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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자야, 귀촌을 이야기하다:둘째 이야기②
[글쓴이 자야. 프리랜서로 글을 쓰거나 책을 만든 지 15년. 함부로 대해 온 몸, 마음, 영혼에 속죄하는 심정으로 요가와 명상을 시작한 지 10년. 명함에 글 쓰고 요가 하는 자야, 라고 써넣 은 지 6년. 도시를 떠나 시골을 떠돌기 시작한 2년 만에 맞춤한 집을 만나 발 딛고 산 지 또한 2년... 그렇게 쌓이고 다져진 오래된 삶 위로, 계속해서 뿌리 내리고 싹을 틔우고 가지를 뻗는 ‘지금 여기’의 삶을, 일다 독자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도배를 하다 말고 새댁이 되고 신랑이 된 나와 K는 대충 짐이 정리되는 대로 마을 분들을 모시고 인사를 드리기로 했다. 잔금을 치르기 위해 들른 부동산에서 “시골에 이사 오면 당연히 신고식을 치러야 한다”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기도 했고, 아무래도 시골에서는 그러는 게 도리인 것 같아서였다.
부동산 아저씨는 친절하게도 신고식 치르는 절차까지 일러주었다. 이장을 찾아가 상의를 하면 알아서 날짜며 시간이며 다 정해줄 거라는 얘기였다. 우리 동네 이장님은 그에 덧붙여 몇 차례에 걸친 마을방송을 통해 대대적인 홍보까지 해주셨다. 시골에서는 마을방송 전후로 그토록 요란한 뽕짝을 튼다는 것을, 나도 K도 그때 처음 알았다.
신고식 치르던 날의 한숨
마침내 신고식 치르는 날이 되어 나와 K는 예정된 시각보다 20여 분 정도 일찍 회관에 나갔다. 뜨끈하게 김 오르는 떡을 접시에 담고 맥주와 막걸리를 꺼내 상을 차리고 있자니 낯선 분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대개는 할머니 할아버지였고, 드문드문 60대로 보이는 ‘젊은’ 얼굴들이 눈에 띄었다.
도시에서 그렇게 자주 이사를 다녔어도 주인집 아주머니 외에는 얼굴 트고 지내는 사람 하나 없이 지냈던 나로서는, 30여 명이나 되는 마을 사람들 앞에서 떡 접시와 막걸리 잔을 돌리며 음전한 새댁 노릇을 해야 하는 자리가 그리 편하지는 않았다. 성격상 반죽이 좋은 편이 못 되고 아무에게나 다가가 쉽게 말을 붙이지도 못하는 타입이어서 더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의 신고식이 불편함을 넘어서 탐탁지 않게 느껴진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음식을 담아서 나르는 일은 나와 몇몇 여자 분들이 하고 있고, K는 잘 차려진 안쪽 테이블에 앉아 남자 어르신들과 여유 있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게 아닌가. 어찌하나 보려고 내가 몇 번인가 K를 부르며 접시 좀 나르라는 둥 설거지 좀 하라는 둥 ‘오더’를 내렸으나, 그때마다 엉덩이를 들고 일어서려는 K를 다시 주저앉히는 건 동네 분들이었다. 심지어 그분들은 한 목소리로 “신랑 좀 먹게 놔두라”며 나를 타박하기까지 했다.
또 한 가지 눈에 띈 것은 마을 분들이 K에게 묻는 질문과 내게 묻는 질문이 사뭇 달랐다는 점이다. K에게는 무슨 일을 하는지, 왜 시골에 왔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를 물어보는 분들이 왜 내게 궁금해 하는 것은 언제 아기를 낳을 것인가, 고향은 어디고 시댁은 어디인가 따위뿐인지? 더군다나 그분들은 K에겐 이름이 뭐냐, 본관이 어디냐 꼬치꼬치 캐물으면서 내게는 이름 석 자조차 물어보지 않았다.
이사 전부터 내가 새댁이 될 운명임을 예감했듯이 이런 상황에 직면하리라는 것 또한 어느 정도는 예상한 바였지만, 서운하고 분한 마음이 일어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마 그분들도 신고식 내내 뿌루퉁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한숨만 내쉬는 나를 참 이상하고 되바라진 새댁이라 여겼을 게 분명하다.
댁들에겐 특별한 무엇이 있다
▲동네 ‘댁’들이 갖는 존재감이 내게는 엄청나게 크고 깊다 . © 자야
훗날 나는 마을의 다른 행사나 반상회 같은 모임에 참가하면서 내가 신고식 치르던 날 겪은 경험이 특별한 것이 아님을, 그건 이름 대신 **댁이라 불리는 마을의 모든 여자에게 적용되는 현실임을 알게 되었다.
시골집이 흔히 그렇듯 우리 동네 마을회관도 출입문과 통해 있는 가운데 거실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주방이, 왼쪽에는 방이 있는 일자형 구조다. 그런데 마을 어른들이 모일 때면 남자들은(부엌일을 하기 힘든 고참 할머니들 포함) 전부 부엌과 거리가 먼 안쪽 방에 앉는 반면, 여자들은 거실에 앉아 수시로 부엌을 들락거리며 잡다한 일을 한다. 음식을 차릴 때도 안쪽 방에는 정식으로 상을 펴지만 거실에는 대충 바닥에 그릇을 늘어놓는 경우가 많다. 내가 상을 펴려 하면 오히려 아주머니들이 한 말씀 하신다. “쓰잘머리 읍시 상은 무에 쓰게? 바닥에서 먹으면 되지.”
그냥 넘어가자니 뭔가 찝찝하고, 그렇다고 따박따박 따져 물을 수도 없고. 또 따진다고 한들 한평생 그리 살아오신 게 바뀔 것도 아니고. 결국 나는 ‘속 편하려면 안 보는 게 제일’이라는 지극히 소심하고도 비겁한 생각에 근거하여 방침을 세웠다. 대부분의 마을 모임이라는 게 가구마다 한 사람씩만 참여하면 되므로, 우리 집에서는 K가 나가는 것으로 하고, 그의 사정이 안 될 때만 내가 참여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이에 덧붙여 나는 스스로에게 다짐을 했다. 일단 참여했으면 그 자리에서는 불평 없이 즐겁게, 내 할 일만 하다 오자고.
올 봄 초, 마을 농사가 잘 되기를 기원하는 농천제에 참가하는 내 마음이 꼭 그랬다. K가 아침에 일을 나가야 해서 선택의 여지가 없기도 했지만, 농천제는 나름 중요하고 큰 행사인 데다가 흥미로운 면이 있었기에 나는 기꺼이 아침 일찍부터 마을회관에 나가 팔 걷어 부치고 일을 했다. 그래 봤자 고기 삶고 나물 무치고 전 부치는 등의 중요한 일은 이장님 부인을 비롯한 아주머니 몇 분이 전날 다 해놓은 상태여서, 내가 할 일이라곤 상 차리고 수저 놓고 설거지 하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날도 ‘불평 없이 즐겁게 하자’는 내 다짐에는 흠이 갔다. 핑계를 대자면 여자는 제사에 참여할 수 없다는 마을의 규율 때문이었다. 그 황당한 규율로 인해 젊거나 늙은 여남은 명의 ‘댁’들은 온갖 음식으로 발 디딜 틈조차 없는 좁은 부엌에서 십 몇 분간 서 있어야 했고, 제사가 끝난 후 문이 열리고 나서도 한참을 분주하게 움직인 후에야 겨우 미끈거리는 바닥에 주저앉아 식어가는 음식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나에겐 물론 이런 상황이 달갑지 않았으나, 아주머니들은 마치 잔치라도 벌이듯 시종일관 신나고 흥겨운 분위기였다. 그이들은 양손을 부지런히 놀리는 가운데 쉬지 않고 수다를 떨었고, 또 왕성한 식욕을 드러내며 바닥에 놓인 접시를 차례로 비워갔다. 열심히 일했으니 부녀자들에게 술 한 잔 돌리라고 이장님에게 큰소리를 치기도 하고 말이다.
한쪽 구석에 앉아 뚱한 표정으로 기름 묻은 손가락만 빨고 있던 내게, 그런 아주머니들의 모습은 어느 순간부턴가 무척 당당하고 거침없어 보이기 시작했다. 모순된 현실의 동조자이자 피해자라고 여겼던 아주머니들보다, 오히려 그에 불만을 갖고 투덜대는 나 자신이 현실에 더 위축되고 짓눌린 것처럼 느껴졌다고 할까. 이런 느낌은, 논리적으로 혹은 이성의 힘을 빌려 설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현실 인식과 관점의 옳고 그름으로 치환되지 않는, 그보다 더 크고 깊은 삶에 관한 어떤 것이라고만 표현할 수 있을 뿐.
이름 없는 그녀들의 연대감
먼 옛날 새댁이었다가 지금은 하동댁이나 진주댁으로, 혹은 부산댁이나 마산댁으로 불리는 사람들. 그이들은 특별히 마음 써준다는 기색도 없이 그저 우리 집 대문 앞에 배추나 무 모종을 몇 포기 놓고 가거나, 담장 너머로 갓 삶은 옥수수와 직접 쑨 묵을 건네기 일쑤다. 오래된 방구들이 폭삭 무너져 내려 나와 K가 어찌할 바 모르고 동동거리기라도 하면, 당신들 남편의 옆구리를 찔러 손을 보게끔 힘도 써준다. 어디 그뿐인가. 잔소리 하는 능력도 못지않아 틈만 나면 싸게 풀을 매 줘라, 마늘은 좀 배게 심어라, 밭에 비닐을 씌워라 어째라 해가며 이 무지한 새댁을 볶아대지 않는가.
그럴 때마다 나는 그분들에게서 애잔하게 전해져 오는 어떤 기운을 느끼곤 이렇게 묻게 된다. 서로의 이름도 알지 못한 채, 그렇다고 무슨 이념이나 주의로 소통하는 것도 아닌, 하지만 생활 속에서 드러나고 확인되는 이 끈적한 연대감과 일체감은 대체 무어냐고.
내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한 가지는 그이들이야말로 생판 ‘도시것’인 내가 귀촌해서 살아갈 수 있는 든든한 바탕이라는 것, 그런 면에서 우리 동네 ‘댁’들이 갖는 존재감이란 비록 우리 사회에서는, 아니 이 작은 마을에서조차 정당하게 인정받지 못한다고 해도 내게는 엄청나게 크고 깊다는 것이다.
참고로 전하면, 언젠가 나는 몇몇 아주머니에게 이름을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 순간 무척 수줍어하면서도 자신의 이름을 똑똑하게 발음하던 그분들의 표정이, 깊이 팬 주름살 사이로 설핏 웃음이 번져가던 홍조 띤 그 얼굴이 잊히지 않아, 나는 가끔 그분들의 이름을 불러 드린다. 조** 아주머니, 김** 아주머니, 라고.
물론 그분들은 여전히 내 이름을 모르고 묻지도 않지만, 이제는 서운함도 분함도 흐릿해진 지 오래다. 그건 아마도, 이름 없이 건재할 수 있는 댁들의 존재감과 연대감에 내가 생각보다 훨씬 더 깊이 취해 있기 때문은 아닐까. (자야)
※ 여성저널리스트들의 유쾌한 실험! 대안언론 <일다> 바로가기
[글쓴이 자야. 프리랜서로 글을 쓰거나 책을 만든 지 15년. 함부로 대해 온 몸, 마음, 영혼에 속죄하는 심정으로 요가와 명상을 시작한 지 10년. 명함에 글 쓰고 요가 하는 자야, 라고 써넣 은 지 6년. 도시를 떠나 시골을 떠돌기 시작한 2년 만에 맞춤한 집을 만나 발 딛고 산 지 또한 2년... 그렇게 쌓이고 다져진 오래된 삶 위로, 계속해서 뿌리 내리고 싹을 틔우고 가지를 뻗는 ‘지금 여기’의 삶을, 일다 독자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도배를 하다 말고 새댁이 되고 신랑이 된 나와 K는 대충 짐이 정리되는 대로 마을 분들을 모시고 인사를 드리기로 했다. 잔금을 치르기 위해 들른 부동산에서 “시골에 이사 오면 당연히 신고식을 치러야 한다”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기도 했고, 아무래도 시골에서는 그러는 게 도리인 것 같아서였다.
부동산 아저씨는 친절하게도 신고식 치르는 절차까지 일러주었다. 이장을 찾아가 상의를 하면 알아서 날짜며 시간이며 다 정해줄 거라는 얘기였다. 우리 동네 이장님은 그에 덧붙여 몇 차례에 걸친 마을방송을 통해 대대적인 홍보까지 해주셨다. 시골에서는 마을방송 전후로 그토록 요란한 뽕짝을 튼다는 것을, 나도 K도 그때 처음 알았다.
신고식 치르던 날의 한숨
▲ 마을 여자들은 특별히 마음 써준다는 기색도 없이 그저 우리 집 대문 앞에 배추나 무 모종을 몇 포기 놓고 가거나, 담장 너머로 갓 삶은 옥수수와 직접 쑨 묵을 건네기 일쑤다. ©자야
마침내 신고식 치르는 날이 되어 나와 K는 예정된 시각보다 20여 분 정도 일찍 회관에 나갔다. 뜨끈하게 김 오르는 떡을 접시에 담고 맥주와 막걸리를 꺼내 상을 차리고 있자니 낯선 분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대개는 할머니 할아버지였고, 드문드문 60대로 보이는 ‘젊은’ 얼굴들이 눈에 띄었다.
도시에서 그렇게 자주 이사를 다녔어도 주인집 아주머니 외에는 얼굴 트고 지내는 사람 하나 없이 지냈던 나로서는, 30여 명이나 되는 마을 사람들 앞에서 떡 접시와 막걸리 잔을 돌리며 음전한 새댁 노릇을 해야 하는 자리가 그리 편하지는 않았다. 성격상 반죽이 좋은 편이 못 되고 아무에게나 다가가 쉽게 말을 붙이지도 못하는 타입이어서 더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의 신고식이 불편함을 넘어서 탐탁지 않게 느껴진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음식을 담아서 나르는 일은 나와 몇몇 여자 분들이 하고 있고, K는 잘 차려진 안쪽 테이블에 앉아 남자 어르신들과 여유 있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게 아닌가. 어찌하나 보려고 내가 몇 번인가 K를 부르며 접시 좀 나르라는 둥 설거지 좀 하라는 둥 ‘오더’를 내렸으나, 그때마다 엉덩이를 들고 일어서려는 K를 다시 주저앉히는 건 동네 분들이었다. 심지어 그분들은 한 목소리로 “신랑 좀 먹게 놔두라”며 나를 타박하기까지 했다.
또 한 가지 눈에 띈 것은 마을 분들이 K에게 묻는 질문과 내게 묻는 질문이 사뭇 달랐다는 점이다. K에게는 무슨 일을 하는지, 왜 시골에 왔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를 물어보는 분들이 왜 내게 궁금해 하는 것은 언제 아기를 낳을 것인가, 고향은 어디고 시댁은 어디인가 따위뿐인지? 더군다나 그분들은 K에겐 이름이 뭐냐, 본관이 어디냐 꼬치꼬치 캐물으면서 내게는 이름 석 자조차 물어보지 않았다.
이사 전부터 내가 새댁이 될 운명임을 예감했듯이 이런 상황에 직면하리라는 것 또한 어느 정도는 예상한 바였지만, 서운하고 분한 마음이 일어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마 그분들도 신고식 내내 뿌루퉁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한숨만 내쉬는 나를 참 이상하고 되바라진 새댁이라 여겼을 게 분명하다.
댁들에겐 특별한 무엇이 있다
▲동네 ‘댁’들이 갖는 존재감이 내게는 엄청나게 크고 깊다 . © 자야
훗날 나는 마을의 다른 행사나 반상회 같은 모임에 참가하면서 내가 신고식 치르던 날 겪은 경험이 특별한 것이 아님을, 그건 이름 대신 **댁이라 불리는 마을의 모든 여자에게 적용되는 현실임을 알게 되었다.
시골집이 흔히 그렇듯 우리 동네 마을회관도 출입문과 통해 있는 가운데 거실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주방이, 왼쪽에는 방이 있는 일자형 구조다. 그런데 마을 어른들이 모일 때면 남자들은(부엌일을 하기 힘든 고참 할머니들 포함) 전부 부엌과 거리가 먼 안쪽 방에 앉는 반면, 여자들은 거실에 앉아 수시로 부엌을 들락거리며 잡다한 일을 한다. 음식을 차릴 때도 안쪽 방에는 정식으로 상을 펴지만 거실에는 대충 바닥에 그릇을 늘어놓는 경우가 많다. 내가 상을 펴려 하면 오히려 아주머니들이 한 말씀 하신다. “쓰잘머리 읍시 상은 무에 쓰게? 바닥에서 먹으면 되지.”
그냥 넘어가자니 뭔가 찝찝하고, 그렇다고 따박따박 따져 물을 수도 없고. 또 따진다고 한들 한평생 그리 살아오신 게 바뀔 것도 아니고. 결국 나는 ‘속 편하려면 안 보는 게 제일’이라는 지극히 소심하고도 비겁한 생각에 근거하여 방침을 세웠다. 대부분의 마을 모임이라는 게 가구마다 한 사람씩만 참여하면 되므로, 우리 집에서는 K가 나가는 것으로 하고, 그의 사정이 안 될 때만 내가 참여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이에 덧붙여 나는 스스로에게 다짐을 했다. 일단 참여했으면 그 자리에서는 불평 없이 즐겁게, 내 할 일만 하다 오자고.
올 봄 초, 마을 농사가 잘 되기를 기원하는 농천제에 참가하는 내 마음이 꼭 그랬다. K가 아침에 일을 나가야 해서 선택의 여지가 없기도 했지만, 농천제는 나름 중요하고 큰 행사인 데다가 흥미로운 면이 있었기에 나는 기꺼이 아침 일찍부터 마을회관에 나가 팔 걷어 부치고 일을 했다. 그래 봤자 고기 삶고 나물 무치고 전 부치는 등의 중요한 일은 이장님 부인을 비롯한 아주머니 몇 분이 전날 다 해놓은 상태여서, 내가 할 일이라곤 상 차리고 수저 놓고 설거지 하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날도 ‘불평 없이 즐겁게 하자’는 내 다짐에는 흠이 갔다. 핑계를 대자면 여자는 제사에 참여할 수 없다는 마을의 규율 때문이었다. 그 황당한 규율로 인해 젊거나 늙은 여남은 명의 ‘댁’들은 온갖 음식으로 발 디딜 틈조차 없는 좁은 부엌에서 십 몇 분간 서 있어야 했고, 제사가 끝난 후 문이 열리고 나서도 한참을 분주하게 움직인 후에야 겨우 미끈거리는 바닥에 주저앉아 식어가는 음식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나에겐 물론 이런 상황이 달갑지 않았으나, 아주머니들은 마치 잔치라도 벌이듯 시종일관 신나고 흥겨운 분위기였다. 그이들은 양손을 부지런히 놀리는 가운데 쉬지 않고 수다를 떨었고, 또 왕성한 식욕을 드러내며 바닥에 놓인 접시를 차례로 비워갔다. 열심히 일했으니 부녀자들에게 술 한 잔 돌리라고 이장님에게 큰소리를 치기도 하고 말이다.
한쪽 구석에 앉아 뚱한 표정으로 기름 묻은 손가락만 빨고 있던 내게, 그런 아주머니들의 모습은 어느 순간부턴가 무척 당당하고 거침없어 보이기 시작했다. 모순된 현실의 동조자이자 피해자라고 여겼던 아주머니들보다, 오히려 그에 불만을 갖고 투덜대는 나 자신이 현실에 더 위축되고 짓눌린 것처럼 느껴졌다고 할까. 이런 느낌은, 논리적으로 혹은 이성의 힘을 빌려 설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현실 인식과 관점의 옳고 그름으로 치환되지 않는, 그보다 더 크고 깊은 삶에 관한 어떤 것이라고만 표현할 수 있을 뿐.
이름 없는 그녀들의 연대감
먼 옛날 새댁이었다가 지금은 하동댁이나 진주댁으로, 혹은 부산댁이나 마산댁으로 불리는 사람들. 그이들은 특별히 마음 써준다는 기색도 없이 그저 우리 집 대문 앞에 배추나 무 모종을 몇 포기 놓고 가거나, 담장 너머로 갓 삶은 옥수수와 직접 쑨 묵을 건네기 일쑤다. 오래된 방구들이 폭삭 무너져 내려 나와 K가 어찌할 바 모르고 동동거리기라도 하면, 당신들 남편의 옆구리를 찔러 손을 보게끔 힘도 써준다. 어디 그뿐인가. 잔소리 하는 능력도 못지않아 틈만 나면 싸게 풀을 매 줘라, 마늘은 좀 배게 심어라, 밭에 비닐을 씌워라 어째라 해가며 이 무지한 새댁을 볶아대지 않는가.
그럴 때마다 나는 그분들에게서 애잔하게 전해져 오는 어떤 기운을 느끼곤 이렇게 묻게 된다. 서로의 이름도 알지 못한 채, 그렇다고 무슨 이념이나 주의로 소통하는 것도 아닌, 하지만 생활 속에서 드러나고 확인되는 이 끈적한 연대감과 일체감은 대체 무어냐고.
내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한 가지는 그이들이야말로 생판 ‘도시것’인 내가 귀촌해서 살아갈 수 있는 든든한 바탕이라는 것, 그런 면에서 우리 동네 ‘댁’들이 갖는 존재감이란 비록 우리 사회에서는, 아니 이 작은 마을에서조차 정당하게 인정받지 못한다고 해도 내게는 엄청나게 크고 깊다는 것이다.
참고로 전하면, 언젠가 나는 몇몇 아주머니에게 이름을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 순간 무척 수줍어하면서도 자신의 이름을 똑똑하게 발음하던 그분들의 표정이, 깊이 팬 주름살 사이로 설핏 웃음이 번져가던 홍조 띤 그 얼굴이 잊히지 않아, 나는 가끔 그분들의 이름을 불러 드린다. 조** 아주머니, 김** 아주머니, 라고.
물론 그분들은 여전히 내 이름을 모르고 묻지도 않지만, 이제는 서운함도 분함도 흐릿해진 지 오래다. 그건 아마도, 이름 없이 건재할 수 있는 댁들의 존재감과 연대감에 내가 생각보다 훨씬 더 깊이 취해 있기 때문은 아닐까. (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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