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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손정은의 '명명할 수 없는 풍경展'을 보고 
 
※ 필자 이충열님은 '현대미술'와 '페미니즘 미술'을 공부하고 있으며, 여성주의를 지지하는 작가로서 현재는 작업을 통해 이성애중심의 가족제도가 파생하는 문제들을 탐구하고 있습니다.-편집자 주
 
“여성 작가 손정은은 세상의 모든 왜곡된 남성권력과 억압기제 등에 대해 날선 비판을 가하는 작품을 만들었다.” (손정은의 ‘Easter boy 090212041’, 아시아투데이)
 
“작가는 작품들을 통해 왜곡된 남성 권력에 대한 거부감과 그것에 대한 분노, 응징을 거쳐 화합과 용서로 이어지는 변증법적 치유 과정을 특유의 연출 기법으로 보여준다.” (또 하나의 굴레… 왜곡된 남성 권력, 한국일보)
 
‘작가란 당대사회의 고정관념을 깨는 교란자라는 면에서 그런 역량을 충분히 발휘한 돋보이는 전시다.“ (’여성의 질은 남성을 구원하는 영원한 집인가‘, 오마이뉴스)
 
현실 비판적인 작업이 드문 한국 미술계에 아쉬움을 느끼고 있던 차에, ‘남성 권력에 대한 비판’이 담긴 작업을 하는 ‘페미니스트’ 작가가 전시를 한다고 하여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많은 언론이 입을 모아 보내는 찬사와 달리, 매체에 소개된 전시 이미지는 작업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읽혀서 의아한 마음으로 전시장인 서울 신문로 성곡미술관을 찾았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손정은의 ‘명명할 수 없는 풍경展'은 제목처럼, 결코 명명할 수 없는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명명할 수 없는 세 개의 풍경
 
▲ <제1장-무대: Porno graphic Love_사라진 비밀>에 전시된 작품들.  사진제공: 성곡미술관  

3개의 전시실에서 ‘미술심리극 프로젝트’ 형식을 표방하고 있는 이 전시는 ‘무대-현장-합창’의 순서로 진행된다고 한다.

<제1장-무대: Pornographic Love_사라진 비밀>은 ‘여성’에 대한 이미지가 압도적으로 등장하고, 희화화되거나 훼손된 남성이 곁들여 등장한다.

 
전시실에는 여러 겹의 비닐과 검정 끈으로 얼굴을 싸맨 벗은 남성을 범죄 사건의 용의자처럼 여러 각도에서 찍은 네 개의 사진(그 남자의 초상Ⅰ, 2007)과 여성의 성기모양으로 조각한 비누를 두 손에 감싸든 사진(영원한 여성, 2007)이 벽에 걸려있다. 중앙에는 캐비닛과 책상 등 철제 가구 위에 ‘여성’을 상징하는 것들을 박제한 유리병과 생리혈을 연상케 하는 드로잉이 놓여있고, 바닥에는 선풍기가 나뒹굴고 있었다.
 
여기저기 놓은 생선, 연체동물, 닭, 꽃 등을 박제한 유리병과 여성의 히스테리를 표현한 듯 바닥에서 꺼억꺼억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선풍기 등을 통해 후각, 청각, 촉각 등이 함께 작용하는 공간이 연출된다.
 
<제 2장 - 현장 : The Easter boys “너는 젊고 아름답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에서는 젊은 남성들이 붉은 배경의 공간에서 짓이겨진 꽃과 붉은 거즈와 랩 등에 폭력적으로 결박되어 있고 대상화되어 있다.
 
그런데 대규모의 스냅사진 집합 작업에서는 그마저도 일관성이 흔들린다. 대부분의 사진에서 남성들은 남성을 위한 포르노그라피에 등장하는 여성들처럼 물건처럼 묘사되어 있지만, 몇몇의 사진에서는 카메라에 시선을 맞추고 주체로서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젊기 때문에 아름답고, 그렇게 때문에 사랑하는 이성애의 권력구조를 그대로 드러내면서, 남성이 여성을 대상화하는 그 위계와 구조를 따라하고 있다.
 
<제 3장- 코러스 : The spring station of melancholia>는 전시 팸플릿에 설명된 바에 따르면, 앞에서처럼 ‘직, 간접적으로 응징의 행위가 드러나지 않’고 ‘포용과 화해, 용서로서의 의미가 강한 어머니의 방(자궁)’이라고 한다. 그러나 여전히 대상화되어 성기만 드러내고 있는 남성 이미지들이 등장하고, 거대한 남근 사진 앞에 폭력적인 방법으로 만들어진 입을 달고 눈동자마저 없는 여성들의 두상이 거친 프레임에 위태롭게 진열되어 있다.
 
물론 전시장의 한 구석에는 장미꽃을 안에 담고 있는 거즈의 조각들로 만들어진 천이 있고, 그것을 ‘(어머니의 이불, 2007-2011)’이라고 명명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전시실 내에서의 비중이 크지는 않아 그다지 설득력은 없어 보인다.
 
남성권력에 대한 비판인가, ‘따라하기’인가
 
▲ 손정은 작가의 Easter boy 090814167 (2011). 사진 제공:성곡 미술관 

 
결국 이 작업들은 ‘남성 권력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 권력을 가진 여성의 ‘남성 권력 따라 하기’로 읽힌다.
 
이 전시를 보면서 떠오른 비교되는 전시가 있었다. 2003년 겨울 젊은 여성작가들이 열었던 ‘안티 아라키 전시’가 그것이다. 2002년 말 한국에서 있었던 일본의 사진작가 ‘아라키 노부요시’의 전시를 통해, 여성을 대상화하고 학대하는 이미지가 ‘에로티시즘’으로 포장되는 데에 대한 분노와 저항을 담아 마련된 전시였다.
 
그들은 작가로서 사회적인 명성을 가진 것도 아니었고, 좋은 전시공간을 사용할 수도 없었다. 홍대 앞의 작은 카페를 빌렸던 그 전시 소식을 우연히 접한 나 또한 아라키 노부요시의 전시를 보고 문제를 느끼고 있었기에, ‘안티’가 어떻게 이루어지나 보고 싶어 관람하게 되었다. 당시 막연한 문제의식만 가지고 있을 뿐, ‘여성주의’에 대한 이해도 없었던 나는 여성 미술가들이 아라키가 여성들에게 한 것처럼 남성들을 거꾸로 매달거나 포박하고 학대할 것을 은근히 기대했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그런 학대나 폭력은 없었다. 여성이 스스로를 표현하고 있었고, 여성에 대한 시선에 대응하는 작업들이 있을 뿐이었다. 작가들에게 질문을 하면서 받았던 충격과 깨달음을 잊을 수가 없는데, 그것은 바로 ‘남성적인 권력구조와 가부장제를 비판하는 방법은 그것을 역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여성이 하는 미술’과 ‘여성주의 미술’은 다르다. 그 때문에 미술제도 안에서 큰 전시관에서 개인전을 할 수 있는 사회적 위치를 차지한 작가가 행하는 ‘자기 치유적인 역할극’과 그것의 영향력에 대한 우려를 거둘 수 없는 것 같다.
 
남성의 지배 논리를 그대로 반영하는 작업이 ‘여성주의 미술’일 수는 없다. 타자 배제의 논리를 극복하고 남성주의 미술의 권위적인 역사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는 실험과 시도가 수반되어야 진정한 ‘여성주의 미술’이다. 우리가 ‘여성주의 미술’을 보다 쉽게 경험할 수 있는 날이 어서 빨리 오기를 기대하며, 여성주의를 지지하는 관객들의 많은 비판과 관심을 부탁드린다. (이충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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