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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이경신의 도서관 나들이(46) 완벽주의의 경계 
 
언젠가부터 나는 잘 알지 못하는 곳을 찾아가는 동안에도 ‘길을 잃지 않을까?’하는 불안이나 두려움이 없어졌다. 그렇다고 나의 공간 지각력이나 방향감각이 좋아졌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길을 잃고 헤매는 것에 담담해졌다고 해야 할까? 아니, 길을 찾아 방황하는 것이 재미나고 즐거웠다. 우연히 만난 이름 모를 길들, 익숙지 않은 풍경들이지만, 내가 가고자 했던 곳보다 더욱 강렬한 기억으로 남기도 했다. 때때로 의식의 표면 위로 불쑥 떠올라 삶에 빛깔을 더해줄 때면 길을 잃은 행운에 감사한다. 가끔 목적지도 없이 낯선 길을 일부러 배회하는 것도 이런 놀라운 경험 때문이다.
 
길 찾기와 닮은 우리 삶 

'완벽주의자'를 분석하고 있는 심리학자 탈 벤-샤하르의 책 "완벽의 추구" 위즈덤하우스, 2010

내가 살아온 방식, 살아가는 방식도 길을 찾아가는 방식과 비슷하다. 성인이 된 다음부터 지금까지 내 삶의 모습을 돌이켜보면 그렇다. 지름길로 곧장 들어서지 못하고 옆길로 빠져 빙빙 에둘러 가거나 길을 잃고 헤매다 지쳐 잠시 쉬기도 하고 놀기도 하는 식이었다. 실제 길을 잃고 헤맬 때처럼 한껏 여유를 부리며 즐기지는 못하지만, 안절부절 못하며 조바심을 내지는 않는다. 길을 잘못 들어 한참 우회한다 해도, 지름길을 찾지 못해 방황해도 담담하게 수용할 정도로 느긋할 수 있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애초에 내가 의도했던 삶의 방식이 길을 찾아 헤매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내가 원했던 것은 지름길을 통해서 목표를 향해 똑바로 나아가는, 잘 통제된 삶이었다. 하지만 이런 ‘완벽주의’를 깨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장애물이 널려 있는 삶의 현실, 크고 작은 실패와 좌절의 경험이 이어지다 보니, 자연스레 완벽주의를 고집하기 어려워졌다.
 
내 경우만이 아니라, 사실 우리의 삶이란 것이 헤매고 방황하는 길 찾기와 닮아 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때로는 방향을 잃고, 때로는 길을 잃어 낯선 곳으로 들어서기 마련이다. 그러나 최단거리로 목적지에 도달하려고 욕심을 내다보니, 스스로에게 기꺼이 방황할 기회를 허락하지 못할 뿐이다.
 
특히, 완벽주의자는 목표만 바라보고 최단거리로 내달릴 뿐만 아니라, 조금의 실수나 실패는 물론이요, 방황은 당연히 용납하지 않는다.
 
실패 없는 성장은 없다 
 
심리학자인 탈 벤-샤하르는 <완벽의 추구>(위즈덤하우스, 2010)에서 ‘완벽주의자’를 잘 분석하고 있다. ‘완벽주의자’는 실수와 실패를 두려워하고, 목표에 도달하는 과정에 무관심하고 결과에만 집중할 뿐만 아니라, 막상 원하는 목표에 도달했을 때조차 성공의 기쁨을 즐길 줄 모르는 사람이다. 또 ‘완벽주의자’는 모험과 도전보다는 안전한 선택을 지향하며 우리 삶을 통제하려다 보니,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할 기회를 제한한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 삶을 잘 들여다본다면, 삶이 풍성한 이유가 ‘변화’에 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삶은 우리 인간이 통제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변화무쌍하다. 쉼 없이 변화하는 삶 속에서 우리는 예기치 못한, 수없는 장애물과 부딪칠 수밖에 없다. 완벽주의자가 기대하듯, 삶은 우리 마음대로 제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언제든 미처 생각지도 못한 당황스럽고 힘에 부치는 상황에 놓일 수 있다. 게다가 우리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 아닌가.
 
어쩌면 실수와 실패는 완벽주의자들이 생각하듯 절대로 피해야 하는 부정적 경험이나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삶이 완벽하지 못한 우리에게 안겨다준 선물인지도 모른다. 불완전하기에 계속해서 배워나갈 수밖에 없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잠재력을 발견해나가는 존재인 우리에게 실수나 실패는 배움의 기회, 성장의 기회일 테니 말이다.
 
우리가 정한 목표라는 것도 어리석은 것일 수 있으니, 무조건 목표에만 도달하면 된다는 생각도 깊이 살펴볼 일이다. 게다가 스스로가 정한 목표에 신속히 도달하기 위해 과욕을 부리는 것에 대해서는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오히려 삶 속의 방황을 통해 예상치 못한 멋진 경험을 맛볼 수도 있고, 그 경험이 나의 목표를 바꿔놓을 수도 있으며, 변화를 맞닥뜨리면서 새로운 도전과 모험의 길로 들어설 수도 있는 것이다. 삶의 과정에서 얻는 체험들로부터 긍정적인 점들을 끌어낼 수 있다면, 과정의 즐거움도 적지 않다. 과정을 즐겁게 겪어나간 사람이라면 목표에 도달했을 때 어찌 기쁨이 적을까.
 
불완전한 존재로서의 자각
 
불완전한 인간인 한에서 완벽주의는 인간의 이상이자 꿈일 수 있다. 또 탈 벤-샤하르가 꿈꾸는 긍정적 완벽주의까지 부정할 필요도 없다. 다만 우리가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 우리 삶이 불확실하다는 것을 똑바로 인식하고, 수용하는 것은 행복한 삶을 꾸리는 데 있어 출발점이다.
 
삶에서 참으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완벽함이 아니라 인간적인 것을 추구하게 된다. 고대의 지혜를 지닌 문화에서는 완벽함보다 인간적인 것에 가치를 두었다. 일본에서 정원사는 정교한 균형미를 이룬 정원의 한쪽 구석에 민들레를 몇 송이 심는다고 한다. 이란에서는 아름다운 문양으로 섬세하게 짠 카펫에 의도적으로 흠을 하나 남겨놓는다고 한다. 그것을 ‘페르시아의 흠’이라고 부른다. 청교도들이 누비 이불을 만들 때 누비 이불의 대가는 그가 만드는 누비 이불마다 피를 한 방울 떨어뜨린다고 한다. 인디언들은 구슬로 목걸이를 만들 때 살짝 깨진 구슬을 하나 꿰어 넣었다고 한다. 그것을 ‘영혼의 구슬’이라고 불렀다. 영혼을 지닌 것은 어떤 존재도 완벽할 수가 없다. 당신이 만들어가는 삶의 천에 ‘영혼의 구슬’과 같은 올이 하나 들어갈 수 있다면 당신이 꿈꾸었던 삶의 천보다 더 멋진 천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레이첼 나오미 레멘, <할아버지의 기도> 문예, 2005)
 
적어도 인간으로서 만끽할 수 있는 행복은 완벽에 있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영혼의 구슬’의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  (이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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