다가 그녀는 시각 장애인이다. 생각해보면 슈퍼 히어로가 좋아하는 여성은 장애인이건 비장애인이건 상관없을 법하다. 어차피 연약해서 악당의 표적이 되는데다, 사고를 일으켜 항상 남자 주인공에게 수고를 초래하니까. 그래도 빼어나게 예쁘기만 하면 되지 않는가.
 
여기까지 말하면 새라도 수동적이고 혼자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평범한(?!) 여주인공이 아닐까 추측할 수 있지만 알고 보면 그녀는 조금 특별하다.
 
몸매 좋은 남성을 밝히는 속물 여자 주인공
 
새라의 꿈은 멋진 남성과의 그럴 듯한 연애 스토리로 오프라 윈프리 쇼에 출연해서, 그 홍보 효과로 그녀가 구상하는 할리퀸 소설이 대박을 내는 것이다. 새라에게 오프라는 교황과 같은 존재다. 오프라가 상징하는 바대로, 새라 역시 세속적인 성공에 관심이 많다. 또 몸치장도 열심이어서, 시각장애인을 위한 <보그> 특별판이 제작된다면 아마 그녀에겐 그게 성경일 것이다.
 
새라는 남성을 (성적으로) 유혹하는 데도 역시 매우 적극적이다. 시각장애인이어서 상대방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데도 잘 생기고 몸매 좋은 남성을 밝힌다는 사실이 재밌다. 멜빈이 공부만 잘하는 ‘너드’였을 땐 "그저 친구"일 뿐이다가, 핵폐기물을 뒤집어쓰고 ‘식스팩 몸짱’(“톡시”라는 가명을 쓴다)이 되었을 땐 어떻게든 침대로 유혹하려 하는 장면에선 그 앙큼한 귀여움에 폭소가 터진다. 속물인데도 미워할 수가 없다.

현실에서 장애여성에 대한 비장애인 대다수의 편견은 이와 반대이다. 술 한 잔 못 마실 것 같고, 돈 얘기 못 할 것 같고, 남자가 리드해야 겨우 끌려올 것 같고, 섹스는커녕 키스 한 번 못 해봤을 것 같고.
 
특히 마지막 ‘섹스’와 ‘키스’에 대한 선입견이 압권이다. 중년 및 노년층의 남성들이 나에게 접근할 때도 대놓고 그 점을 물어본다. "남자 사귀어 본 적 없지?" 엊그제 나는 "공원에서 데이트 하다가 키스 타이밍이 오면 곤란하다. 벤치에 나란히 앉아서는 모르지만, 휠체어 타고는 무리다"고 농담을 했다가 상대방을 놀래게 만들었다. "그럼 키스 해본 거야?" ‘이보세요들, 저도 삼십대란 말씀입니다!’
 
장애여성에게는 더 엄격한 순결의 잣대
 
"저 여자는 장애인이라 남자 사귀기 힘들었을 것 같다"는 편견이 오히려 장애여성의 매력 포인트가 됐달까. 그래서 상대적으로 성적 능력이 쇠퇴하는 중년층 이상의 남성에게 장애여성은 ‘들이댈 만한 대상’이다.
 
반대로 장애여성이 조금만 성적인 농담을 해도 바로 “밝힌다”는 낙인이 찍히기도 한다. 물론 그건 비장애 여성의 경우도 마찬가지지만, 장애여성에 대한 ‘건전’내지는 ‘순결’의 잣대는 훨씬 엄격하다. 특히 "장애인들은 섹스 할 기회가 없어서 그런지 엄청 밝히더라"는 편견까지 재생산될 때는 억울하다.
 
하지만 새라는 많은 남성을 사귀어봤을 뿐 아니라, 방사능 사고 이후 “톡시”라는 가상의 인격을 사용하는 멜빈이 숫총각이라는 얘길 듣고 그 자리에서 환호한다. "밝히는" 장애여성이지만 경험이 없어서도 아니고 장애 때문은 더더욱 아니다. 그저 그녀의 타고난 성격이다. 데이트 도중엔 호시탐탐 멜빈을 덮칠 기회만 엿본다.
 
맹랑하고 명랑한 장애여성의 등장
 
장애여성이 수동적일 거라는 편견은 아마 신체 기능이 비장애인에 비해 활발하지 않다는 데서 나온 거겠지만, 금전 관리나 고용계약에 있어서까지 그럴 거라는 생각은 어쩌면 장애여성을 조종하기 위한 고의일 수 있다. 나부터도 그런 경우를 몇 번 겪어봤다.
 
부모님 돈으로만 살아왔을 테니 금전에 대한 감각이 약할 거라 생각하거나, 곱게 자라서 아쉬운 소리 못 할 거라고 지레 짐작하는 걸까. 하지만 누구보다도 장애인에겐 돈이 많이 필요하다. 이렇게 복지가 안 되어 있는 사회에선 돈이 곧 자유다. 돈이 곧 건강이다. 전동 휠체어도 비싸고, 원하는 곳 다 가려면 택시를 타거나 자가운전을 해야 하고, 보장구를 사려 해도 돈이 많이 든다. 이런데 어떻게 장애여성이 돈에 민감하지 않을까.
 
받을 거 다 받고, 챙길 거 다 챙기면서 일하고 싶은 건 장애인이나 비장애인이다 마찬가지다. 어쩌면 바로 그래서, 장애여성을 고용할 때 비장애 여성보다 낮은 급여를 주고 마음대로 일을 부릴 수 있겠다는 계산이 있는 건 아닐까. 일단 일을 구할 기회가 적고, 그렇기에 돈이 아쉬울 거고, 그러니 고용주가 하자는 대로 따라와 줄 거라는 생각. 그런 고용주들에게 새라는 특이한 캐릭터일 수 있지만, 새라가 사회적 성공을 꿈꾸는 건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다. 물론 작품에는 그저 그녀의 많은 특성 중 하나로 그려져 있지만.
 
장애여성에 대한 편견의 스펙트럼이 넓은 가운데 톡식 히어로는 맹랑하고 명랑한 장애여성을 등장시켜 신선한 웃음을 던진다. 새라가 비록 칙릿이나 읽고 할리퀸을 쓸 철부지 아가씨이긴 하지만 그건 시각장애여성이기 때문이 아니라, 금발이어서 인 것 같다. 못 생긴 슈퍼 히어로, 시각장애인 히로인이라는 설정은 파격적이지만 금발여성에 대한 편견을 웃음 소재로 삼아 곳곳에서 조롱하는 점은 아쉽다.
 
연약한 장애여성은 보통 비장애인 남성과 맺어져야 무대에 서거나 소설에 등장하지만(장애여성은 그렇게 해야 구원 받는 모양이다) 톡시 역시 사고로 얼굴에 장애를 입은 안면장애인이라는 것도 재밌다. 하지만 이런 설정에도 불구하고 "장애인 너희들끼리"만의 얘기 같지가 않다. 턱이 넓은 미국식 미남만이 수퍼 히어로가 될 필요는 없고, 그의 파트너가 꼭 비장애인일 필요도 없다.
 
이 작품은 그렇게 가벼운 방식으로 관객에게 여러 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녹색 괴물"이 나오는 또 다른 작품, 슈렉과도 비슷하다. 생각해보면 슈렉은 공주와 결혼해 황태자가 되고, 멜빈은 녹색당 당수이자 시장이 된다.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해피엔딩은 돈 아니면 권력인 모양이다.  (쫄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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