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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이경신의 도서관 나들이(47) 일에 대한 사색 2
얼마 전, 여고 2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동창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긴 세월동안 얼굴을 보지 못했던 터라 서로 연락이 닿질 않아 모임에 나온 동창은 나를 포함해 6명에 불과했다.
대다수의 여성들이 그렇듯이, 다들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기르느라 분주한 시간들을 보냈다. 그 중 셋은 남편의 경제력에 의존해서 윤택한 생활을 하는 전업주부이고, 나를 포함한 나머지 셋은 자기일이 있어 경제적으로 자립적이지만, 한 친구는 결혼은 했어도 아이가 없고, 나는 결혼뿐만 아니라 육아의 경험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날 동창모임에 나온 우리들 대부분은 직업과 양육의 양자택일 앞에서 결과적으로 반쪽만 챙겼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몸이 아픈 남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양쪽을 선택해야 했던 한 명의 친구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직업이냐, 육아냐
레슬리 베네츠의 책 <여자에게 일이란 무엇인가>(웅진윙스, 2011)를 읽으면서 나는 그날의 동창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는 책에서 돈벌이를 포기해서는 안 되고, 일과 가정을 병행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중년 여성이 된 우리들은 일과 가정을 동시에 병행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역설하는 표본 같았다.
실제로 남편의 돈벌이로만으로는 생계가 해결되지 않거나 물질적 욕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 여성들은 직업현장을 떠나지 못하고 맞벌이를 한다. 이때 어머니와 같은 주변 사람의 도움을 받거나 조력자를 돈으로 구하지 않는 이상, 여성들이 가정일과 직장일을 함께 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고달픈 직장생활과 자녀 양육을 병행하는 것 이외의 다른 방도가 없는, 형편이 어려운 여성들은 가정에만 전념할 수 있는 전업주부를 동경하기도 한다.
이번에 만난 전업주부 동창들처럼 비교적 여유 있는 중·상류층 여성들은 직업을 갖지 않아도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물질적 풍요가 보장된다면, 직업을 미련 없이 포기한 채 가정, 즉 가사와 양육을 선택하기 일쑤다.
전통적 모성신화의 족쇄
그동안 가르쳐온 10대 여학생들은 다들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아내이자 엄마이면서도 멋진 전문직 여성으로도 성공하길 희망한다. 이 어린 여학생들은 백마 탄 왕자님과 결혼해 귀여운 아이들을 낳아 잘 키우고, 직업적으로도 유능하길 꿈꾸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 꿈이 실현되기에 현실의 장벽은 두텁고 높기만 하다.
베티나 뮌히가 <일이냐 아기냐 아무것도 포기할 수 없는 여자>(글담, 2002)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여성이 가정생활과 직장생활을 병행하기 어려운 데는 사회적이고 개인적인 여러 문제들이 놓여 있다.
"직업을 포기할 수 없는 모든 여성들은, 아이를 키우면서 일도 하고 자신의 삶, 부부 생활 또한 훌륭하게 가꿔 나가길 기대한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니다. (중략) 여성들은 아이와 직업을 병행하기 위해 이해심 없는 고용주, 유연하지 못한 작업시간, 부족한 보육시설, 가족의 재정적 불이익, 주변 사람들의 따가운 질책, 스스로의 죄책감 등 여러 것들과 대항해 자주 싸워야 한다." (베티나 뮌히, 같은 책 ‘들어가는 말’ 중에서)
무엇보다도 ‘부족한 양육시설, 근무시간을 조절하기 어려운 직장문화, 재정적 부담을 덜어주지 못하는 사회보장제도의 미흡함’ 등과 같은 사회적 제약이 직업과 양육을 함께 하려는 여성의 발목을 잡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적인 문제조차 여성 개인의 문제와 더불어 전통적인 모성신화에 맞물려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베티나 뮌히의 책을 읽다가 독일의 현실이 우리의 현실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좀 놀랐다. 그녀에 의하면, 대부분의 독일남성들은 남편 혼자 충분히 생계를 꾸릴 수 있다면 아내는 가사와 육아에 전념해야지 자기실현을 위해 직장생활을 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다. 이런 여성들이야말로 남성의 일자리를 빼앗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여성의 자리는 가정이지 일터가 아니라는 오래된 고정관념은 남성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그녀의 지적은 옳다. 가정보다 일터에 더 집중하거나 바깥일로 인해 육아나 가사를 소홀히 했을 때 죄책감을 느끼는 여성들이 그렇다. 모성신화 속에서 성장해 온 여성들이 다른 생각을 하기가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현대 여성은 남성과 동일한 교육을 받고 직업활동에 참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모성신화 앞에 굴복한다. 그래서 직장을 원하는 여성들, 직장을 가질 수밖에 없는 여성들은 일터와 가정에서 수퍼우먼이길 요구받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그렇게 강요한다. 비록 직장생활을 하더라도 완벽한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완벽한 엄마는 직업현장이 기대하는 훌륭한 직장인이 되기 힘들기 때문에 모성신화는 자녀가 있는 기혼여성에게 직장생활을 그만두도록 부추긴다.
게다가 레슬리 베네츠에 의하면, 여성들이 고달픈 직업현실에 부딪쳐 직장을 그만두고 가정으로 도피하고 싶을 때 육아를 잘 하기 위해서인 것처럼 모성신화를 방패막이로 삼으면서 자신과 타인을 속인다는 것이다. 사실 여성들은 직장생활이 힘들어서, 일이 싫어서 가정에 안주할 형편만 되면 가정으로 도망치려 한다고 지적한다.
여성이 직장을 떠나서는 안 되는 현실적인 이유
하지만 레슬리 베네츠는 육아를 위해, 가정을 위해 직장을 접는 여성들에게 자기생존을 타인, 즉 남편에게 맡기지 말라고 충고한다. 한 개인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경제적 자립이 필수라고 보는 것이다. 여성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여성도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도록 돈을 버는 직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남편 덕분에 경제적 여유가 있는 여성들이 품고 있는 미래에 대한 맹목적 낙관주의를 안타까워한다. 이 낙관주의는 현실감각을 결여하고 있는데, 누구나 생계의 어려움에 봉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편이 실직당할 수도 있고, 사고로 심각한 장애를 얻거나 큰 병을 얻어 직장생활이 힘들 수도 있으며, 남편으로부터 이혼당할 수도 있고, 남편이 갑작스럽게 죽을 수도 있다. 평생 전업주부로 살았던 내 어머니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렇다. 갑작스런 아버지의 사망으로 어머니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우리 삶은 무조건적으로 낙관하기에 너무나 위태롭다. 만약 여성들이 직장을 평생 동안 유지할 수만 있다면, 힘든 상황에 봉착했을 때에도 충분히 출구를 찾을 수 있다. 이같은 레슬리 베네츠의 현명한 현실주의는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직업적 일을 통해 여성이 잠재력을 발휘하고 배우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라는 조언보다 오히려 냉혹한 현실의 생존을 위해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충고가 아직도 필요하다니, 솔직히 씁쓸하다. 자기 생존에 대한 책임의식조차 없는 여성을 양산하는 이 사회는 분명 문제가 있다.
경제적 자립을 포기하면 정신적 자유도 없다
책을 읽는 동안 수많은 여성들이 내 머리 속에서 나타났다 사라졌다. 할머니, 어머니, 자매들처럼 잘 아는 여성들만이 아니라, 조금 안면이 있거나 잘 알지 못하는 여성들까지도 생각났다. 이들 중에는 직장생활을 놓지 않은 여성도 있고, 잠시 바깥일을 하다가 가정에 눌러 앉은 여성들도 있으며, 전업주부로 살다 세상을 떠났거나 여전히 그렇게 세상을 살아가는 여성들도 있다.
아직도 전업주부는 많고, 전업주부를 꿈꾸는 여성도 의외로 많다. 20대 여성이 취업이 아니라 ‘취집’을 원한다고 했을 때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모성신화를 핑계 삼건, 모성신화에 등을 떠밀렸건, 그 만큼 모성신화가 우리 사회를 강력히 지배한다는 뜻이리라. 가사일과 육아에 참여하더라도, 자신의 잠재력을 계발하고 능력을 발휘하는 일까지 포기할 필요가 있을까?
자녀가 자신이 이루지 못한 직업적 꿈을 이뤄주고, 자신의 실패를 보상해 주고, 불만족스런 남편을 대신해주길 바라는 전업주부, 남편의 성공을 자기 성공으로 동일시하는 전업주부는 또 얼마나 많은가. 이처럼 자기실현이나 자기성장을 포기한 여성들도 태어날 때는 각자 나름의 능력을 타고 났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여성도 엄마이기 이전에 자의식이 있는 개인이다. 전업주부인 동창이 웃으며, 자기가 쇼핑한 돈을 남편이 ‘치료비’라고 부른다며 이야기하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경제적 자립의 문제는 단순히 물질적인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경제적으로 의존적인 여성은 정신적으로도 자유로운 존재가 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자립적이지 않은 여성이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을까? 여성에게 직업 활동은 경제적인 자립을 넘어 행복한 삶을 꾸리기 위한 조건임을 기억하자. 행복하지 못한 엄마에게 행복한 자녀도 없다는 것도.
가정일과 직업적 일 조화시키기
두 여성 작가는 가정일과 직장 일을 병행하기가 힘들다고 호소하는 여성들에게 자신들이 그랬듯이 힘든 시기는 잠시일 뿐, 어느 것도 포기하지 말고 가정과 직업을 조화시키라고 조언한다. 모성신화를 떨쳐내는 것이 출발점이다.
“모성애는 엄마의 자궁 속에서 출산과 함께 튀어나오는 부산물이 아니다. 노력 속에서, 그리고 아기와 함께 만들어 가는 시간 속에서 자연스럽게 싹트는 것이다. 따라서 모성신화에 걸맞는 역할을 감당하려는 노력은 종국에는 대부분의 여성들에게 지나친 피로감만을 느끼게 만든다.
좌절감, 지루함, 분노와 같은 감정들은 어머니의 신화 속에는 없다. 왜냐하면, 모성신화는 “어머니는 아이들을 통해 자기실현을 구현한다”라고 규정하기 때문이다. 옹알이 하는 아이를 보고 지루해 하고 전업 주부로서의 존재에 만족하지 못하는 여성은 즉각 자책의 길로 들어선다. 누군가에게 아이를 맡기고 외출이라도 하려면 ‘나쁜 엄마’라는 자책감이 찾아든다.
그러나 모성신화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선입견인지 명확히 알아야 한다.“
(베티나 뮌히, 같은 책, ‘모성신화’ 중에서)
자녀를 위해서라면 자신을 희생시킬 줄 알아야 한다는 모성신화는 여성들에게 자식에 대한 과도한 책임감을 떠넘긴다. 따라서 모성신화는 직장여성이 가정에서조차 완벽하길 요구하지만, 현실에 맞게 조금씩 포기하고 타협할 줄 알아야 직업생활과 가정생활을 양립시킬 수 있다. 이때 수퍼우먼의 유혹을 과감히 던질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양쪽 일을 모두 잘 해나기 위해서는 여성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다. 사회제도적 변화도 반드시 필요하겠지만, 가족 구성원의 역할 변화를 모색하는 것도 중요하다. 가사일만 해도 개개인이 생존하기 위한 필요노동이니, 여성만의 몫이라 할 수 없다. 또 부부가 함께 결정해 자녀를 가졌다면 양육 역시 부부가 함께 하는 것이 당연하다. 집안일과 바깥일을 성공적으로 조화시키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성역할을 벗어던지고 가사일과 양육을 함께 해나가는 민주적이고 평등한 부부관계가 필요하다. 또 자녀도 자기 몫의 가사 일을 해낼 수 있도록 동참시켜 평등한 가족관계를 꾸리려고 애써야 한다.
가족의 이해와 협력 속에서 직장생활과 가정생활을 병행한다면, 마지못해 양쪽 일을 모두 짐으로 떠안은 것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양쪽 일을 함께 할 때만이 보다 안전하고, 유쾌한 인생을 꾸릴 수 있다는 분명한 인식이 필요하다.
책을 덮으면서, 평생 가족을 위해 헌신했던 엄마, 완벽한 현모양처인 전업주부 엄마, 전통적인 성역할과 모성신화에 갇힌 엄마, 딸을 통해 대리만족을 꿈꾸었던 엄마를 두지 않았다며, 나도 직업적 일과 육아를 함께 욕심내는 여성이 되었을지 궁금했다. 내가 가르치는 여학생들은 우리 세대 여성들과 달리, 모성신화에 짓눌리지 말고 양쪽 일 모두를 지혜롭게 해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 여성저널리스트들의 유쾌한 실험! 인터넷 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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