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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추은혜의 페미니즘 책장(2) 알리스 슈바르처「사랑받지 않을 용기」 
 
[페미니스트 20대 여성이 일상에서 부딪히는 고민과 그 해답을 찾아가는 페미니즘 책 여행이 시작됩니다. 폭력의 시대에 평등과 자유의 꿈을 꾸는 여성들의 생각과 삶을 소개하고, 이를 통해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자 합니다. www.ildaro.com]
 
나는 텔레비전을 잘 보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텔레비전을 ‘안 본다’고 말하는 편이 오히려 맞을 것이다. 개인의 취향 여부를 떠나서 일단 나의 생활 반경 이내에는 텔레비전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언제나 관련 소식에서 한 발 늦는 편이다. 가령 이미 텔레비전에서 방송되고 난 후에 인터넷 포털사이트 검색어 순위에 오르면 그제야 ‘이게 뭐지’하면서 클릭해 보는 것이다. 드라마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남들이 ‘본방사수’를 외치며 열광하고 있을 때는 혼자 다른 세상에 살다가, 시간이 한참 흐르고 ‘명작드라마’의 반열에 오르면 그때서야 그 드라마에 빠진다. 그래서 최근에야 나는 이미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린 「커피프린스 1호점」에 몰입하며 공유의 매력에서 한동안 헤어 나오지 못했다.
 
소위 트렌디 드라마라고 불리는 「커피프린스 1호점」은 사랑, 성 등에 관련해 젊은 세대의 변화된 가치관과 감각을 잘 담아냈다고 생각한다. 어찌 보면 다소 민감한 주제일 수도 있는 동성애 코드를 너무 무겁지 않게, 하지만 특유의 발랄함과 유쾌함으로 예쁘게 포장해냈다.
 
주인공 은찬은 일에 있어서도, 사랑에 있어서도 수동적이지 않으며 자신의 삶에 독립적이고 당당한 여성이다. 이런 은찬이 여성인지 남성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외모를 지녔다는 설정은 일종의 상징같이 다가왔다. 마치 기존의 이분화 된 여성성 혹은 남성성의 구분 자체가 사실상 잘못된 것이며 성의 구분 이전에 다양성이라는 가치를 내재한 인간 자체를 드러내고자 했던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알리스 슈바르처가 「사랑받지 않을 용기」를 통해 이야기했던 것들도 이러한 문제 인식과 맥이 닿아있다.
 
‘진정한 사랑’을 위한 ‘사랑받지 않을 용기’
 

▲ 알리스 슈바르처의 책 <사랑받지 않을 용기> (2008, 미래인)  

 
알리스 슈바르처는 독일의 대표적인 페미니스트 활동가이며 페미니스트 저널 엠마(Emma)의 발행인이자 편집장이다. 슈바르처는 「사랑받지 않을 용기」에서 페미니즘을 둘러싼 여러 독설과 역풍에 대한 일종의 변론을 펼치고 있는데, 총 열두 개의 꼭지들을 통해 낙태, 일/가정 문제, 포르노, 다이어트, 성매매 등 다양한 주제들을 함께 다루고 있다.
 
그녀에 따르면 페미니즘 운동은 결코 여성만을 위한 세상을 만들자는 운동이 아니며 오히려 남성과 여성의 작은 차이가 차별로 이어지지 않게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사랑에 있어서도 한 편이 다른 한 편을 위해 일방적인 희생을 감내한다거나 자신의 권리를 포기함으로써 지속되고 있는 관계라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고 말한다. 따라서 사랑을 하는 우리 모두가 내야 할 작은 용기는 바로 ‘사랑받지 않을 용기’인 것이다.
 
“오늘날 많은 여성이 남녀의 동등한 권리와 동등한 임금을 당연시하는 만큼, ‘여성성의 상실’ 내지 ‘지나친 해방’으로 인해 남자들에게 덜 사랑 받고 욕망의 대상에서 제외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앞에서 불안해한다.” (사랑받지 않을 용기, 21쪽)
 
"페미니즘과 젠더 이론가들의 의견이 일치하는 이상(理想)은, 더 이상 여성, 남성의 성 역할에 갇히지 않은, 즉 생물학적인 성이 그 인물을 형성하는 여러 요인들 중 단지 하나일 뿐인 그런 인간이다. 그렇지만 오늘날 우리가 처한 실제 현실은 우리가 여자와 남자이고 그것이 일찍이 각인된 것의 결과일 뿐만 아니라 평생 지속되는 일상적인 현실의 산물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즉, 인간으로서의 우리는 환경이 할당하고 기대하고 투사한 것의 산물이다.” (33쪽)
 
성별 차이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오늘날에는 만약 누군가가 ‘여자들은 원래 ~해’라는 말을 한다면 그를 굉장히 시대착오적인 사람으로, 그런 발언은 모 개그 프로그램에서나 나올법한 것으로 여길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여전히 성 역할에 대한 편견은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뿌리깊이 내재하고 있다.
 
성이 타고나는 것인지 만들어지는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보부아르의 멋진 명제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길들여진다”가 등장하기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 슈바르처는 신경학자, 생물심리학자 등의 연구를 인용해 그에 대한 대답을 준비했다. 이른바 육체와 정신의 상호작용이 ‘평생에 걸쳐’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신경심리학적으로도 확인이 된 것이다. 유전자와 뇌가 타고난 소질을 결정하지만 그것의 실제 형성과정은 유아기 및 평생 새겨지는 경험들의 결과라는 사실. 유연한 뇌는 인간이 죽을 때까지 영원히 발달하기 때문이다.” (48쪽)
 
많은 경우에 우리는 한 가지 현상을 둘러싼 사회적, 심리적, 생물학적 요인들을 각각 분리해 낼 수 없다. 가부장제하에서 남성들이 여성들로 하여금 열등하다는 인식을 갖게 하기 위해 수없이 이름표를 붙였던 ‘다름’은 어쩌면 아예 존재하지 않았거나, 여성들이 그러한 구분을 당연하게 여김으로써 상당부분 자연의 일부로 자리매김 된 결과일 수 있다.
 
[“대다수의 인간이 오늘날 ‘여자’ 아니면 ‘남자’이다.”라는 말은 맞다. 대부분의 여자 인간들은 남자 인간들보다 감정적이고, 대부분의 남자 인간들은 여자 인간들보다 합리적이다. 또 더 인간 지향적이거나 더 사실 지향적이다. 그리고 더 감정 이입의 능력이 있거나 더 자폐적이다. 그렇다고 우리 모두가 배타적으로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런 상태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양극화가 지금까지 여성에게도 남성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66쪽)
 
우리가 성역할 성취의 압박감에서 해방된다면
 
그렇다면 슈바르처 언니가 자매들에게 제안하는 나름의 해결책은 무엇인가. 그건 ‘남자들은 결코 달라지지 않아’라는 생각을 버리라는 것이다. 남자들은 원래 그렇다거나 그들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식의 인식들은 이미 ‘우리’와 ‘그들’을 잠정적으로 구분하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수세기 전부터 지속되고 있는 불필요한 논쟁 - 타고난 성인가 아니면 길러진 성인가 - 의 연장선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채 현실의 폭력만 가중시킬 뿐이다.
 
“우리가 남녀 모두를 성역할 성취의 압박감에서 해방시키고 남녀 모두에게 똑같은 권리와 의무뿐 아니라 실제로 똑같은 기회도 준다면, 그러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알게 될 것이다. 새로운 인간은 성별 차이에서 벗어나 개별적 차이를 성취하는 인간이다. (중략) 그런 다음에야 우리는 정말로 ‘사랑’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남자와 여자 사이의 사랑에 대해서도 말이다. 왜냐하면 종속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사랑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은 독립과 자유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239-240쪽)
 
커피프린스에서 공유가 윤은혜에게 고백하는 장면을 보며 쪼그려 앉아 베개를 끌어안고 바닥을 굴렀던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의 사랑이 그렇게 눈물 나게 예뻤던 것은 독립과 자유 속에서만 존재하는 그 ‘사랑’을 그들이 보여줬기 때문이었을지도.
 
“딱 한번만 말할 거니까 잘 들어. 나 너 좋아해. 네가 남자건 외계인이건 이제 상관 안 해. 정리 같은 거 힘들어서 못해먹겠으니까 가보는 데까지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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