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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이경신의 도서관 나들이(49) 놀이에 대한 사색 
 
놀고 싶다. 그냥 놀고 싶다. 해야 할 일이 있어서일까? 꼭 처리해야 할 일이 있을 때면, 놀고 싶은 유혹이 더 커진다. 읽어야 할 책이 있고, 써야 할 글이 있으니, 마냥 놀 수는 없다. 놀고 싶은데, 일을 해야 하는 처지라면, 놀듯이 일하는 것이 최선이다. 결국 난 ‘놀이’에 대한 책을 읽고 ‘놀이’에 대한 글을 쓰면서 마음을 달래보자고 마음먹었다.
 
도서관 서가를 뒤지면서 ‘놀이를 이야기하는 흥미로운 책이 없을까?’하고 두리번거렸다. 그래서 찾은 책이 스티븐 나흐마노비치의 <놀이, 마르지 않는 창조의 샘(에코의 서재, 2008)>이다.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놀이에 빠져들 듯 읽어 내려갔다. 친구를 발견한 기분이랄까?
 
재미난 일이라면 

▲ 스티븐 나흐마노비치 <놀이, 마르지 않는 창조의 샘-원제 Free Play(에코의 서재)>     
 
해야 할 일이 재미있다면 한결 일하기가 수월할 것이다.
 
사실 이들은 좋은 직업의 요건에 관한 관습적인 관념을 뒤집는다는 점에서도 아이 같은 면이 있다. 그들은 늘 어떤 직업의 물질적 혜택보다는 그 일 자체가 주는 재미를 더 높이 평가한다. 특히 선호하는 것은 컨테이너 터미널의 크레인 조종사 자리다. 배와 부두를 굽어볼 수 있는 좋은 자리에서 일을 하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가 열차의 유압식 문이 여닫히는 ‘쉬익’하는 매혹적인 소리에 반해 기차 운전사가 되기를 갈망하거나, 부풀어 오른 봉투에 항공 우편 딱지를 붙이는 만족감 때문에 우체국 운영을 갈망하는 것과 비슷하다. (알랭 드 보통, <일의 기쁨과 슬픔(이레, 2009), ‘물류’ 중에서)
 
재미난 일은 ‘재미’란 측면에서 분명 놀이와 닮았다. 어떤 사람은 빠져들 정도로 일이 즐겁다면, 굳이 기분전환을 위한 별도의 오락거리가 필요 없다고 딱 잘라 말한다. 재미난 일을 생산적인 놀이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극단적인 사례이긴 하지만, 일과 놀이의 경계를 알지 못하는 일 중독자의 경우를 보면, 일을 통해 자기 능력을 발휘하고 성취감을 느끼는 것이 좋아서 쉼 없이 일하고, 심지어 돈을 받지 못해도 괜찮다고 여긴다. 이런 일 중독자에게는 일이 더는 일이 아니라 놀이라고 해야 할 정도다.
 
하지만 일이 아무리 재미있다고 하더라도 일이 놀이는 아니다. 일은 생존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에 타인에게 전가시키지 않는 이상 힘들어도 반드시 해야 한다는 점에서 놀이와 차이가 난다. 혹시 재미난 일이라면, 평생 일만 해도 즐거웠다고 만족할 수 있을까?
 
놀이는 ‘위험한 요술쟁이’
 
그러나 오늘날 대다수 사람들이 종사하는 임금노동과 같은 돈벌이가 놀이처럼 흥미롭고 재미있는 경우는 드문 것 같다. 그래서 사람들은 피곤한 노동에서 잠시 해방되기 위해, 또 노동현장으로 되돌아갈 힘을 얻기 위해 여가활동, 레크리에이션과 같은 기분전환을 위한 오락거리, 위안거리가 필요하다. 놀지 못하고 노동만 죽도록 해야 한다면, 불행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지겹고 피로한 노동이라면 더더욱 놀이의 필요성이 커진다.
 
그럼에도 노동과 연결된 여가활동은 놀이를 설명하기에 부족하다. 비록 노동에 지치고 피로한 삶의 균형을 맞춰주는 여가활동이 놀이에 포함된다고 할지라도 그렇다. 돈벌이가 일에 포함된다고 해서 일을 돈벌이로 정의하는 것이 적절하지 못한 것과 같다. 나흐마노비치가 ‘놀이는 창조성의 시작이자 삶의 근본적인 형태’라고 적고 있듯이, 놀이는 노동의 대립항 이상이다. 놀이는 ‘순수한 즐거움’이다.
 
놀이의 본질을 재미, 열정, 자유로움으로 보는 것은 옳다. 강제되거나 관리되는 상태에 놓이면, 놀이는 없다. 놀이는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자유로이 변화할 뿐이다. 원할 때 멈춰도 되고, 그러다 마음이 바뀌면 계속해도 된다. 놀이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의무와 무관하다. 마음이 이끌리는 대로, 긴장하고 집중하면서 자신의 상상력, 창조력을 발휘하는 것이 바로 놀이다.
 
이때 노는 데는 별도의 보상이 필요 없다. 놀이하는 동안 즐겁고 자유로운 것으로 충분하다. 즉 놀이하는 과정, 그 경험이 중요할 뿐이다. 오히려 보상과 이익을 기대하게 되면, ‘놀이가 막혀버린다’고 나흐마노비치는 지적한다.
 
놀이에 몰입해서 잘 논다는 것이 행동의 결과 따위에는 신경 쓰지 않고 늘 즉흥적으로 움직인다는 의미라면, 작가가 말하듯, 놀이는 ’위험한 요술쟁이’일 수 있다.

▲J. 호이징하 <호모 루덴스(까치, 1998)>  
 
“놀이는 지혜와 어리석음의 대립이 아닐 뿐 아니라 참과 거짓, 선과 악의 대립도 아니다. 놀이는 비물리적인 행위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덕적인 기능도 아니다. 따라서 덕이냐 악이냐 하는 식의 평가는 여기에 적용될 수가 없다. 그렇다면 놀이를 참이나 선의 범주와는 직접 관계 지을 수 없다면, 어쩌면 미의 영역에 포함시킬 수 있지 않을까?”
(J. 호이징하, <호모 루덴스(까치, 1993)>, ‘문화현상으로서의 놀이의 본질과 의미’ 중에서) 
 
가치나 논리에 아무런 관심도 없는, 자유로운 놀이가 미적 활동인 예술로 이어지는 것이 놀라운 일은 아니다. 놀이가 바로 예술은 아니라 할지라도, 놀이가 창조적이라는 점에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연주하고 춤을 추는 예술 활동과 통한다는 것이다.
 
이런 경험이 전혀 생소하지 않다. 놀이에 빠져서 노는 순간, 놀라운 창의력이 잠에서 깨어나는 느낌을 받곤 한다. 그래서 마치 예술가라도 된 듯 도취된다. 놀이가 진짜 예술이 되기에는 창조적 영감만으로는 부족하겠지만, 이런 창조적인 미적 경험이 얼마나 우리 일상을 풍성하고 충만하게 하는지!
 
놀이하는 인간인 우리는 살아 있는 한, 삶에 생기를 주는 놀이를 포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 놀기를 그만두지 않는 한 창조의 샘은 마르지 않을 것이고, 언제든지 예술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놀이에 골몰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잠재적 예술가다. 다만, 세상의 틀을 깨뜨리는 자유로운 놀이가 방향을 잃고 어둠 속에서 표류하지 않도록 경계하자. 삶의 근본인 놀이가 삶 자체를 와해시키지 않도록 잘 달랠 필요는 있다.
 
우리는 ‘놀이하는 인간’
 
언젠가 책에서 읽은 구절이 떠오른다. 우리 인간은 ‘놀기 위해 태어났다’는 것이다. 우리가 일하기 위해 태어나지 않은 것만은 분명해 보이지만, 놀기 위해 태어났다고? 아무튼 듣기만 해도 유쾌해진다. 나는 인간이 ‘호모 루덴스(Homo Ludens)’, 즉 ‘놀이하는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호이징하의 생각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우리가 놀지 않았다면, 우리의 문명이나 문화인들 존재할 수 있었겠는가.
 
우리의 존재 자체가 놀이와 결부되어 있다면, 노동에 매몰된 삶은 제대로 된 삶, 진정한 삶이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죽기 직전, 사람들이 사는 동안 즐기지도 못하고 일만 하다가 삶을 허비했다고 유감을 표하지 않는가.
 
일이 재미있건 없건, 놀기 위해서는 일해야 하고, 일하기 위해서는 놀아야 한다. 기왕이면 일과 놀이가 노동과 여가처럼 인위적으로 분리되지 않고, 자연스레 어울리는 것이 좋다. 놀이하듯 일하고, 때로는 일조차 잊어버리고 마음껏 노는 것이 ‘놀이하는 인간’인 우리의 생리에 맞을 듯하다.
 
이 정도에서 놀이에 대한 생각을 접을까 싶다. 아무리 놀이에 관한 책이 재미있고, 놀이를 사색하고 글을 쓰는 것이 흥미롭다고 해도, 일은 일이다. 설사 이 일이 생산적인 놀이라도 힘들긴 마찬가지다.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은 재미난 일도, 즐거운 놀이도 아니고, 단지 쉬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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