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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윤하의 "딸을 만나러 가는 길" 10번째 이야기 
 
진보적인 사람이라고 해서 꼭 여성주의자가 아니라는 건 내 경험을 들여다봐도 잘 알 수 있다. 대학시절 학생운동을 하면서도, 여성의식을 내면화하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래서 성차별적인 명절문화를 지켜보면서 이미 초등학교 6학년 때 여성이 얼마나 불공평한 상황에 놓여있는지 깨달았다는 친구가 정말 대단해 보인다. 1남 4녀의 아이들 가운데 넷째 남동생의 밥을 가장 먼저 퍼주는 어머니 밑에서, 매일 그 밥을 얻어먹고 컸으면서도 내가 이 땅의 차별 받는 여성이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내게 대학 4년의 기간은 진보적인 의식뿐만 아니라, 여성으로서 자기 인식을 할 수 있었던 중요한 시기였다. 청소년기의 나는 무척이나 감상적인 소녀였기에, 대학시절 감상적인 생각과 행동을 벗어 던지려고 무던히 애를 썼던 것 같다. 이런 시도들이 다 성공한 것은 아니지만, 나를 조금씩 성장시켰다. 이 경험들을 통해 나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언젠가는 극복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을 쌓아갈 수 있었다.
 
특히 잊을 수 없는 경험은 바로 대학 3학년 여름방학 한달 동안 했던 신문배달이었다. ‘아침을 여는 사람’이 돼야겠다는 낭만적인 결심에서 시작한 것이었다. 당시 나는 자전거도 탈 줄 몰라, 신문보급소 앞에서 할까 말까 20분을 서성였다. 한참 망설이다 용기를 내어 사무실로 들어갔다.
 
자전거를 못 탔기 때문에 보급소에서 가장 가깝고 적은 구역을 배정받았다. 그러나 생각보다 그 일은 고된 작업이었다. 새벽 4시 반에 집을 나와 30분을 걸어야 했고, 다시 10분간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와 두 시간 넘게 걸어서 신문을 돌려야 한다는 걸 알았다.
 
애초에는 방학 내내 두 달 간 할 생각이었다. ‘여러 경험을 해보는 것은 좋은 일’이라며 나의 결심에 별 말씀 없으셨던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는 “신문배달 시키려고 대학 보낸 줄 아냐”며 울고불고 하셨다. 그러나 어머니는 막상 내가 일을 시작한 뒤에는 “학교 다니면서도 계속해서 그 돈으로 대학원을 가면 좋겠다”고 한술 더 뜨셨다. 하지만 계획했던 두 달은커녕 한 달을 겨우 했을 뿐이다.
 
내가 배달했던 곳 가운데 한 집은 성매매 업소들이 줄지어 있는 골목에 있었기 때문에 매일 그 골목을 드나들어야 했다. 처음 그곳을 지나갔을 때는 너무 생경해 충격적이었다. 짙은 화장과 화려한 의상의 젊은 아가씨들이 형광조명 아래 앉아 있었다. 내가 신문을 돌리는 시간은 거의 파장 무렵이어서 좀더 일상적인 그들의 모습도 만날 수 있었다.
 
한 일주일 정도는 당황하면서 그 골목을 다녔던 것 같다. 나는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잘 몰랐고, 무엇보다 말로만 듣던 성매매 여성들이 내가 살고 있는 바로 근처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놀랐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맞닥뜨려야 하는 그녀들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다시 일주일 정도 지나면서부터는 그 여성들을 구경하며 다녔던 것 같다. 여전히 조명 아래 앉아 있는 여성들도 있었지만, 더 많은 사람들은 평상복 차림으로 배드민턴을 치기도 하고, 밥을 먹기도 하고, 깔깔거리며 골목을 뛰어다니기도 했다. 물론 지나는 남성들에게는 호객행위도 하면서…. 이른 아침 그 좁은 골목은 늘 그렇게 술렁거렸다.
 
다시 여러 날 지나서부터 그녀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아니 저렇게 어린 소녀가 신문을 배달하다니, 쯧쯧’ 하는. 새벽에 겨우 일어나 아무 옷이나 걸치고 신문배달을 했던 나는 누가 보아도 소위 ‘여대생’처럼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녀들의 이런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아니 코웃음을 치면서 고개를 바짝 들고 당당하게 그 골목을 걸어 다녔다. ‘나는 너희들과는 질적으로 달라. 난 이곳을 나가는 즉시 너희들이 너무 부러워하는 바로 그 대학생이란 말이야, 대학생!’ 하면서….
 
그러다 장마가 시작되었다. 젖은 청바지가 다리에 척척 감기고, 신문보퉁이를 허리에 엉거주춤 낀 채, 우산을 받고 장대비를 뚫으며 신문을 돌려야 했다. 하루 속히 신문배달을 그만두고 싶어졌고, 더욱이 그 골목을 드나드는 것에 진저리가 났다. 그녀들과 시선이 마주치는 것도, 그녀들의 안됐다는 시선을 무시하는 것도, 모든 것이 시들해졌다. 비가 많이 와서 지쳤고, 새벽에 일어나 너무 걷는 것이 힘에 부쳤다.
 
‘힘들어서 한 달만 하겠다’고 말을 해놓고, 그 한 달째 되기 4일 전쯤 어느 날의 일이다. 이제 며칠 후면 이 골목을 더 이상 안 들어와도 된다는 즐거움으로, 조금은 마음 가볍게 일을 하고 있었다. 그날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 때문에 골목은 또 텅 비었고, 안에서 밖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간혹 있었지만 다들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지금은 기억에 없다.
 
그렇게 텅 빈 골목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신문보퉁이를 끼고 부지런히 걷고 있는데, 내 발 바로 앞 빗물 속으로 ‘찌지직-’하면서 담배꽁초 하나가 날아와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나는 발길을 멈추지 않고 걸으면서 그것이 날아온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문을 열어 놓은 채 한 여성이 앉아 있었고, 우리는 서로 눈이 마주쳤다. 바로 그 순간, 아주 갑작스럽고 짧은 순간 머리 속을 확 뚫고 지나간 강렬한 무엇이 있었다. ‘그녀가 바로 나라는 것, 그리고 내가 바로 그녀라는 것.’
 
당시 나는 학생운동을 하면서도 그것을 나의 실존적 문제와 연관지어 생각해보지 않았다. 운동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늘 누군가를 위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곧 내 일이라는 것, 게다가 내가 바로 성매매 여성들과 똑같이 이 땅의 딸이고, ‘그녀’들이 곧 ‘나’라는 것을 그때서야 깨달은 것이다. 그날 눈물을 철철 흘리며 그 골목을 빠져나오면서, 그녀와 마음으로 약속을 했다. 이제는 나 자신을 위해 싸우겠다고. 이후 마치 독립운동 하듯 학생운동을 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나는 그녀와 눈이 마주쳤던 그날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전율로 그 기억을 떠올린다. 내가 어디쯤 있는지 잘 모를 때, 그리고 가끔씩은 길을 잃었다고 느낄 때, 그럴 때면 그 날을 생각한다. 나의 의식을 팽팽하게 사로잡았던 그녀의 눈길을 떠올린다. (윤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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