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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으로 말하다

'푸른 수염'을 생각하다

그 여자들의 물결 일다 2011. 4. 11. 08:30
<일다> 딸을 만나러 가는 길 (7) 
 
난 전남편을 생각할 때마다 <푸른 수염>이라는 동화를 떠올린다. 푸른 수염의 남자와 결혼한 여인은 남편으로부터 집안 곳곳을 안내 받는다. 푸른 수염은 아내에게 ‘모든 방들은 다 마음대로 드나들어도 되지만, 이 방만은 절대로 열어보지 말라’고 당부하며 한 방을 소개한다. 물론 그 방의 열쇠까지 그녀의 손에 쥐어주면서….
 
그러나 그 방에 무엇이 있는지 너무나 궁금해진 푸른 수염의 아내는 결국 그 방문을 열어보고야 만다. 그것으로 인해 남편이 숨기고 싶어했던 것을 알게 되고, 죽을 위험까지 갔던 여인은 가족들(남성)의 도움으로 푸른 수염으로부터 목숨을 구하게 된다.
 
내가 이 이야기를 생각하는 건, 그 방 속에 여자들의 잔인한 시체들이 꽉 차 있었다는 이 동화의 스토리 때문이 아니다. 친정아버지와 남자형제들이 그녀를 구했다는 것 때문은 더더욱 아니다. 내가 이 글에서 주목하는 건 사람들의 관계에는 이렇듯 숨기고 싶은, 상대방에게 절대 말하고 싶지 않은 무엇이 있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의 관계는 끝이 날 수밖에 없는, 그런 무엇.
 
옛날 남편과의 관계가 그랬던 것 같다. 남편과 이혼한 이후, 한 번도 이혼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던 것은, 만약 계속 그와 결혼 관계를 계속 유지하려 했다면 내가 얼마나 비겁했어야 했는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끔씩 눈물이 난다. 이런 비겁함들에 자주 숨통이 조였던 그 시절을 떠올리면. 꽥- 소리 한번 지르지 못하고 그렇게 죽어버리고 말 것 같았던 그 시절.
 
남편이 나를 진심으로 사랑해서 결혼했는지, 아니면 결혼 전에 임신한 아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결혼했는지는 결혼 당시에도, 또 이혼 후에도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았다. 난 분명 아이를 낳기 위해 결혼을 했고, 그렇게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살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건 꼭 남편의 그 물건을 보기 전의 일이다.
 
결혼을 하고 출산일을 불과 한 달 남짓 남겨 놓았을까 말까 했던 어느 날, 난 가까이 지내던 한 친구로부터 좀 놀라운 말을 들었다.
 
“네 남편, 옛날에 사귄 여자친구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낙태시킨 적이 있데. 그러고도 그 여자와 헤어졌다지. 그녀는 헤어지길 원하지 않았다고 하던데 말이야.”
 
난 결혼 전 남편과 사귈 때에도 남편의 옛 애인 이야기는 들어 잘 알고 있었고, 또 우연히 그녀를 가까이에서 본 적도 있었다. 더욱이 결혼식을 준비하는 과정에선 그녀가 남편의 결혼 소식을 듣고 주위 사람들 사이에 자기를 너무 나쁘게 소문을 내서 매우 난처한 상황에 놓여있다는 말을 남편을 통해 직접 전해 듣기도 했었다.
 
난 그때, ‘참 이상한 여자네!’ 생각했을 뿐, ‘그녀가 왜 그럴까’를 결코 생각하지 못했다. 당시 난 남편과의 사랑에 너무 몰입해 있었고, 그런 만큼 주변의 객관적인 상황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 못했다. 그녀가 왜 나와 남편과의 결혼을 두고 저토록 목에 핏발을 세우는지 알지 못했고, 무엇보다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결혼을 했다. 결혼 후에도 우리는 남편이 연애시절, 그녀와 주고받았다는 편지들을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었다. 난 그것 역시 남편의 추억과 역사이므로 버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고, 남편에게도 그렇게 말했다. 난, 물론 그것을 읽지는 않았다. 남편 역시 표정 속에서 내가 그 편지를 읽지 않길 바란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어느 때고 내가 원한다면, 마치 안 본 척하고도 손을 뻗쳐 쉽게 그것을 읽을 수 있었지만, 난 그것을 읽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그 말을 들은 것이다. 그 친구가 돌아가기가 무섭게 주저하지 않고 바로 남편의 편지 뭉치를 꺼내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무언가 내 눈으로 확실한 단서를 발견하기 전에는 믿을 수가 없었다. 난 남편은 절대로 뻔뻔스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얼마나 긴 시간을 쪼그리고 앉아 읽었을까? 두서없이 펼쳐보던 한 편지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그때, 그곳에 마음 한구석을 놓고 왔다고 생각했어.”
 
난 남편이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고상하거나 훌륭하지 않은 사람일 수 있다는 걸 알았다. 항상 ‘그 여자 참 이상하네! 저러니까 남편이 싫어했겠구나’하며, 항상 두 사람의 관계가 깨진 책임이 그녀에게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남편의 잘못일 수도 있다는 걸 그때서야 생각했다.
 
그리고 나와의 관계에서조차 잘 설명되지 않고 있던 것들이 확연하게 이해가 되었다. 당시 남편은 그녀와의 사이에서 벌어진 갖은 일들이 주위에 파다하게 알려진 상황에서, 다시 아이를 낙태시키고 파혼을 하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와 결혼했다고. 그저 그 사건으로 남편이 왜 원하지 않는 결혼을 선택해야 했는지 깨달았고, 그것만으로도 난 충분히 불행했다.
 
결국, 푸른 수염이 열어보아선 안 된다고 한 바로 그 방문을 열어보고 만 것이었다. 물론, 남편에게 이러이러한 글을 보고야 말았다는 말은 한번도 하지 않고 난 이혼을 했다.
 
아무튼 그 글을 보고 난 뒤, 마음은 예전처럼 남편을 사랑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차갑게도 대하지 못했다. 이혼을 할 생각도, 할 거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던 난, 일생을 이렇듯 불행한 관계 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인정하지 못해 더 많이 노력했던 것 같다.
 
그럴수록 더욱 비겁하고 비루해져만 갔다. 좀더 상냥하려고, 더 마음씨 좋은 아내, 며느리가 되려고 무진 애를 썼었다. 그렇게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한다고, 이혼할 것이 아니니까 싸워서는 더더욱 안 되고, 되도록이면 평화롭게 살아야 한다고…. 아무도 그렇게 하라고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는데도 몸은 자꾸 그렇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겉으로는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 앞에서 그는 항상 더욱 상냥했고, 난 정말 비굴했으니까.
 
그렇게 살았었다, 좀더. 그 글을 본 한 달 뒤쯤 아이를 낳았고, 또 늦는 남편을 기다리며 아이를 키웠고, 집에서 아주 가끔씩은 돈을 벌 수 있는 일이 있으면 하기도 하면서. 그렇게 다시 1년이 지나고 있었다. 그렇게 평생이 지나갈 수도 있었겠다. 나만 숨죽여 살았다면, 그렇게 죽을 때까지 살았을 수도 있었겠다.  (윤하)

* 여성저널리스트들의 유쾌한 실험 <일다> 즐겨찾기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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