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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윤하의 딸을 만나러 가는 길(18) 
그해 여름, 취업일기② 

 
컴퓨터 프린터의 메인보드를 생산하는 공장에서 첫날, 난 납땜을 마치고 잘라낸 철사조각들 중, 긴 것을 골라 펜치로 구부리는 일을 했다. 그 일을 며칠 간 한 뒤에는 컨베이어 벨트가 돌아가는 조립라인에 앉아 다양한 모양과 색깔의 칩들을 보드에 꽂는 일을 했다. 빈 보드가 자동으로 앞에 도착하면 같은 자리에 똑같은 칩을 반복적으로 꽂는 것인데, 어찌나 단순하고 지루한지 이 일을 하면서는 졸지 않을 수가 없었다. 깜빡깜빡 조는 사이, 조금씩 내 곁에서 멀어지는 보드를 쫓아 처음에는 몸을 일으켜 꽂다가 나중에는 아예 뛰어다니며 칩을 꽂으면, 어느새 벌떡 잠이 깨곤 했다.
 
경력이 좀 더 많은 사람들은 납땜 기계를 통과한 보드의 납땜을 손질하는 일을 했다. 쉽지 않은 그 일을 난 공장에 다닌 세 달 동안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그렇게 동료들의 납땜 마무리가 끝난 보드를 세척하는 일은 다시 내 차례다. 휘발성 강한 투명한 액체가 가득 담긴 양동이에 완성된 보드를 넣고 납땜을 하면서 묻은 불순물을 수세미로 씻어내는 일인데, 마스크는커녕 고무장갑도 끼지 않은 맨 손으로 썩썩 닦았다. 휘발성 때문에 손이 시원해서 요즘 같이 더운 날 그 일을 하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이 액체를 그렇게 다룬 건 위험한 행동이 아니었나 싶다. 또 세척을 마친 뒤 남은 찌꺼기들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도 의문이다.
 

그러나 그 당시, 무엇보다 내 신경을 건드린 건 납땜이었다. 나도 얼마 뒤에는 아주 간단한 물건의 납땜을 하기 시작했다. 납땜이 위험하다는 건 조금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어떤 위험성이 있는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해, 잔업이 없는 날은 서점을 들러 납중독이 초래할 수 있는 재해를 알아보기도 했다. 피부창백, 위장장애, 심하면 신경장애까지 일으킨다는 걸 안 것은 그때였다. 책에는 환풍시설이 설치되어 있는 경우에는 납중독을 막을 수 있다고 쓰여 있었다.

 
그러나 그 회사에는 환풍기가 없었다. 그러고 보면 이곳에서 5년을 근무했다는 내 또래 반장의 얼굴은 정말 창백했다. 그때는 한여름이어서 창문을 열어놓고 납땜을 할 수 있었다. 또 몇몇은 자기 앞에 아주 작은 간이 환풍기를 놓아 연기가 코로 흡입되는 것을 막기도 했는데, 가을이 다가오면서는 마음이 쓰이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나도 납땜을 곧잘 해서 제법 으쓱해 하던 무렵이었다. 동료들과 함께 수다를 떨며, 작업하던 어느 날 어떻게 납땜을 화제 삼게 되었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내가 말했다.
 
“친구들이 ‘너 회사에서 뭐해?’ 라고 물으면, ‘난 납땜이 전공이야!’라고 말해요! 하하!”
난 좀 으쓱해하며 말했다. 사실 난 납땜을 잘 하는 내가 자랑스러웠다. 그런데 내  말에 일순간 좌중이 썰렁해졌다. 한 동료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야, 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니? 그냥 전자회사에 다닌다고 하지. 납땜을 한다고 하면 어떻게 해?”
 
“그래, 난 남자친구는 물론, 가족들한테도 납땜한다는 말은 안 해! 그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데, 그런 걸 한다고 하니?”
 
모두들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일하면서 매일 졸고, 눈치 없이 코도 팽팽 풀어서 좀 부족하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바보인 줄은 정말 몰랐다는 눈치들이 역력했다.
 
난 그때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납땜이 어때서요? 납땜을 한다는 게 부끄러운 건 아니죠. 정말 부끄러운 건 환풍기가 없는 곳에서 납땜을 하는 게 부끄러운 거죠! 환풍시설만 잘 되어 있다면 납땜은 위험하지 않대요.”
 
사람들은 모두 말을 잇지 못했다. 그들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얼마 뒤, 내가 참여해 만든 물건이 납품되는 날이 되었다. 박스에 담긴, 내가 만든 제품이 트럭에 실리는 광경을 보면서 나는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하다 말고 창가로 달려가 창문에 매달려 물건을 적재하는 모습을 바라보기 시작한지 채 10초나 되었을까? 평소에는 얼굴도 내밀지 않던 사장이 그날은 공장에 나와 운반되는 박스들을 살펴보며, 우리와 함께 작업장에 있었다. 창가로 달려간 나를 발견한 사장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야! 너 뭐해? 넌 네 할 일이나 해!”
 
나는 무섭게 윽박지르는 소리에 움찔해서 바로 내 자리로 돌아와 앉았지만, 사실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내 할 일이 뭔데? 내가 만든 물건이 실리는 걸 흐뭇하게 바라보는 게 내 할 일이 아니란 말인가?’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면서 노동자가 자기 노동에서 소외된다는 게 이런 거라는 걸 알았다.
 
나는 공장일이 조금씩 하기 싫어지기 시작했다. 노동에서 소외되는 이런 경험도 내 자존심을 긁어놓았지만, 무엇보다 지루하고 단순한 일을 온종일 하고도 모자라 밤늦게까지 한다는 게 견딜 수 없었다. 거의 매일 잔업이 있었다. 잔업은 사실 선택이었지만, 그건 명목상이었고 실제로는 강요되었다. 밤 10시까지 일을 하는 게 힘에 부쳤다. 내가 소모되는 느낌을 꾸준히 받았다. 더욱이 ‘이러다가 정말 공장에서 평생을 일해야 하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그건 솔직히 공포스러웠다. 그렇게 세 달이 지나고 있었다.
 
바로 그때, 남자친구와의 사이에서 아이가 생겼다. 우리는 의논 끝에 아기를 낳기로 결정내리고 결혼을 서둘렀다. 나는 임신을 이유로 공장을 바로 그만 두었다. 임신한 몸으로 하기에 무리이기도 했지만, 지금 와서 솔직하게 말하면 임신을 핑계 삼아 그곳을 도망쳤던 것 같다. 그렇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곳을 도망쳐 나왔다. 임신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빨리, 그렇게 당당하게 그 일을 접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여름 취업의 경험이 ‘몸만 건강하면 어느 곳에서도 살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내게 주었다고 사람들에게 말하곤 했다. 하지만, 진심으로 그 여름 그 경험이 내게 준 건 ‘노동자로 살지, 말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조건과 상황에 내가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얼마 뒤 친하게 지낸 한 동료를 통해, 드디어 회사에 환풍시설을 설치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물론, 그들이 강하게 요구해 힘들게 얻어낸 결과였다. 난 정말 대단하다고, 참 잘했다고 함께 기뻐해 주었지만, 더 많이는 부끄러웠다. 난 그곳에서 결코 도망칠 수 없는 많은 친구들을 남겨놓고 혼자 도망 나온 것이다. (윤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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