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일다> 자야, 귀촌을 이야기하다: 그 모든 것의 시작②  
 
[글쓴이 자야. 프리랜서로 글을 쓰거나 책을 만든 지 15년. 함부로 대해 온 몸, 마음, 영혼에 속죄하는 심정으로 요가와 명상을 시작한 지 10년. 명함에 글 쓰고 요가 하는 자야, 라고 써넣 은 지 6년. 도시를 떠나 시골을 떠돌기 시작한 2년 만에 맞춤한 집을 만나 발 딛고 산 지 또한 2년... 그렇게 쌓이고 다져진 오래된 삶 위로, 계속해서 뿌리 내리고 싹을 틔우고 가지를 뻗는 ‘지금 여기’의 삶을, 일다 독자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인연 따라 걸음을 옮기니

▲ 집 뒷쪽의 산책길 © 자야 
 
그날, 곧 귀촌이 가능할 것처럼 근거 없는 믿음과 낙관으로 충만해 아차산을 내려온 이후에도 내 생활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게으른 요가와 명상 수련. 하루에 한 번 아차산 오르기. 적게 먹고 적게 배설하기. 시내에 안 나가기. 약속이 생기면 집 가까운 데로 장소를 잡아 걸어가기. 단순 소박한 삶을 결코 꿈꾸지 않았음에도, 내 삶 은 더 이상 그럴 수 없을 정도로 소박해지고 단순해져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래 전 내가 한 번 걸음한 적이 있는 영성수련원에서 연락이 왔다. 회원들 대상으로 잡지를 만들려고 하는데 그 담당자로 일해 보지 않겠느냐는 얘기였다. 시골에서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니 따져볼 것도 없이 나는 곧바로 짐을 쌌고, 그렇게 해서 충청도 금산의 어느 아담하고 적요한 마을에서 나의 첫 시골생활은 시작되었다.

홀로 사시는 할머니 댁에 딸린, 화장실과 주방시설이 갖춰진 월세 10만 원짜리 방에 살면서, 나는 아침저녁으로 좁고 구부러진 산길을 걸어 수련원을 오갔다. 격월간 잡지를 만드는 일이 주요 업무였으나 틈틈이 단행본 작업도 하고, 또 몇 달 간은 그곳에 오래 머무는 장기 수련생들에게 요가도 가르쳤다.

모든 게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을지언정, 그 시절에는 적어도 출근길이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다. 5분 남짓 산길을 돌아 수련원으로 향하는 걸음이 마치 그날 하루를 온전하게 살게 하는 신비한 의식과도 같았다 할까. 그곳엔 이름을 알 수 없는 키 작은 봄꽃에서부터 한여름 장대비를 맞으며 초록으로 깊어가는 여름나무에, 처마 밑에 내걸린 채 수줍게 웃고 있는 붉은 홍시와 겨울이 되면 무릎이 빠질 정도로 쌓이는 함박눈까지 다 있었다.

나는 생애 처음으로 그것들과 깊이 접촉하면서 때에 맞춰 가장 적절하게 변화할 줄 아는 자연의 '자연스러움'에 매혹 당했다. 그리고 끊임없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생멸의 드라마를 보여줌으로써 그 무엇에도 집착할 필요가 없음을 일러주는 우주의 메시지를 읽었다. 그것을 경험하는 순간마다 내가 텅 비어 있으면서도 꽉 들어찬 어떤 공간으로 진입하는 기분이었다고 하면 이해가 되려나?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그 느낌은 머리로는 진즉 알고 있었으되 몸으로 체험해 보지 못한 '무엇'이었다. 바로 그 '무엇'을 도시에서 보고 듣고 만나는 사람도 물론 있을 것이나, 내 경우 그러지 못했음을 고백한다. 변명을 하자면 도시의 소음, 속도에 취해 나의 감각과 마음과 그 너머의 깊은 영역이 마비돼 있었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그때는 봐도 보지 못했고 들어도 들을 수 없었다고. 만져도 느낄 수가 없었다고.

금산에서의 생활은 내게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그러나 그게 내가 경험해야 할 전부는 아니었는지, 시골에서 거처를 찾아가는 나의 여행은 남원으로, 함양으로 계속되었다. 왜 다른 곳이 아닌 남원이고 함양이었는지는, 서울에서 금산으로 갈 때가 그랬듯이, 역시 인연의 힘이었다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이번 생을 살기까지, 얼마나 길고 오랜 세월에 걸쳐 축적해 왔는지 모를 나의 업이 닦은 길, 그 위에 얹힌 지표와도 같은 인연.

마침내 집을 만나다

▲ 우리집 전경   © 자야
 
2009년 6월 중순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아침부터 비가 오락가락하던 어느 날. 아스팔트 위를 달리는 차바퀴 소리가 근사하게 들리는 그런 날이었다. 나는 작은 우산 하나를 챙겨 들고 길을 나섰다. 그런 내 뒤로 갑돌이 갑순이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앞 다투어 짖어댔다. 한 놈은 월월. 다른 한 놈은 왈왈. 명색이 진돗개라 소리 뒤에 남는 공명이 크고 여운이 짙다. 그래. 너희 덕분에 내가 이 산중에서 살아남았지. 정말 고맙다. 그런데 어쩌니? 오늘은 내가 이사할 집을 보러 가는 날인걸.

슬며시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게 어쩐지 부담스러워, 나는 그들을 보는 척 마는 척 서둘러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두세 시간에 한 번 오는, 운봉으로 나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서였다. 곧고 긴 내리막길을 한참 걸어 내려간 다음, 더 이상 그들이 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월월. 그리고 왈왈. 이곳을 떠나면 언제라도 그 소리가 그리워질 것임을 알기에, 나는 조금 서글퍼졌다.

운봉에서 함양으로 가는 버스에 오른 나는, 갑돌이 갑순이 머리라도 한 번 쓰다듬어 주고 나올 걸 그랬나, 후회했다. 지리산 정령치가 지척이고 건물 옥상에 오르면 멀리 만복대가 보이는 해발 600미터 높이의 고원에서, 그 개들은 나의 유일한 말벗이자 든든한 지킴이가 돼 주지 않았던가.

하지만 바로 그 점이 나를 힘들게 했던 것 같다. 마을과 한참 떨어진 외딴 곳에서, 길게는 일주일을 사람 그림자 하나 찾기 위해 그 넓은 2층 건물을 혼자 배회해야 했으니까. 낮에는 건물 밖으로 나가 광대뼈가 녹아 내리도록 해바라기를 하고 밤이면 옥상에 올라 하염없이 별만 헤는 나날이 이어졌으니까. 그렇게 사는 일 년 동안 약하게나마 정신을 놓는 일이 반복되면서 나는 알았다. 내공과는 거리가 먼 나 같은 사람은 낮은 곳으로 내려가 사람 속에 섞여야 한다는 것을. 이제 고독하고 쓸쓸한 이곳을 떠날 때가 되었다는 것을. 

▲ 파란 나무대문     © 자야
 
그로부터 며칠 후 연락이 왔다. 함양에 살면서 가끔 그곳에 들르는 어느 분에게 지나가는 말로 속내를 비추자 '좋은 물건이 나왔다'며 득달같이 전화를 주신 것이다. 함양터미널에서 그분을 만나 집을 보러 가는데 오랜만에 가슴이 콩닥거렸다. 남향이어서 볕이 잘 든다고? 집 앞에 제법 넓은 텃밭이 있다고? 게다가 불 때는 아궁이까지? 특별한 정보도 아니었지만 나는 그분이 던진 몇 마디 말에 홀라당 사로잡혀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하여 파란 나무대문을 여는 순간, 나는 바람처럼 스쳐가는 어떤 소리를 들은 듯했다. 이곳이 네 집이야, 라는 속삭임을.

결코 넓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아니, 요즘은 시골집들도 현대식으로 개조를 많이 하니 그와 비교하면 평균 이하의 집일 수도 있는데, 나는 어쩌자고 그렇게 빨리 반하고 만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 나중에 지인들이 소식을 듣고 물을 때도 나는 그저 이렇게 대답했을 뿐이다.

"마당에 포도나무가 있어. 색깔이 꼭 청포도 사탕 같아. 또... 텃밭이 두 개나 돼. 마당 안에 하나, 대문 밖에 하나. 상추며 가지며 고추까지 없는 게 없다니까. 집 앞에 있는 감나무 잎은 어찌나 매끄럽고 야무져 보이던지. 아 참, 창고도 되게 넓어. 거기에 호미랑 삽도 있고 또 바람 빠진 자전거도 있더라."

내 말이 그다지 감동적이지 않았던지 그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되물었다. 야, 그런 건 됐고. 집은 어떤데? 대체 몇 평이야? 보안장치는 돼 있니? 비는 안 새고? 화장실은 물론 수세식이겠지? 그런데 참 이상한 건, 분명 집을 구석구석 살펴보고 계약을 하고 중도금까지 치르고 왔는데도 사람들이 물어보는 것들은 하나도 생각이 안 난다는 점이었다. 이에 지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며 한숨을 내쉬기에 바빴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그들을 절망하게 만든 나의 한마디는 따로 있었으니...

"있잖아. 내가 그 집에 들어설 때 말이야. 하필이면 그때 비가 그치고 해가 난 건 정말 우연이었을까?"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그 집 대문을 여는 순간 어떤 소리가 들리더라는 말만은 끝내 할 수 없었다. 이게 네 집이야, 라는 속삭임이 내 귀를 사정없이 간질이더라는 그 말만은 차마. 지금 생각해도 안 하길 참 잘한 것 같다.  (자야)

* 여성저널리스트들의 유쾌한 실험! 인터넷 저널 <일다> 바로가기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